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68화 (68/153)

귀환자 식당 68화.

잠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꽤 긴 시간.

“하아···.”

뜨거운 숨결과 함께 토해지는 깊은 무언가.

미연은 감았던 눈을 뜨고 날 빤히 쳐다봤다.

“신기한 힘이네. 오빠는 다른 사람에게 마력을 전해줄 수도 있는 거야?”

“···눈치챘어?”

각성자들이 가진 마력은 그 성질이 모두 다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끼리도 마력을 주고받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일반적인 각성자들의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각성자가 아닌 사람을 각성시키거나 하는 건 안 돼.”

“많이 변했네···. 예전에는 아무도 곁에 다가오지 말라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사람 같더니.”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내 말에 미연은 살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마 그녀가 더 잘 알겠지.

“전에 뉴스에서 나오던 화면을 봤었어.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야? 전에도 비슷한 힘을 쓰긴 했지만, 화면의 그 모습은 정말이지···.”

전능한 힘처럼 보였겠지.

손짓 한 번에 수백이 넘는 몬스터를 완전히 분해시켜버렸으니.

“내 능력은 좀··· 특별해. 다른 각성자들과는 마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도진이가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고 근육이나 유연성을 기르는 이유는 그 녀석이 내는 힘의 기본이 신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마력 자체의 수치가 더욱 중요해지겠지만, 그때를 위해서라도 마력이 담기는 그릇을 단련시키는 것은 필수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아마도 지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려나.

아주 오래전의 게이트 관리국장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죽은 사람.

어쩌면 게이트 관리국장 자리를 넘겨주면서 장민국 원장에게는 말을 해줬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도 확실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이야기를 해준다면 아마 지금 세상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알게 되는 사람이 될 거다.

“특별하다니?”

말을 해줘도 될까?

하기야 이제 와 이걸 누가 알게 된들, 무슨 상관일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마력을 흡수해서 성장하거든. ···죽은 각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마력.”

“···그게 무슨···. 그럼 다른 각성자를 죽여서?”

무슨 그런 끔찍한 상상을.

“아니. 아니지··· 오빠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그럼··· 설마, 죽은 각성자들이라는 게.”

“맞아. 같은 게이트 안에 있는 다른 각성자가 죽으면, 그 사람들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어.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이미연의 눈동자가 잠시 놀람으로 물들었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왜 그렇게 어려운 게이트만 들어갔던 건지···.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힘을 키우기 위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겠다.

긍정을 하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부정하면 나 자신을 속이게 되는 거니까.

“나 정말 이기적이지?”

“···응. 그래도 이해는 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 차갑던 오빠가 자꾸만 나서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응? 이건 무슨 소리지.

난 딱히 나서서 사람들을 구할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데···.

“딱히 그런 건···.”

“난 알아. 겉으론 늘 차갑게 보였어도 사실은 따듯한 사람이었다는 거.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도 언젠가는 그 사람의 마력을 흡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멀리한 거겠지.”

“아니, 정말로···.”

“많은 사람의 힘을 받아 강해졌으니, 이제는 오빠가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렇게 처량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데, 거기에 모래를 뿌릴 순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번엔 미연이가 양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아카데미가 생기고 거기 학장으로 오빠가 간다는 소리는 들었어. 여전히 오빤 멋진 사람이네. ···나도 힘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

왜 그러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야 할 타이밍은 지금뿐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일은 무슨. 그냥···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

“그래도 미연이의 삶에 대해 듣고 싶은데.”

이야기는 제법 오래 이어졌지만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으며 중간중간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게이트와 각성자가 사라지고, 미연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40이 넘어서까지 젊음을 유지하던 외모는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됐고, 그 뒤로 30년.

이제 그녀는 여느 70대의 여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은 왜 안 했어?”

“글쎄···. 완전히 능력이 사라진 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45이었어. 그때 가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혼자 사는 게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랄까.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냐.”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다른 누군가? 그럼 그 전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오빠, 바보야?”

나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바보라도 된 것처럼.

“크흠. 나, 나도··· 널 좋아했었는데.”

매번 날 구해주는 천사.

나야말로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야 못 배겼지.

“알아.”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나 같은 애가 옆에 붙어 다녔는데, 마음이 움직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미연이는 지금 알고 있을까?

처음 수줍게 차에서 내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순간과 지금의 자신이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걸.

70대의 할머니에서 20대의 모습이었던 시절로 돌아와 있다는 걸 말이다.

“오빤 몰랐겠지만, 그때도 은근히 오빠 노리던 애들이 많았다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옆에 붙어 다니면서 견제를···.”

이제야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듯.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물론 그녀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전에 없던 활력이 몸에 차오르니 자연스레 예전의 성격으로 돌아온 것일 뿐.

“다리는 어쩌다가?”

“풉-. 오빤 모르겠지만, 이 나이 되면 다들 관절염 하나씩은 끼고 산다고. 류머티즘이라고 알려나 모르겠네?”

“나도 그런 건 다 알거든?”

“치- 오빠야 수십 년째 20대로 살면서 알기는. 이런 건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 못하는 분야거든요?”

“좋겠다! 늙어서.”

아차.

너무 편하게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해선 안 될 말이···.

“에잇-!”

딱-!

이마에 날아든 작은 딱밤.

“아무튼 여자 맘 모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흥!”

“미, 미안···.”

풉-.

내 사과에 미연은 작게 웃었다.

이 모습만은 정말 예전의 그녀와 전혀 달라진 게 없네.

참으로 그리운 미소였다.

“됐어. 나이 든 거야 사실이고···. 또 알아? 다시 각성했으니 젊어질지도.”

“맞아. 그럴 거야.”

“···정말?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

“정말이야.”

이렇게까지 나이가 들어서 각성한 경우가 없긴 하지만, 예전에 30대에 각성한 이들을 보면 분명 젊어졌던 기억이 난다.

20대 시절의 모습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분명 젊어지게 될 거다.

그건 나의 확신이었고,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조금 더 있다가 가라니까···.”

“됐어. 오늘만 날인가? 거기다 이제 곧 올 시간이잖아. 그 일본인.”

“이루? 걔는 이제···.”

“난 사실 아직도 일본에 대한 건 거부감부터 들어서, 그러니까 그건 차차 하자. 그리고··· 다리 고마워.”

넘겨준 마력 덕분인지, 관절염이 많이 좋아졌다.

뭔가 사고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 모든 일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또 올 거지?”

“뭐야··· 당연한 거 아냐? 아주 질리도록 찾아올 거야. 나중에 귀찮으니까 그만 오라고나 하지 마.”

“쓸데없는 소리는, 언제든지 와도 되니까. ···얼굴이나 자주 보여줘. 그동안 못 본 거 앞으로라도 자주 보게.”

“이, 이 오빠가!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이런 말 생전 못하던 사람이···.”

“그래서 싫어?”

“···누, 누가 싫데?”

차에 타면 거울이 있으려나.

지금 자기 얼굴이 저렇게 곧 터질 것 같은 색이라는 걸 알면 조금 창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살짝 웃어주곤, 차 문 옆에 서 있던 미연을 살짝 안아줬다.

“왜, 왜 이래···. 사람들이 욕해.”

“욕을 왜 해?”

“그야···. 지금 난 할머니잖아···.”

“그래도 내가 오빤 거 잊었어?”

“···하여튼.”

보진 못했지만, 살짝 웃었던 것 같다.

미연이가 차를 타고 떠나고.

잠시 후에 안정민 과장과 도진이가 가게로 돌아왔다.

“재회는 잘하셨습니까?”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지?”

화가 났다기보단,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미연 선생님이 부탁하셨습니다. 만약 못 알아보면 굳이 알리지 말아 달라고···.”

그런 이유였나.

그까짓 외모가 조금 시간의 순리에 따른 게 뭐가 그리 큰 문제라고.

적어도 나는 그런 겉모습에 현혹되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부터는 나에게 관련된 일은 나에게 알려줘.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나는 내 생각이 더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건 됐고, 이루는?”

“위성으로 확인했을 때는 벌써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보입니다. 게이트도 사라진 상태고요.”

“그럼 곧 오겠네?”

“그게···.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째서 아직 안 오시는지···.”

이상하네.

그 섬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커다란 언덕에 온통 숲과 나무, 야생동물 조금.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길래 안 오는 거지?

“전화도 안 되는 거지?”

“네, 저야 위성전화기를 가져갔지만 두고 오진 않았으니까요. 아! 물론 선생님께서 필요하시다면 기지국을 건설할 예정입니다.”

그거야 블랙 녀석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온다고 해도 그 녀석한테 휴대전화라는 게 필요하긴 할까?

“그럼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잠깐, 전부 철수했다고 했지?”

“네. 한 명도 남김없이요. 아무도 없는 편이 낫다고 하셔서···.”

그건 잘했는데, 한 가지를 빼먹은 거 아닌가?

“그럼, 이루는 뭘 타고 돌아와?”

“···네? 그야, 선생님처럼 날아서···.”

“응? 이루는 하늘 못 나는데···.”

“···지금 당장 헬기를 보내겠습니다.”

혹시라도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지금 전하고 싶다.

이루야,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섬의 자연을 훼손하진 말아줘. 라고.

여차하면 헤엄을 쳐서 올 수는 있었을 텐데.

이 녀석이 동해를 한 번 건너 온 뒤로는 수영에 트라우마라도 생긴 건가.

* * *

새하얀 색상의 거대한 왕성.

“헌터 아카데미의 정식 입학은 아직 멀었을 텐데. 왜 벌써 간다는 게냐.”

“어차피 제가 아카데미에 직접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서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진 말이구나?”

“네.”

“···그에겐 참으로 빚이 많지. 그래, 어차피 네가 간다고 정했으니 막을 수도 없을 테고···. 알겠다.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해 보아라.”

“당장은 없어요.”

“그건 나중에는 필요할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라미야는 투르키 국왕의 말에 살짝 웃었다.

“아마도요. 재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정말 자신은 있는 게냐? 듣자 하니, 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듯싶던데.”

“저 이래 봬도 인기 많거든요?”

“녀석하고는··· 알았다. 어떻게든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어보거라. 지원은 아낌없이 할 테니···. 아, 그리고 한국에 가거든 내 손자 녀석도 한 번 들여다봐 주고. 이 녀석은 한국으로 유학을 가더니 어찌 이리도 소식 한 번을 듣기가 힘든 건지.”

“그럴게요.”

“그리고 하나 더.”

자리에서 물러나려던 라미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캇바라(사우디 중앙정보국 GIP-General Intelligence Presidency)에서 이상한 보고가 왔는데, 네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인간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네스티가 무슨 몬스터라도 된다고 하던가요?”

“나도 그게 궁금하구나. 그 꼬마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라미야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입이 찢어져도 게이트에서 나온 마왕의 후신後身이라는 소린 할 수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네스티는 인간이에요. 다만 조금 특별한 아이라고만 해둘게요.”

“···아무리 너라도 거짓은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촌 오빠라도 상대는 왕.

그것도 절대왕권 국가의 국왕이었다.

“물론이에요.”

이제 네스티가 설령 진짜 마왕의 재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게 됐다.

‘···너라면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비행기에 오르기 전, 라미야는 아직 멀리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마음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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