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52화 (52/153)

귀환자 식당 52화.

마당에 놓인 커다란 고무대야.

그 안에는 보기만 해도 매콤해 보이면서 먹음직스러운 붉은 양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깨끗한 비닐을 덮어두고서 한 사람씩 자리를 차지하고서 빙 둘러 앉았다.

“어머, 그 집 아저씨가 바람이 났어?”

“그렇다니까. 외박을 밥 먹듯이 한다고 맨날 한탄하길래 내가 뒤를 밟아보라고 했지.”

“그래서, 현장은 잡았데?”

“그렇지! 근데, 그게 알고 보니까 자기 친구였다는 거야!”

어머머머.

세상에. 벼락 맞아 죽을 년이네.

친구 남편을 꼬신 거야?

“와···. 진짜 나쁜 놈이네요.”

“이루 총각이 보기에도 그렇지?”

“당연하죠. 하여튼 바람피우는 것들은 여자고 남자고 죄다 잡아서 처넣어야 하는데 말이죠.”

통장님들은 절인 배추에 연신 김칫속을 넣으면서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솔직히 이 동네에서 사건사고가 이렇게 많은 줄 나도 처음 알았다.

11월의 초입.

이제는 어딘가의 산에서는 눈이 내리고 서리가 얼기 시작하는 계절.

우리는 가게 앞 마당에 모여 김장을 하고 있었다.

“맞다! 얼마 전에 우리 통에 새로 이사 온 잘생긴 학생 하나가 있는데, 이번에 전국 체전인가 뭔가 하는데 나가서 메달을 땄다네요.”

“어머, 그 체격 다부진 학생 말인가 보네. 아버지 병원에 계신다는?”

“혼자 아버지 병시중도 들면서 반듯하게 자랐네요. 근데 종목이 뭐래요?”

“태권도라고 들었어요. 우리 아들내미가 같은 학교 1학년인데, 학교에서도 인기가 엄청 많다네요.”

“어쩜,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하네. 누가 데려가도 데려가겠다.”

이번엔 어째 조금 익숙한 아이의 이야기도 들린다.

아침부터 시작된 김장에 지칠 법도 한데, 어디서 나오는 에너지인지 도무지 가늠되질 않는다.

설마 모두 각성자는 아니겠지?

도진이 녀석조차 체력에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도진 총각. 허리 아프지? 잠깐 쉬었다가 해.”

“괘,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끄떡없죠!”

안색이 파리해져서 저런 말을 해봐야···.

“어유- 젊어서 그런가, 허릿심이 아주···.”

꺄르르륵-.

“어머, 2 통장님 짓궂어! 하여튼.”

통장님들, 다 좋은데 제발 성희롱으로 가는 건 좀.

오늘도 역시나 아슬아슬 수위를 줄타기하며 잡담이 이어진다.

김치통을 끊임없이 들어 나르니 힘들 법도 할 거다.

이루 녀석이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이것도 훈련이라는 둥 헛소리하면서 옆에서 잡담에만 열중이다.

“어허-! 한계를 넘어서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거야.”

가끔 도진이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섬에서 리자드맨을 상대하고 돌아온 뒤로 도진이는 뭔가 달라졌다.

훈련이 아무리 힘들어도 전처럼 못하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없어졌고.

오히려 인제 그만 쉬라고 해도 더 할 수 있다면서 강짜를 부리기까지.

-언젠가는 사부님도 뛰어넘고, 사장님도 뛰어넘을 겁니다!

야심 찬 계획이다만, 그러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수련해야 할 텐데.

뭐··· 화이팅이다.

지금도 마력을 봉인한 채로 끊임없이 김치통을 들어 나르니 힘들 텐데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자세는 좋다.

신체 강화 능력이라는 건 결국 베이스가 되는 신체의 단련이 가장 중요하기도 하니까.

점심은 간단하게 중국집 배달을 시켜 먹고서, 김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오후가 훌쩍 지나고서야 드디어.

“사장님, 배추 더 없어요?”

“네. 이게 마지막입니다.”

“아유-. 이제 속도 좀 붙으려고 하니까 끝나 버리네.”

하하.

이 아주머니들 정말 대단하시네.

“가실 때 김치도 한통씩 가져가세요.”

“어머, 그래도 돼요? 우리 일당도 받고 한 건데?”

“물론이죠. 그리고 저녁에 오실 거죠?”

“당연히 와야죠. 내가 굴 보쌈 킬러에요. 굴 맛있는 걸로 준비한 거죠?”

넉살들도 대단하시다.

“통영 굴로 아주 넉넉하게 준비해뒀습니다. 오셔서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꺄르륵-.

소녀들도 아닌데 참 밝아서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들.

“그럼 저녁에 우리 남편이랑 올게요.”

“네. 기다릴게요.”

“사장님 하여튼 인심이 너무 좋으셔, 일당도 엄청 잘 챙겨주셨으면서.”

“손맛을 배운 것만으로 충분한데요.”

“어쩜-. 말씀도. 그럼 저녁에 뵈용.”

애교 섞인 말투로 각자 김치 한 통씩을 들고 사라지고 나니, 순식간에 마당이 휑해졌다.

시끌벅적하다가 조용해지니 정적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럼 우린 슬슬 저녁 장사할 고기 준비할까?”

“···네.”

“넌 좀 쉬어. 그리고, 도진이도 이번 달 월급 입금했으니까 확인하고.”

“워, 월급이요? 저 월급도 있어요?”

이 녀석이 누굴 진짜 악덕 업주로 보나.

내가 무슨 노예를 구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월급을 주면서 부려 먹어야지.

훈련은 훈련이고.

“금액 보고 놀라지나 마라. 너?”

이루 녀석은 지가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생색을 내고 싶어 하는 거지?

그리고 저 녀석 오늘 한 것도 별로 없잖아.

도진이만 잔뜩 부려 먹고.

“도진이는 가서 좀 쉬고, 이루 넌 주방으로-.”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그럼 오늘의 메인인 보쌈은 내가···!”

무슨 헛소리야.

보쌈이 뭔지 아직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넌 저것들 다 설거지해야지. 아, 그 전에 마당 정리부터 좀 하고 들어와라?”

“···칫.”

이 녀석이 회를 좋아해서 그러나.

자꾸 날로 먹으려고 드네.

* * *

통장님들은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일찍 저녁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7시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들어왔다.

여기 굴 보쌈 2인분이요.

사장님, 굴 한 접시 추가요!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오랜만에 정상적인(?) 손님들로 북적이는 가게.

주문이 밀려드는데도 전혀 바쁘지 않았다.

이루와 도진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주는 것도 있지만.

“계산 도와드릴게요. 보쌈 3인분에 굴 추가, 소주 2병 해서 모두 43,000원입니다. 카드 결제면 앞에 꽂아주시면 되세요.”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차분한 목소리로 카운터를 봐주는 시연이 덕분이기도 하다.

거기에 주문이 들어오면 이루나 도진이가 따로 체크할 필요 없이 알아서 확인까지 하니, 확실히 두 사람도 편해졌고.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 금요일 저녁인데 친구들이랑 좀 놀고 그러지.”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 정도도 못하게 하시면 정말 서운해요.”

녀석도 참.

시은이야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험 준비 때문에 최근에는 가게에 잘 들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운한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찾아오면 혼쭐을 내려고 했으니까.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방심은 절대 금물인 법.

“사장님, 여기 몇 시까지 영업 하세요?”

“식사하실 시간은 됩니다.”

9시가 넘어가는 시간까지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손님이 늘었나 했는데, 주방에서 나와보니 알겠다.

얼마 전, 할로윈 파티 때 봤던 낯익은 얼굴이 간혹 보였다.

홍보할 생각으로 한 파티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론 가게의 운영에도 도움이 되었나 보다.

그래도 주택가에 있는 식당이라 그런지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연아. 이제 바쁜 시간은 지났으니까 얼른 집으로 들어가 봐.”

“괜찮아요. 내일 주말이라 저 학교도 안 가요.”

“그래도 벌써 늦은 시간인데··· 여자애가 밤늦게 돌아다니고 그러면 위험해.”

고리타분한 잔소리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연이에 관계된 일이면 나도 그냥 조카 바보가 되어버리곤 하니까.

“형, 여기 대한민국 수도야. 거기다 택시 타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데 위험은 무슨···.”

“네가 몰라서 그래! 시연이처럼 예쁜 애들은 밤 중에 택시 타는 것도 얼마나 위험한데!”

“···말을 말자.”

그러고 보니, 정말 택시도 위험한 세상인데.

음, 혹시 차가 있으면 좀 나으려나?

* * *

안정민 과장이 찾아왔길래, 혹시나 해서 물었다.

“차요? 아무래도 개인차가 있으면 경호하기가 수월하긴 합니다.”

혹시나 더 불편한 건 아닐까 싶어서 물어봤는데.

그편이 더 좋단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노출이 많은 장소에 가는 건 경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더 긴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그 박수현 경호원이라고 했나요? 그분도 차가 있습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겠네.

“혹시 시연 양에게 차를 사주실 생각이세요?”

“요즘 혼자 늦게 다니는 일이 많은 것 같아서요. 학생이니 적당한 걸로 하나 사주면 어떨까 싶네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게서도 차량 경호를 위해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 시연이의 경호 담당은 상당히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다.

밀착 경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용케 들키지 않았을까.

···아. 어쩌면 혹시 이미 알고 있으려나?

사려가 깊은 아이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이미 나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차라리 말을 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시연이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정민 과장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신주희 박사에게 물었다.

“전에 말씀드렸었잖아요. 한 번 찾아뵙는다고.”

“아, 저한테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셨죠?”

“사실 이건 궁금하다기보다는 가설의 확인··· 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세계 곳곳에서 각성하고 있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요.”

“그건 뭐···.”

도진이나 시연이의 경우를 봤으니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개방형 게이트가 나타난 건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아니, 따지고 보면 빠른 것도 아니네.

전에는 몬스터가 튀어나온 뒤에야 겨우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어쩌면 라미야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게이트를 연 것은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다행인 셈이다.

그로 인해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부터 각성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럼 이야기가 더 빠르겠네요. 게이트 관리국에서 본격적으로 마력을 탐색하고 있는데, 약하긴 하지만 벌써 천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각성을 시작했어요.”

“그게 많은 수는 아닐 텐데요?”

나도 정확하게야 모르지만, 우리가 최후의 게이트에 들어갈 당시 인구의 약 0.01%가 각성자 판정을 받는다고 들었다.

대한민국의 인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5배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헌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많아 봐야 겨우 절반 남짓이나 되려나? 중국이 헌터가 가장 많았던 이유는 단순히 인구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전투에 적합한 각성 능력이라고 판정되는 순간 개인의 의사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공산주의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불가능한 일이고, 한국의 각성자는 전 세계 평균을 따져도 그리 많지 않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세한 건 기록에 남아있을 테니 나보다 두 사람이 이미 알아보고 왔겠지.

“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각성자가 나타나겠죠. 그래서 아직 정확하진 않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어요.”

“특이한 점?”

“지금 각성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이 각성자였던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거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각성하는 조건에 유전적인 요인이 클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물론 전혀 관계없이 각성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흠···. 그런가요?”

그런데 예전에도 그랬었나?

만약 그랬었다면 나도 알고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자료를 찾아보고 왔을 테니, 그건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그건 연구하시는 분들이 밝혀내셔야겠죠. 딱히 제가 도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귀환자 재단에서 지원하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각성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 때문에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뭘 걱정하는 거지?

단순히 나와 연관된 아이들이라서 이러는 건가?

내가 설마 그 아이들을 이용해서 어떻게라도 할까 봐서?

“잠시만요. 신 박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해의 소지가 있잖습니까.”

안정민 과장이 평소와 다르게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언제나 신주희 박사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신 박사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이걸 한 번 봐주세요.”

안정민 과장이 계약서라고 적힌 서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아마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오래전 게이트가 처음 생겼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지에 대해선 제가 굳이 말씀드릴 필요 없겠죠.”

당연하다.

그걸 직접 겪은 사람인데.

나도 떠올리기가 꺼려지는 기억인데, 그걸 지금 꺼내는 이유는 뭐지?

“정부에서는 혹시라도 이전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대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 계획의 핵심입니다. 게이트 관리국의 부활과 함께, 대마도에 새로운 교육 기관을 세우는 겁니다.”

“혹시 각성자들을 훈련하는 기관입니까?”

“네. 그리고 오늘은 선생님께서 그 기관의 수장을 맡아주시길 정식으로 요청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안정민 과장을 만난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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