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51화 (51/153)

귀환자 식당 51화.

김지연 이사에게서 적당한 집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길래.

두말하지 않고 이사를 결정했다.

직접 가서 본다 한들, 내가 김지연 이사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시연이와 시은이에게도 이미 내가 귀환자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실까지 알렸는데,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진 않았다.

정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사 날짜까지 정하고 당일에 그곳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만 시연이는 조금 부담스러운 건지.

“집, 집이 너무 큰데요?”

확실히. 두 사람이 살기엔 조금 큰 감이 없지 않다.

아니, 어느 쪽을 고르라고 한다면 확실히 크다.

이지연 이사에게 ‘적당한 곳’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아마도 내 기준을 상당히 높게 잡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왕 옮기는 집, 작은 것보단 낫겠지.

“다른 건 몰라도 여기 보안은 이 근방에서는 제일 좋다고 하니까, 중요한 것만 생각하자. 알겠지?”

원래 살던 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차로 5분 정도의 거리?

걸어오기엔 조금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리다.

지하에는 대형마트가 있는 데다, 헬스장, 수영장에 심지어 극장까지 있는 최상위권의 주상복합 아파트.

한마디로 말하자면 살기 좋으면서 동시에 비싸다는 소리다.

당황하는 건 시연이였고, 시은이는 언니와 달리 그냥 순수하게 좋아하기 바빴다.

“와! 언니, 거실 넓은 거 봐! 축구해도 되겠다! 욕실도 3개나 있어. 이제 아침에 싸울 일은 없겠다. 그치?”

“축구 경기는 국가대표전도 안 보는 애가 무슨···.”

시연이가 작게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언니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감수성이 떨어져서 되겠어?”

“···좋아?”

“당연하지! 이제 친구들도 데려와서 같이 공부해도 되잖아!”

목적이 공부인지, 자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니 그걸로 충분하다.

“근데, 삼촌···. 저희 가구들은.”

“가구도 너무 낡아서 이참에 새로 다 바꾸라고 했어. 혹시 꼭 필요한 거라도 있어?”

“거실에 예전에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문합이 하나 있어요. 그건··· 꼭 가져오고 싶어요.”

내 조카라서가 아니라 정말 마음이 착하고 선한 아이다.

나에게는 진짜 외삼촌이 되는 시연이와 시은이의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무척이나 선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꽤 오랫동안 한곳에서 사신 덕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는지, 한미희 통장도 식당에 와서는 가끔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생판 남이 하는 이야기만 들어봐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강 추측은 할 수 있으니까.

언젠가는 시연이와 시은이가 가진 사진을 보며 나도 내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다만 지금은 저 두 사람과 친해지는 게 더 중요할 뿐이지.

“그럼 문합은 이리 가져오라고 할게. 나머지 가구들은 오후에 도착할 거야. 정리 다 될 때까지 우린 나가 있을까? 여기 있으면 일하시는 분들이 더 불편하실 거야.”

“그래도 저희가 있어야 하는 게···.”

“걱정하지 마, 재단에서 집 정리를 해줄 전문가를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시연이와 시은이를 데리고 할 일이 있다.

“자, 우린 그럼 이제··· 쇼핑이나 좀 하러 갈까?”

돈 많은 삼촌이라고 자랑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삿짐을 보면서 느낀 점인데, 짐이 너무 적었다.

한참 꾸미는 걸 즐기는 나이의 아이들답지 않게 옷이며 신발, 액세서리를 담은 상자들이 너무 적었다.

두 사람이 합쳐도 이루가 가진 옷가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랄까.

나야 딱히 패션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라 몰랐지만, 시연이는 어떨지 몰라도 시은이는 확실히 그런 상황이 즐겁지는 않았을 거다.

* * *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멍청했고, 또 무심하기까지 했구나.

그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재단을 만들고 그저 맡겨둔 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울 정도다.

아무리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내가 직접 나섰어야 한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는 사실에 감사해할까?

“언니, 이 옷! 이거 이쁘지? 언니한테 딱이다. 그쵸?”

“네! 이거야말로 손님을 위해 탄생한 옷이네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 그래요?”

못 이기는 척, 받아든 원피스.

패션에 있어서는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는 내가 봐도 저 옷은 무척이나 시연이에게 잘 어울렸다.

흰색 바탕에 연한 하늘색의 꽃무늬가 들어간.

어떻게 보면 촌스럽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옷이었는데 말이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날개가 이제야 겨우 주인을 만난 격이다.

“정말, 예쁘다.”

“저 이런 건··· 입어본 적이 없어서.”

이제부터라도 입으면 된다.

사실 지금 계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지만, 상관없다.

“저기에 잘 맞는 외투도 하나 보여주세요.”

어울리게 만들면 그만이지.

“그럼 이런 건 어떠세요? 백 퍼센트 캐시미어 원단으로 만든 롱코트에요. 손님이 워낙 피부가 맑으셔서 약간 대비되는 색상도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흰색의 드레스에 검은 롱코트라.

직원의 말처럼 대비가 강해서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그리고 원래 검은색 외투야 기본 아이템 아닌가.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안다.

“이걸로 주시고, 다른 것들도 좀 보죠.”

“삼촌, 난 이거! 어때?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요?”

언니 걸 봐주면서 자기 것도 열심히 고르고 있었나 본데.

이 가게는 이루에게 물어서 온 곳인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을 판매하는 디자이너 매장이었다.

그래서 설마 시은이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음, 예쁘긴 한데··· 시은이가 입기엔 좀 이른 거 아닐까?”

어디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곳을 지나야 할 것 같은 옷인데.

아직은 학생인 시은이가 입을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어머, 손님 정말 보는 안목이 있으시네요. 이 드레스는 사실 작년 연말 시상식 때 전희연 님이 찜해두신 거였는데. 아시죠? 그때 영화 촬영하다가 발목 부상으로 시상식 참여 못하셨잖아요.”

“배우 전희연이요?”

“네. 그래서 남겨둔 건데. 딱 어제, 저희 선생님께서 그냥 판매하라고 하신 거거든요. 오늘 아니면 못 사실걸요?”

“삼촌···.”

저 직원, 상술이 상당한데?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건데, 그것도 언제 누가 채갈지 모르는 걸 운 좋게 발견하셨다고 하면 혹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사달란다고 마구잡이로 사줄 생각은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경제 관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좋아. 대신! 언제 입고 싶은 건지 말하면···.”

“졸업식!”

“···인정.”

꺄아아-.

“손님, 저 드레스와 함께 맞춤으로 디자인된 구두가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그래야겠죠?”

이미 드레스를 가지고선 드레싱룸으로 들어간 시은에게, 구두가 전달됐다.

얼마나 잘 어울릴지··· 조금은 기대도 되고.

“삼촌, 여기 엄청 비싼데 아니에요?”

“그런 건 너희가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삼촌 부자야. 알지?”

무슨 옷 가게에 가격표도 없다.

이루의 말론 아는 사람만 오는 곳이고, 이런 곳을 찾는 사람 중에서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나.

도대체 그 녀석은 이런 델 어떻게 아는 건지.

“네···. 이왕 온 김에 삼촌 것도 한 번 봐요.”

“나? 에이-.”

온종일 식당에서 있고, 나가봐야 시장이나 가는 사람인데.

거절하려고 보니 불과 며칠 전에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럼··· 그럴까?”

“당연하죠. 시은이는 졸업식에 저런 옷 입고 가는데, 삼촌은 운동복 입고 올 거예요?”

하긴, 생각해보니 또 그렇기도 하네.

나도 시연이를 닮아가는 건가.

못이기는 척, 남성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 *

이왕 나온 김에 저녁도 먹고 들어가자고 했다.

역시나 이루에게 물어서 찾아온 레스토랑.

입고 간 옷은 따로 담아두고, 오늘 새로 산 옷 중에 하나를 골라 입었다.

세 사람이 새 옷으로 입고 레스토랑을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몰려든다.

와··· 자기야, 저 사람들 봐. 누구야?

모르겠는데? 연예인인가?

그렇겠지. 와··· 진짜 연예인들 실물 보면 장난 아니라고 하더니, 이해되네.

근데 누구야? 난 잘 모르겠는데.

신인인가?

조용하던 레스토랑이 잠시 웅성거릴 정도로.

“예약하셨습니까?”

“네. 이진으로 세 사람 예약했습니다.”

“이진 고객님···. 아, 확인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루에게 부탁해뒀는데, 별 탈 없이 예약까지 해둔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야 뻔하지.

아마 그 가야금의 주인인 한은지와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으니 데이트 코스를 알아봤던 걸 거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의 손님은 대부분이 연인 사이로 보였다.

“외투는 따로 보관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연이도, 시은이도, 그리고 나도.

조금은 어색한 공간이긴 하지만 앞으론 익숙해지는 것도 괜찮겠다.

가끔이라도 이렇게 나와서 플렉스한 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으니까.

“나머지 옷들은 내일 중으로 배달해 준다고 하네.”

“네. 옷 가게에서 직접 직원들이 배달을 해준다니··· 처음 들어봐요.”

“나도! 근데, 옷 진짜 이쁘더라. 그치?”

“시은아, 이런 데서는 조용히 해야지.”

단아한 옷차림에 조금은 아이 같은 말투.

뭔가 어색하면서도 순수해 보여서 내 눈에는 귀엽기만 한데.

“시은이, 이제 수능이 내일모레네?”

“히잉···. 삼촌, 갑자기 그런 이야기 꺼내기 있어요?”

“아···. 미안.”

눈치가 없어지는 건 아무래도 전염성이 강한 건지도.

···아니면 애초에 원흉이 나였던 건가?

“헤- 농담이에요. 오늘 완-전 신나서 그동안 쌓였던 입시 스트레스 다 날렸어요!”

“지난번 할로윈 때도 분명···.”

“···삼촌?”

이건 그만하라는 소리겠지.

시은이는 탄산수.

그리고 나와 시연이는 와인을 마셨다.

전에 마시던 것의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 내서 물었는데, 이곳에도 다행히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나도 마셔보고 싶은데.”

“시은이는 아직 안 돼. 이제 앞으로 몇 달만 참으면 되잖아.”

수학여행 가고 그러면 꼭 한 방에 술 한 병은 어떻게든 감춰서 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한 잔씩 맛을 봤었지.

나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마 시은이도 어디선가 맥주 한 두 잔은 해봤을지 모르지만, 어른으로서 기본적인 사회적 규율은 지킬 수 있도록 해줘야지.

“그러니까요. 겨우 몇 달인데···.”

“맛도 없는 건 마셔서 뭐 하려고.”

“···언니, 방금 엄청 맛있다고 했거든?”

“내가··· 그랬나?”

헤-.

시은이와는 많이 다른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자매는 자매다.

세 사람이 모두 각기 안심 스테이크와 바닷가재, 양갈비를 시켰는데 확실히 나오는 모양새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와··· 먹기가 아까울 정도네요.”

“그러게.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치- 그래도 난 삼촌이 해준 게 훨씬 더 맛있는데?”

양갈비 반을 먹고서, 시연이의 안심 스테이크와 내 바닷가재도 절반은 가져가 놓고?

말이라도 고맙긴 하다.

“정말?”

“그럼요! 나는 세상에서 삼촌이 해준 요리가 제일 좋아.”

“그럼 다음엔 이런데 오지 말고 삼촌이 직접 해줘야겠다. 그럴까?”

“···히잉.”

하하-.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이 기분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어서 억지로 술기운을 날려버리지는 않았다.

* * *

아이들을 좋은 집으로 보내서 마음이 좋아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우울해진다.

내 활력소이던 두 사람의 아침 인사가 사라져 버린 탓이 제일 크겠지.

“진짜, 중증이다. 중증이야. 누가 보면 형 딸인 줄 알겠어.”

넌 조카가 없어서 그렇지.

있으면 아마 네 녀석이 더 할걸?

“오늘 메뉴는 정하고 그러고 있는 거야?”

“···걱정 마라. 그건 벌써 정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을 내팽개치진 않는다.

이루의 닦달에 야외 테이블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메뉴판을 수정했다.

[오늘의 메뉴]

[굴 보쌈(feat.김장김치)]

오늘은 할 일이 많다.

김장을 해야 하는 날이니까.

“사장님, 배추 배달 왔습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절임 배추가 도착했다.

“···이, 이걸 다 한다고?”

“걱정 마라, 오늘은 지원군이 든든하거든.”

미리 부탁한 사람들이 몇 있다.

이 동네의 오지라퍼들이자 터줏대감인 통장님들.

“사장님-. 우리 왔어요. 배추 도착했어요?”

“네, 지금 막 도착한 참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잘 좀 부탁드릴게요.”

2천 포기나 되는 김장을 셋이서 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가 김치는 처음이라서요.”

모르는 걸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이럴 땐 어머니들의 손맛이 필요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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