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39화.
언제나처럼 9시가 넘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딱 한 테이블만 남았다.
아하하.
오빠, 진짜 너무 재미있다!
한국말 완전 잘해요!
네 사람이 앉아서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데.
저 녀석 아무래도 한국어를 배운 목적은 처음부터 저거였지 않나 싶네.
나 없이 혼자 나갈 요량으로 말이지.
뭐, 목적 자체는 불순했을지 몰라도 열심히 할 계기가 된다면 또 그리 나쁘다고 할 수도 없으려나?
평소라면 테이블을 치우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을 텐데,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모두 저렇게 즐기는데 산통을 깨기도 좀 뭐하고.
혼자서 슬슬 해도 될 것 같아서.
천천히 하나씩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새로운 손님이 왔다.
“응? 시연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은 학원이 늦게 끝나서요. 아직 불이 켜져 있길래···.”
평소의 이 시간이랑은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지.
시연이가 가게를 들어오다가 잠시 멈칫한다.
“저녁 아직이야?”
“네? 아, 네. 어쩌다 보니 아직 못 먹었는데. 삼촌, 저 배고파요.”
“얼른 들어와. 오늘 제육볶음 했어.”
시연이가 잠시 이루와 눈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가게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근데, 누구예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으니 다가와 손을 도우며 슬쩍 묻는다.
“말하자면 좀 긴데···. 에이- 귀한 손 이런데 쓰지 말고, 저기 앉아있어. 이것만 치우고 상 차려줄게.”
“괜찮아요. 그리고 삼촌 손도 귀하거든요?”
“···녀석도.”
최근에는 부쩍 더 편해진 느낌이다.
“근데, 시은이는? 시은이도 밥 아직인 거 아냐?”
“오다가 톡해봤는데, 아직 독서실이래요.”
“그래? 열심히네.”
“아무래도 점점 다가오니까요.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긴장될 수밖에 없죠.”
하긴, 다른 고3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는데.
시은이 정도면 그래도 상당히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
“저, 그리고 삼촌한테 궁금한 것도 있고.”
“궁금한 거? 나한테···?”
내가 아는 거라고 해봐야 음식 몇 가지 만드는 게 전부인데.
그림이나 학업에 대한 것을 물어볼 리는 없고.
뭘까?
별것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만, 왠지 즐거워졌다.
남은 테이블을 얼른 치우고, 나는 간편하게 상을 하나 더 차렸다.
시연이가 도와줘서 얼른 끝나기도 했고.
“매운 거 좋아하지? 일부러 살짝 매콤하게 했으니까, 많이 먹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감사는. 자자, 얼른 먹어. 배고프겠다. 이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 했어.”
“이게 한 번 그리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느낌이 왔을 때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나야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생활이 불규칙하다고 들은 적도 있는 것 같고.
나랑 이루는 손님이 몰리기 전에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서 아직 별 배고 고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시연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는 느낌도 들고.
부담스럽지 않게 테이블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가게 티비를 봤다.
예능 프로였는데, 솔직히 그리 재미있진 않다.
저런 방송은 대부분 젊은 아이들 감성에 맞춰있어서 그런가.
가게에서 티비를 보는 사람이라곤 나뿐이라 리모컨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어느새 밥을 다 먹었는지.
시연이가 슬쩍 날 부른다.
“저··· 삼촌.”
“응?”
“삼촌은 각성자 맞죠?”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
하긴,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그렇지. 나랑 동료들은 아직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삼촌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갑자기 이게 왜 궁금해졌을까 싶기도 한데.
딱히 감출 필요도 없으니까.
“글쎄. 간단하게 말하면 일종의 염력 같은 거라고 해야 하려나.”
사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처음에 능력을 알게 된 이후로도 제대로 쓰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었다.
그저 내 강한 염원이 현실화된다는 걸 막 각성했던 당시에는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했었으니까.
물론 지금이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지만.
“염력이면 범용성이 좋겠네요. 그럼 다른 각성자들은 보통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양하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별로 관심 없었잖아.”
“네? 아··· 그냥요.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우리 삼촌인데,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갑자기 이러니까 살짝 민망하기도 한데.
원래 아재들은 옛날이야기 하는 걸 좋아한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줄까.”
“와···. 엄청 멋있네요. 그럼 이루 오빠는요?”
“이루 녀석? 저 녀석은 신체 강화 계열이지.”
“신체 강화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엄청 힘 세지고 그런 거요?”
“단순하게 보면 그렇지. 아마 각성자들 능력 중에서는 가장 흔한 편일걸? 오히려 그래서 서로 간에 경쟁이 더 심했지. 그래도 이루는 당시에 내가 아는 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고.”
게이트를 들어갈 때는 보통 팀을 이뤄서 들어가는데, 무턱대고 아무나 모아서 들어가는 게 아니다.
서로 간의 호흡도 중요하고, 능력에 균형을 맞춰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기도 하니까.
전원이 신체 강화 능력자로 들어갔는데, 물리 타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 몬스터라도 만나면 자칫 전멸할 수도 있는 곳이 게이트니까.
마법계와 신체 강화.
그 외에도 탐색이라든지 지원에 특화된 각성자들도 많았고.
내가 아는 한, 이루는 그런 신체 강화 쪽에선 최강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유리나 메를린도 대단하긴 하지만, 공격에 관해서만 놓고 보면 아마 이루가 두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시연이는 그런 이루가 새삼스러웠는지 슬쩍 돌아봤다.
여전히 여대생 세 명과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긴 한다만.
“그렇게 안 보이는데···.”
평소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시연이의 눈빛이 묘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빤히 쳐다봤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고개를 돌리고선 다시 묻는다.
“그럼, 삼촌이 아는 진짜 희귀한 능력은 뭐였어요?”
흐음. 희귀한 능력이라.
유일하게 한 명만 가지고 있는 각성자들도 제법 되었지만, 내 주변에서 꼽으라면 얼마 되지 않는다.
각성했다고 해서 모두 헌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와 전투를 하기에는 그다지 쓸모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 한 명을 꼽으라면 지금 딱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
“그래. 리안 네필스라는 녀석이 있었지. 어쩌면 시연이 너도 알 수도 있을걸? 예지 능력이라고.”
그 녀석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직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유명하니까.
“그··· 예지 능력이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나타나는 거예요?”
시연이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졌다.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눈빛이, 뭐랄까.
지금은 호기심보단 걱정스러움과 불안함이 더 커진 듯한.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아···.”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
근데 정말 그쪽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리안은 간혹 꿈을 꾸면서도 봤고,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의 미래가 순간적으로 사진이나 영상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어떤 날은 가만히 있다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으니까.
솔직히 그 녀석이 한 말이 실제로 이뤄지는 게 더 적었었으면 그냥 미친놈 취급을 받았어도 별수 없었을걸?
게다가 세계 유일의 예지 능력자다 보니, 다른 각성자들과 그리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나와도 사실 친했다기보다는 둘 다 아웃사이더이다 보니 간혹 죽이 맞았던 것에 가깝고.
“삼촌, 오늘 저녁 너무 잘 먹었어요.”
“응? 그래···. 가려고?”
“네. 시은이 늦게까지 공부할 것 같아서 간식이나 좀 해두려고요.”
“그래. 알았어. 조심히 올라가.”
“네-!”
시은이가 서둘러 가게를 나가는 걸 나가서 배웅하는데, 왜 이리 찜찜하지.
기분이 묘하다.
하하하-!
가게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려나.
* * *
아침에 가게로 내려왔더니, 웬일로 이루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커피까지 한 잔 내려놓고선 날 기다리고 있다.
“일어났어? 자, 여기 형이 좋아하는 모닝 커피.”
“···무슨 일이야. 너 뭐 잘못했지.”
“에이-. 그런 거 아냐. 어제 내가 같이 마무리 못 해줘서 미안해서 그렇지.”
흠. 이제 이 녀석도 눈치가 제법 빨라졌단 말이지.
아무렴, 사장이 테이블 치우는데 직원은 술 마시고 놀면 안 되지.
···너무 꼰대같은 생각인가?
“어쨌든, 커피는 잘 마실게.”
“그럼, 난 좀 나갔다 올게.”
“응? 이 아침에 어딜 가려고.”
이제 겨우 7시가 조금 넘었는데, 이 시간부터 어딜 가는 건가 싶었는데.
“나, 운전면허 따러 오늘부터 학원 다니려고. 찾아보니까 아침부터 하는 데가 많더라고.”
“···갑자기 면허는 왜?”
차도 없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괜히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아서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남자가 운전면허는 있어야지!”
아마 어제 이야기하다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나 보지?
뻔히 보이긴 하지만 알아서 하겠지.
“그래, 너 알아서 해.”
이제 완전히 한국에 눌러살기로 결정했으니, 면허가 있어야 하는 건 맞다.
대부분이 자율주행으로 다니긴 하지만, 산길 같은 곳을 갈 때면 아직 수동으로 조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니.
애초에 자율주행이라도 면허가 있어야만 가능하기도 하고.
“2시 전에는 올게. 아, 오면서 뭐 사 올 거 있으면 톡 보내-!”
“···그래.”
대답도 안 듣고선 후다닥 나가버리는 녀석.
뭔가 삶에 활력소가 생긴 것 같아서 조금 다행스럽긴 하다.
전에도 밝기는 했지만, 어딘가 조금은 어두운 면이 있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그런 게 정말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단순히 적응이 필요했던 건지, 가슴 한편에 남아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석웅 형님이 오시기로 한 날.
복분자는 어제 미리 면포에 걸러 냉장고에 넣어뒀으니 됐고.
이제 안주를 준비할 차례인데.
제주도 선장님에게 미리 전화를 해뒀다.
아침에 문자를 보니 비행기 편으로 보내셨다고 하니, 조금 있으면 도착할 터.
분명 맛있는 건 맞지만, 요리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
아무래도 직접 공들여 만든 것을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나이가 90이시긴 하지만 아직도 산을 타시는 현역 심마니.
크게 건강을 염려하거나 치아 상태를 걱정하진 않아도 될 거다.
선택지는 많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이지.
* * *
메뉴를 정하고선 얼른 시장을 다녀왔다.
이루가 없어서 조금 손이 복잡하긴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소갈빗살을 칼로 잘게 썰었다.
믹서기에 갈아버리면 편하겠지만, 그러면 확실히 식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무엇 보다 구우면서 육즙이 죄 빠져버려서 자칫하면 푸석해져 버린다.
열심히 손을 놀려서 잘게 다진 소고기에 배와 양파를 갈아 만든 즙을 넣었다.
거기에 간장, 설탕, 다진 파와 마늘, 후추까지 넣어서 밑간을 했다.
잠시 재워두는 동안 얼른 샐러리를 꺼내 들었다.
이리저리 부러뜨려가며 껍질을 한 차례 벗겨주고 또 잘게 다졌다.
죄다 다지는 재료들이지만 이 정도로 팔이 아파질 몸은 아니니까.
동글동글하게 만들어둔 뒤, 잠시 후 다시 치대야지.
그건 이루에게 맡길 예정이다.
신체 강화를 이런 곳에 써먹기는 조금 과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안 써먹고 썩히는 것보다야 낫겠지.
오자마자 물에 담가 핏물을 뺀 양지를 적당히 썰고서 참기름을 두른 팬에 무와 함께 볶기 시작했다.
국간장을 넣고 고기를 볶으니 자연히 맛있는 냄새가 퍼지고.
“선생님. ···저 왔습니다.”
12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니, 오늘도 모습을 드러내는 안정민 과장.
“잠시만 기다리실래요? 이것만 마저 하고 나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찾아온 용건은 정부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런데 목소리에 상당히 힘이 없다.
살짝 우려스러운 마음에 고기가 익어가자마자 고기를 볶던 냄비에 얼른 육수를 붓고선 홀로 나왔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얼마나 곤란한 상황이길래 이렇게 쩔쩔매나.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연구소에 문제가 좀 발생했습니다.”
안정민 과장과 내가 아는 연구소라면 한 곳뿐이지.
그리고 거기서 생길 문제라···.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네.
“혹시, 그게 깨어난 겁니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는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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