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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 식당-57화 (57/153)

귀환자 식당 57화.

가게 앞에 현수막을 걸까 말까, 상당히 고민했다.

한국대라고 하면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자부하는 대학교인데, 조카가 그런 곳엘 떡하니 붙었으니 자랑할 만도 하지.

“형, 요즘 그러면 진짜 팔불출 소리 들어.”

“···넌 한국말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냐.”

“모르나 본데, 원래 외국어는 연애하면 자연히 빨리 느는 거야.”

목적이 그건 아니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난 팔불출 소리 들어도 상관없는데.”

“···시은이 쪽팔려 죽어도?”

음. 그건 좀.

시은이한테 미움받는 건 싫으니까.

“마을 잔치했잖아. 그거면 됐지.”

“잔치는 무슨···.”

어디 시골에 고향 집이라도 있으면 진짜 동네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기분이긴 한데.

뭔가 모를 아쉬움이 남은 느낌이라 찜찜하다.

우웅-.

전화가 울려서 보니 석웅 형님이었다.

“네, 형님.”

-이번에 조카가 한국대에 합격했다면서?

“하하하-. 네, 그것도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거참, 똑소리 나는 조카를 뒀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형님도 별고 없으시죠?”

목소리를 들으니 평소와 같았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안부를 물어봤다.

나이가 많을수록 하루하루가 소중한 법이다.

-뭐, 시골 마을에 별일이야 있으려고. 그냥 축하 인사나 하려고 했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이루한테 들었지 뭘.

이루를 슬쩍 돌아보니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도대체 석웅 형님과는 또 언제 연락까지 하고 지낸 건지.

녀석도 참 바쁘게 사네.

“감사합니다. 서울은 또 안 올라오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일간 한 번 올라갈 생각이네. 가게에 들를 텐데 필요한 건 없나 싶어서 전화한 것도 있고···. 크흠, 그 한국대 붙었다는 조카한테 거··· 몸보신 같은 건 필요 없나 싶기도 하고···.

이 형님이 왜 이러시지?

“···혹시 산삼 캐셨어요?”

-응? 오오, 자네 어떻게 알았나?! 마침 얼마 전에 아주 기가 막힌 녀석 하나가 내 품에 안겼지 뭔가?

“···그게 잘 안 팔립니까?”

-어허, 거 섭섭하게 무슨 그런 말을···. 내가 꼭 아우에게 산삼 팔아먹으려고 연락한 것도 아니고.

아마 이번에도 제법 귀한 녀석인가 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팔 수 있겠지만, 먼저 나에게 연락을 주신 거겠지.

“마침 영물이 하나 있었으면 하던 참입니다. 가져다주십시오.”

-그래? 내 그럼 모레 올라가서 들리겠네. 허허허-.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조심히 올라오시고요.”

마력이란 곧 기운.

신체 강화 계열이 아니더라도 신체의 단련은 곧 마력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은이는 전에 한 번 먹었으니, 이번에는 시연이 차례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조심스럽게 도울 필요가 없으니 효과가 더 좋을 테고.

전화를 끊고 나니 이루가 또 슬쩍 다가온다.

이렇게 올 때면 늘 뭔가 부탁할 게 있을 때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헤헤-. 우리도 크리스마스엔 가게 쉴 거지?”

“일요일도 아닌데?”

“에이-. 그래도 크리스마스엔 쉬어야지, 인간적으로.”

그런가?

크리스마스라··· 딱히 챙겨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날은 게이트에 들어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

어쨌든 모두가 즐겁게 지내길 원하는 날이기도 하니까.

“근데 그날 쉬면 뭐 하려고?”

“나 여행 다녀오려고.”

“···은지랑?”

“응. 크리스마스는 연인과 함께지.”

이 녀석 자기 나이를 정말 23살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너··· 은지한테 사실대로 이야기는 했냐?”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사실을 알고 나면 충격이 상당할 텐데.

“그야 당연히 말했지.”

“···말했다고? 네 나이랑 전부?”

70이 넘은 노인이라고 했는데도 만남을 유지한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응. 전부 말 해줬는데, 은지는 상관없데.”

와··· 충격은 내가 받아버렸네.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는데, 아무리 외모가 젊다곤 하지만 알맹이가 할아버지뻘인데 괜찮다고?

난 도무지 모르겠다.

저 녀석은 걱정도 안 되나?

“그래. 뭐, 두 사람 사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근데 너 대마도에 내려가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아직 계획 중이긴 하지만, 대마도 전체를 각성자 양성 기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각성자들이 제대로 훈련하려면 반경 수십 km 정도는 민가가 없는 편이 좋은데 마침 적당한 곳이 나온 셈이니까.

아마도 민간인의 출입이 아예 제한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가족 간의 면회 정도가 최대 허용 수준일 지도 모르는데.

두 사람이 장거리 연애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깊다고 하기엔 너무 만남의 기간이 짧다.

아마도 내년 봄.

겨울이 지나면 이루는 여길 떠날 거다.

그 전에 실컷 사랑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고 보면 너, 집도 굳이 여기 구할 필요 없는 거 아냐?”

“왜?”

“···대마도 여기서 멀어.”

“괜찮아. 그래도 주말마다 집에 올 거니까.”

“매주? 귀찮을 텐데···.”

대마도에도 공항이야 있지만 매주 올라온다?

얼마나 갈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인데.

메를린을 만났을 때 겪어봤으니 녀석이 더 잘 알 테고.

“어차피 은지도 학생이라 주중엔 잘 못 보고, 원래 가끔 만나야 더 애틋한 법이거든.”

뭐, 그래도 이번엔 같은 나라 안이니까.

“그래. 힘내라.”

“그런 의미에서 형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꺼내는 말.

못 들어줄 게 아니라면야,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어지간한 건 들어줄 용의가 있지.

“나 개인 비행기 한 대···. 형? 잠깐만, 어디가?!”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내가 바보지.

“시끄러워, 장사 준비할 거야.”

“그러지 말고, 퇴직금이다 생각하고···. 응?”

“야 이 미친놈아! 식당에서 반년 일하고 퇴직금으로 비행기를 달라는 놈이 어딨어!”

“음, 역시 그냥 내가 사야 하나···.”

오랜만에 내면의 폭력성이 눈을 뜨려고 하네.

“아! 마, 맞다. 도진아? 훈련해야지···?”

가끔 밉상 짓을 하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쓸쓸하겠지.

도진이도, 이루도 모두 나가버리고 나면.

* * *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정말 별것 없네.

내가 봐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짐이 적긴 하다.

“가구는 재단 측에서 미리 다 준비해뒀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들어가서 함께 사신다니 잘 되셨네요.”

“아이들이 불편할까 걱정이죠.”

“하하-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그 두 사람이 선생님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편하게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또 다른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국정원 관련 일로.

“이번엔 또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가 확실히 티가 나긴 하나 보네요.”

정말 모르는 건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가.

“무슨 일인데요.”

“삼영 그룹에서 아무래도 엉뚱한 길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리스트를 전해준 게 생각이 난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건, 아마 내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의미겠지.

“어차피 기업에서 자기들이 개발하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 제가 만들어라 만들지 말아라 참견할 부분은 아니죠.”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다만,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어떤 문제든 뒤처리는 제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양성 기관의 후원은 어떻게 할까요?”

후원이라곤 하지만 돈을 받는 건 아니다.

“그냥 구매하는 걸로 하죠.”

“만약 삼영에서 특허 자체를 미국 측에 넘기면 금액이 상당할 겁니다.”

“제가 그 정도 돈은 충분히 벌어드린 것 같은데요.”

“무, 물론 그렇지만···. 이 예산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도대체 어디까지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거지?

“지금 가장 시급한 게 뭔지, 제가 다시 설명해 드려야 하는 겁니까?”

“아!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보이는 위험이 없다 보니, 사람들의 인식이 아무래도···.”

게이트를 제때 막지 못해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꼴을 굳이 봐야 하는 건가?

눈앞에서 자기 가족이 찢겨나가고, 건물이 무너지는 걸 눈으로 확인해야만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건가?

답답하다.

하지만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멍청하게 부모님을 졸라 게이트에 구경하러 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알지 못하는 영역인 셈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지.

정말 언젠가 한 번은 터져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우디 측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요청이요?”

“이래저래 말이 길지만 결국 각성자 양성 기관에 사우디아라비아 소속의 각성자 파견 허가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건 아직 기밀에 속하는 정보이고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왜 사우디지?

라미야가 있으니 차라리 본인들의 나라에 하나 차리면 될 텐데.

라미야의 능력이 공간 계열이긴 하지만, 그녀가 가진 경험이라면 큰 문제가 될 리도 없고.

“1차 요청은 총 20명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나이가 너무 어린아이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혹시 이름이···.”

“아, 네스티라고 합니다.”

독박육아는 하기 싫다 이건가.

라미야의 생각이야 눈에 훤한데, 이번엔 잘못 짚었다.

“거절하세요.”

“···그, 정부에서는 어차피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일 거라면 이참에 국제적인 양성 기관으로 키우는 건 어떠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쪽에서 뭘 받기로 했습니까?”

“···하하.”

오랜만에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그야, 유전의 개발권을···.”

하기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받아낼 거라면 그것 말고는 없겠지.

“곧 마석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유전에는 크게 의미가 없을 텐데요.”

물론 마석이 나온다고 당장에 유가가 바닥을 치진 않는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나타난다고 해도 과도기를 거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나마 예전에 관련 기술이 있었으니 가속화는 빠르겠지만.

“인원이 늘어나는 만큼 관리는 힘들어집니다. 거기다 지금은 훈련 시킬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에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1차 훈련생 예상이 300명이다.

정확한 거야 지원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각성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정식으로 문을 여는 봄이 되면 상황이 또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외국인의 훈련도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안전이 더 중요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건 그때 가서 정하죠.”

아직 뭔가를 결정하기엔 조금 이르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조만간 큰일이 하나 터질 것 같으니까.

* * *

“삼촌이 이 방을 쓰시면 돼요.”

“···여긴 시연이가 쓰던 방 아니야?”

“이 방이 제일 큰 방이에요. 당연히 어른이신 삼촌이 쓰는 게 맞죠.”

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이러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야 거의 잠만 자는 건데···. 시연이는 작업할 공간도 필요하고, 그냥 네가···.”

“지연 언니가 방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어 줬어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김지연 이사도 열심히 하는구나.

어느새 아이들이랑도 가까워 진 것 같고.

여기서 더 거절하면 되레 아이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나는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방에 욕실도 따로 있으니, 불편할 일도 적을 테고.

무엇보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테라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삼촌 환영회 겸, 저랑 시은이가 요리할 테니까. 삼촌은 푹 쉬고 계세요. 알았죠?”

“···너희가?”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요. 헤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뭘 해준들, 맛이 없을 리가 있겠니.

시연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 침대에 몸을 뉘였다.

혼자 눕기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니, 감회가 새롭다.

통-통-통-.

조심스럽게 들리는 도마 소리.

언니, 여기에 소금 넣으면 되는 거야?

아니, 아니. 거기엔 간장으로 간을 해야 한대.

우움. 조금 짠 거 같은데, 설탕을 더 넣어야 하나?

그래도 되나? ···안 되겠다. 얼른 인터넷에 물어보자.

푹신한 침대 위에서 나른하게 누워있는 귓가로 시연이와 시은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한집에서 사는 가족이 날 위해 음식을 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기분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거지···.

아주 오래전,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시절 느꼈던 감각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된다.

집이라는 게 이런 기분을 주는 곳이었구나.

전에는 미처 몰랐던 걸, 이제 와 겨우나마 깨달았다.

집이라는 건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할 가족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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