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38화.
이루가 불쑥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서는 한복을 입고 가야금을 치는 남자가 있었는데.
어제 남산타워에서의 이루였다.
“이것 봐. 사람들 반응 엄청 좋아.”
“···이런 건 또 어떻게 찾았냐.”
그날 누가 영상을 찍었던 모양인데, 나름 온라인상에서 제법 이슈가 되는 모양이다.
특히나 얼굴과 몸매까지 언급이 되면서 이루 녀석은 입이 귀에 걸렸다.
우우웅-.
[한은지]
영상을 보던 중에 걸려 온 전화.
이루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은지야. 영상 봤어?”
은지는 또 누구지.
슬쩍 엿들어 볼까 하다가 참았다.
서로 사생활은 존중하자고 약속을 했으니까.
누구일지 궁금하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처럼 물어보면 되겠지.
주방에서 한참 파를 다듬고 있는데, 이루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며 들어와 앉았다.
“난 마늘이나 까야겠다아-!”
눈물이 난다며 마늘이랑 양파 까는 건 그렇게 싫어했는데 어쩐 일이지.
기분이 좋으니 상관없어진 건가.
“근데 한은지는 누구야?”
“응? 아아, 형은 모르겠구나. 어제 나 가야금 빌려준 사람. 알지?”
“···어제 남산타워 여자?”
“그래. 그때 걔야.”
참 빠르다.
전화번호는 또 언제 받았으며, 하루 만에 이렇게 통화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몇 살인데?”
“23살. 지금 대학생이래.”
잠깐 고민했다.
내가 아는 이루의 나이는 70대인데, 상대는 23살?
근데 외모나 대외적(?)인 신분으로 따지면 이루 역시 24살이긴 한 것도 맞고.
그럼 이건 문제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도의적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건가?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내가 뭐, 결혼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그냥 오빠 동생으로 만나는 건데.”
“···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근데 23살을 만나면 대화가 되나? 살짝 아리송하네.
···뭐, 딱히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서걱-서걱-.
다듬은 파의 뿌리 부분만 잘라서 따로 보관하고, 나머지는 큼직하게 썰었다.
“마늘 다듬으면 그냥 통으로 줘.”
“오, 안 다져도 되는 거야?”
“오늘은 통으로 쓸 거야.”
“아싸!”
이건 저녁 메뉴 준비가 아니라, 일종의 반찬 준비다.
그래서 다질 필요는 없긴 하지만.
“근데, 많이 까야 한다.”
“···얼마나?”
“전부.”
이루의 고개가 뻣뻣하게 뒤를 향했다.
“···이거 한 망을 전부?”
“어.”
뒤에서 악덕 사장이라는 괴성이 들려오는 걸 즐기며 나는 장아찌를 담을 항아리를 가지러 밖으로 향했다.
가게 뒤쪽의 작은 공터에 줄지어 늘어선 항아리들.
처음에 가게를 열자마자 메주를 쑤어 된장도 담았고, 고추장도 담았다.
그동안에는 숙성이 필요해 쓰지 못했었지.
계속 마트에서 장을 사다가 썼는데, 드디어 쓸 수 있는 날이 다가온다.
처음으로 담는 장이라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더 맛있는 음식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된다.
그리고 그런 장들 옆으로 또 하나의 항아리를 슬쩍 열어봤다.
향긋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나는 복분자주.
이제 완전히 익었다.
이건 날 위한 것도, 손님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술을 대접받아야 할 유일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저 진입니다.”
-슬슬 전화가 올 때가 되었다 싶었지. 그래, 술은 잘 익었나?
“예. 아주 맛있게 잘 익었습니다.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되었다. 잊은 건가? 나도 아우만큼은 아니라도 부자야. 차 정도는 있다고. 기사 노릇 해줄 녀석도 있으니, 걱정 말게.
하하.
물론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왠지 대접을 제대로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오시겠습니까?”
-그래. 내일 감세.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게. 챙겨 갈 테니.
“저야 형님만 오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흘흘. 맘이 변하기 전에 얼른 말하는 게 좋을 게야.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는 게 아니다.
“그럼, 혹시 상황버섯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상황버섯이라··· 아우는 참 운이 좋아. 마침 지난주에 제법 좋은 녀석을 캐서 말려둔 게 있는데···. 알았네.
“감사합니다. 형님.”
복분자가 가득 든 항아리를 가지고 들어오자, 이루도 눈을 빛냈다.
“오! 이거 그때 그 술! 드디어 먹는 거야?!”
“그래. 석웅 형님이 내일 오신다니, 미리 걸러둬야지.”
곱디고운 면포를 깔고 그 위로 술을 부었다.
짙은 보랏빛에 강렬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가게 안을 퍼져나가는데.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장님. 저 왔습니다. 킁킁- 무슨 냄샙니까? 향이 죽이는데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이건 석웅 형님께 먼저 대접해야 하는 거니까.
얼른 말을 돌렸다.
“호칭이 또 왔다 갔다 하시네요.”
“하하. 이게 저도 하나만 골라야지 하는데, 찾아뵐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매번 다른 게 튀어 나와버리네요.”
편하게 찾을 땐 사장님.
공무가 있어서 찾을 때는 선생님.
재단에 관련해서 올 때는 이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이사장님이라고 하시는 걸 보니 오늘은 재단 일 때문에 오신 모양이네요.”
“네. 맞습니다.”
최우형 실장이 열심히 일하는 덕에 벌써 지원할 만한 아이들을 꽤 찾았다.
다들 사정이 딱한 건 물론이고, 대부분이 할아버지들의 실수 아닌 실수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경우들이었다.
재단의 자금은 30조 원의 지원이 아니더라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더욱 수를 늘려갈 생각이다.
챙겨야 할 아이들이 많아져서 직원도 벌써 세 명이나 새로 채용했다.
정말 나는 그저 결정만 해주기만 할 뿐, 알아서 운영이 이렇게나 잘 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는데.
“혹시 재단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최근에 갑자기 재단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아무래도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라뇨?”
안정민 과장이 또 그 특유의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찍혔던 사진이 있잖습니까.”
사우디에서 돌아올 당시 맨 얼굴이 그대로 찍히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다 막았을 텐데?
“그게··· 언론의 노출은 저희가 막았는데, 아무래도 뒤쪽에서 모종의 거래가 되는 것 같습니다.”
“뒤쪽이면···.”
“암시장이라고 하죠. 보통.”
기가 막힌 노릇이네.
내 사진이 암시장에서 거래가 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건가?
“대체 그런 걸 누가 산답니까?”
“누구긴요. 아마 지금 석유 화학 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기업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걸요?”
“···그런가요? 거참.”
얼굴을 안다고 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아마 그 사진을 산 사람들은 이미 이사장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정체가 알려졌다면 직접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아니, 오히려 재단보다는 그게 더 먼저일 텐데?
“그거야 저희 요원들이 사전에 차단하고 있기도 하고, 괜히 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그럴 겁니다.”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네요. 제가.”
새삼 느껴진다.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이들이 알아서 내 평화로운 생활을 지켜주고 있었구나 하는 게.
“그래서 재단을 통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렇죠. 며칠 전부터 재단으로 기부 신청이 정말 끊이질 않으니까요. 갑자기 이런다는 건 한국 100대 기업이라면 이사장님 정체를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거 참 별일이네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흐음···. 이사장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이사장님 자신의 위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사장님의 영향력은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납니다.”
“고작 유전 하나 가지고 있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요.”
라미야도 별거 아니라고 했는데.
근데 평소라면 내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확실하게 하던 안정민 과장이 내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고작이라뇨! 이게 단순한 개발권도 아니고, 개인이 온전히 유전 하나를 소유한 건 한국 역사상 처음입니다. 거기다 유전이 가지는 효과는 그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원유의 가격 경쟁에서 눈치만 봐야 하는 국가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아셔야 해요. 막말로 사우디나 러시아에서 원유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라도 하면 전 세계 유가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런 일이 생겨도 당장 원유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게,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좀 진정해요.”
순간 래퍼 영혼에 빙의라도 된 줄 알았네.
“그럼 기부하라고 하세요. 기부금이야 많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처음엔 익명으로 받으려고 했는데, 그건 모두 거부했습니다.”
“익명이면 의미가 없겠군요. 그들에겐.”
“그렇죠. 이사장님께 눈도장을 찍고 싶은 건데, 익명으로 하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그럼 익명으로 안 하면 되죠.”
“···괜찮을까요?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장사꾼 기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 어떤 식으로든 귀찮아 지실 게 뻔한데요.”
“상관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상대해줘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
안정민 과장이 말이 없었다.
“설마, 진짜 그런 법 있어요?”
“아, 아뇨.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없으니까···.”
재단에 기부금을 낸 사람을 무시한다?
일반적인 재단이라면 안 되겠지. 하지만 난 상관없다.
“그럼 받죠. 뭐.”
* * *
오늘은 저녁 메뉴로 제육볶음을 준비했다.
쌈은 상추와 깻잎 두 종류.
고기도 두 가지 양념으로 만들어서 준비했다.
일반 고춧가루와 청양 고춧가루로 양념을 한 것들로.
비율만 맞추면 3가지 맛이 되는 거다.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
“사장님, 저희 중간맛 3인분이요.”
“네-!”
크게 호불호가 없는 메뉴라 그런지, 처음으로 찾은 듯한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회전율도 빨라서 벌써 8팀이나 계산을 마치고도 테이블에 빈자리가 없다.
“이루야, 반반 섞어서 3인분.”
“네- 사장님!”
요즘 이루도 즐거운 일이 많은지, 가게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았다.
“어? 사장님, 자리 없어요?”
“어쩌죠? 자리가 없네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실래요?”
“아··· 어쩌지? 잠깐만 기다려보자. 괜찮지?”
처음보는 손님이었는데, 자기가 나서서 오자고 한 건지.
일행에게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야외 테이블에서 잠시 대기하라고 하곤 안으로 들어왔는데.
“형, 혹시 밖에 여자 3명 안 왔어?”
“방금 왔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 일단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어.”
“자리가 없어? 아···. 얼른 누구 쫓아내면 안 되나?”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손님을 쫓아낸다고?
확실히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아는 사람이야?”
“응. 은지랑 친구들. 오늘 온다고 했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자리 좀 맡아둘걸···.”
“그러게. 미리 말하지.”
“이렇게 장사가 잘 될 줄 알았나. 뭐? 맨날 파리만 날리더니, 하필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맞는 소리다.
이렇게 테이블이 항상 가득 찼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분명 맞는 소리긴 한데, 나··· 지금 기분 나쁜 거 정상이겠지?
“이거 형이 좀 하고 있어 봐. 나 잠깐 인사만 하고 올게.”
딱 보니 알겠다.
이 녀석, 자기가 요리사라고 한 거다.
아마도 그걸 보여주고 싶어서 오늘 주방은 꼭 자기가 맡겠다며 생떼를 썼던 거지.
“대단하다. 하루 만에 이게 가능한 거냐?”
“원래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거라고. 히힛.”
새로운 사랑이라.
메를린은 이루에게 사랑이라는 존재였을까?
두 사람의 사이니 나야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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