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37화 (37/153)

귀환자 식당 37화.

선선한 날씨에 맑은 하늘.

거기에 일요일 오후.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네.

도착하고 나서 정말 우글거린다고밖에 표현하기 힘든 인파를 보고선 다시 떠올렸다.

이런 날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미 나온 걸 어쩌겠나.

“케이블카!”

이루의 외침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한국어를 제대로 공부한 뒤로는 통역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직 발음에서 일본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

그래서 이루의 말투를 들은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복장을 보고선 이내 피식 웃어버리곤 고개를 도로 돌렸다.

어쩌면 저 복장을 하고 나온 게 잘한 일일 수도 있겠네.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회전 속도가 빨라서인지 금방 차례가 왔다.

남산 타워가 있는 꼭대기까지 연결되는 케이블카를 타고 보니 아래로 단풍이 이미 흐드러지게 펴있었다.

해가 중천일 때 타서 그런지 온도가 제법 올랐는지, 연신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늘하늘.

정말 그런 소리가 들릴 것 같이 천천히 부채를 움직였다.

“도대체 그런 부채는 또 어디서 나서···.”

“자고로 선비는 경거망동하지 않는 법이지. 부채를 움직일 때 역시 품위를 지키면서 손목을 가볍게 흔드는 것이···.”

대강 보니 알겠다.

“이루야. 너 혹시 요즘 사극 보냐?”

“···티나? 아, 사극 너무 재미있어! 요즘은 성균관 학생들이라는 걸 보고 있는데···.”

저기 봐. 무슨 촬영 하러 왔나 봐.

신인 배우들 아냐? 둘다 완전 잘 생겼다.

진짜 배우인가? 가서 이름 물어볼까?

케이블카에 내려서서 팔각정이 있는 광장 쪽으로 걷는데, 주변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깐만 거리를 둘까? 일행인 척하기가 조금 부끄러운데.

채쟁챙챙! 뿌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한국 사람이라면 눈을 감고도 뭔지 알 수 있는 그런 소리.

신명 나는 소리에 절로 마음이 동했다.

날이 참으로 좋아 보이는 일요일 오후.

남산 팔각정 앞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한 것 같은데, 놓치면 아쉽겠지.

“이루야. 이리 와봐, 저거나 보러 가자.”

“저게 뭔데?”

“일종의 한국 전통 음악이랑 춤 같은 거야. 아마 본 적 없을···.”

“아, 사물놀이?!”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사극에서 자주 봤어. 시장 같은데 돌아다니면서 공연하고 돈 받는 거지들. 맞지?”

예전에야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전통 악기 시연이나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

나는 이루를 데리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는 사이로 끼어들었다.

기다란 끈이 달린 상모가 연신 돌아가며 꽹과리 특유의 신명 난 박자에 맞춰 장구와 징의 조화가 무척이나 한국스러운 박자였다.

모여든 사람들 역시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즐기는데.

이루는 정작 보라는 건 안보고 엉뚱한 곳을 바라본다.

다음 순서였는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야금을 들고 있던 여성이었다.

정확히는 그 여성이 가지고 있던 악기.

“저거 고토인데··· 왜 한국에서 일본 악기를 연주하지?”

“고토? 저건 가야금인데?”

“가야금? 한국 악기야?”

“당연하지.”

“···고토랑 똑같이 생겼네. 흠, 한번 쳐보고 싶다. 빌려달라고 해봐야지!”

일본에도 비슷한 모양을 한 악기가 있는 모양인데, 저걸 빌린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내가 잘 모르긴 하지만, 저런 악기들 가격이 상당하다는 건 안다.

더군다나 취미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공연을 요청받아 올 정도라면 전문가라는 소린데.

저런 사람들에게 악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빌려줄 리가.

“감사합니다. 조심히 쓰고 돌려드릴게요.”

“네···.”

한복을 입고선 발갛게 달아오른 여성은 이루에게 정말로 가야금을 건네줬다.

두 사람 다 한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기 봐. 이다음엔 가야금 연주하려나 봐.

어? 난 여자가 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아까 구경하러 돌아다니던 사람 아냐?

···맞네. 아까 그 일본인.

한복을 입은 일본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특이해서 그런지, 유난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던 것 같은데.

뭘 어쩌려고 저러나. 조금 걱정도 된다.

궹-!

커다란 징 소리와 함께 사물놀이패가 인사를 하고선 물러나자 이루는 돗자리를 펴더니 정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진짜 강심장이다.

근데, 정말로 가야금을 다룰 줄은 아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악기의 이름도 몰랐던 사람인데 다룬 적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

걱정 반, 우려 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이루는 가만히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기 시작했다.

띠잉- 띵-.

누가 봐도 가야금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음색에 몇몇 사람이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루는 그렇게 몇 번이고 줄을 더 튕겨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양손을 가야금의 위에 얹고선,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하면서도 힘차게 현을 튕겼다.

그리고 그 순간,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반주가 이루의 손끝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 역시 놀라운 눈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구슬프면서도 애절한 듯한 가야금 특유의 음색.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누군가 그런 박자에 맞춰 작게 부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변 사람들도 홀린 듯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영혼이라고까지 불리는 노래.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함께 불렀는데, 이걸 이루가 반주했다는 게 보면서도 믿어지질 않는다.

짧은 음악이었지만 사람들은 우레같은 손뼉을 쳐줬는데, 이 녀석은 끝까지 선비 컨셉을 유지하고 싶었던 건지.

거만하게 부채를 펼치고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끝냈다.

너무 짧아서 공연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무대였고, 프로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조금은 어색한 반주였지만.

나는 자리를 벗어나면서 물어봤다.

“아리랑은 또 어떻게 안거야?”

내 질문에 이루가 피식 웃더니 말한다.

“형, 한국어학원 가면 제일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리랑이야.”

“···아.”

어쩐지 대번에 이해되네.

남자 둘이 걷기엔 경치가 너무 과하게 좋다고 할까.

사방을 둘러봐도 서울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곳에 서 있으니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다.

이루 녀석 관광시켜주자고 데리고 온 거였는데.

가만 보니 내가 더 치유를 받고 있다.

“근데 이건 뭐야? 자물쇠?”

이루가 문득 한쪽 울타리를 가득 메운 것들을 보며 묻는다.

“아니, 이걸 왜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아놨지?”

“연인들끼리 헤어지지 말자고 여기에 이름을 써서 거는 거야. 일종의 데이트 코스지.”

“뭐, 이런다고 안 헤어지나?”

피식.

그 말이 맞다.

아마 여기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간 사람 중 절반은 이미 헤어졌을걸?

“왜? 너도 해보고 싶어?”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이루가 질색했다.

소름이라도 돋은 건지.

“싫어! 연인들끼리 하는 거라며. 웩!”

사실은 나도 그런 짓은 하기 싫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

남산 팔각정이 있는 곳이 그리 크진 않았다.

다만 남산 타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 감상은 제법 했다.

동전을 넣는 망원경이 있는 한적한 발코니.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길래, 넌지시 물어봤다.

“메를린이랑은? 아예 헤어지기로 한 거야?”

“···뭐,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봐야지.”

나나 라미야와는 달리, 두 사람은 진짜 연인이었다.

그래서 게이트를 나온 뒤에서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게이트에서 만났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 그 안에서의 기억이 떠오를 테니.

···좋았던 기억만은 결코 아니니까.

가만히 이루의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한다.

공연도 보고, 산책도 봤으니.

이제는 밥을 먹어야 할 차례가 됐다.

조금 처진 듯한 이루의 어깨를 두드리며, 난 미리 예약해둔 곳으로 향했다.

안내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했다.

레스토랑 전체가 회전하는 구조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서울 시내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연인들이 가장 많아 보이고, 가족들과 온 이들도 적잖았다.

다만, 젊은 남자 둘이 온 테이블은 우리뿐이다.

···뭐, 어떤가.

“메인 메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코스 요리라 벌써 식전 빵이나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맛봤는데.

솔직히 내가 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라면 양이 너무 적달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린 정말 배를 채우러 온 건데.

이루도 나도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조그만 스테이크를 보니 얼마 전 비행기를 타고 오며 함께 먹었던 와인이 떠올랐다.

그게 여기도 있으려나?

이름이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물어보면 알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직원을 불렀다.

“아, 혹시 와인도 있습니까?”

“네. 어떤 종류를 찾으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름이 오브리옹인가 그랬는데, 있나요?”

주문을 받던 직원이 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있긴 한데, 가격이 굉장히 고가인 와인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걸로 한 병 주세요.”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인사를 하고 가고, 이루가 물어온다.

“갑자기 웬 와인이야?”

“그냥, 전에 먹어봤는데 와인도 은근히 괜찮더라.”

“소주만 먹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런 것도 마실 줄 알고.”

그렇게 말하곤 창밖을 바라봤다.

그 짧은 사이에 하늘은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나갈 때쯤이면 야경이 보일지도 모르겠네.

“이런 델 형이랑 온 것도 나쁘지 않다. ···예행연습 했다 셈 치지 뭐.”

“···하여튼.”

좋으면 그냥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

샤토 오브리옹.

직원은 친절한 설명과 함께 두 사람의 잔에 와인을 따라줬다.

뭔가 맛이 미묘하게 달라서, 물었더니.

빈티지가 달라서 그렇다는데···.

매해 만들 때마다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일정한 맛 유지도 못 하다니, 기본이 안됐군.”

내 짧은 평을 들은 직원이 잠시 당황한 것 같다.

“그래도··· 먹을 만은 하군.”

포도주를 마시니, 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네.

그것도 슬슬 먹을 때가 되었지.

* * *

“어? 언니, 이거 봐.”

시은이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스마트폰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쪼르륵 달려와서는 그림 그리고 있던 시연에게 대뜸 내밀었다.

“뭔데 그래?”

“여기, 여기. 이 한복 입은 남자.”

화면 안에서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어딘가 상당히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이거, 이루 오빠야?”

“언니가 봐도 그렇지?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맞네! 와- 근데 어떻게 가야금을 칠 줄 알지?”

“그러게. 대단하다. 근데 한복을 입고 저기까진 왜 갔을까?”

“휴일이라고 삼촌이랑 놀러 간 거 아냐? 이거 오늘 올라온 영상인데, 벌써 반응 장난 아냐. 일본인이 가야금 치면서 아리랑 부른다고 댓글 창 난리 났네.”

-진짜 일본인이라고? 못 믿겠는데?

-말투 들으면 딱 알지, 백퍼 일본 사람임.

-일본사람이 가야금 치면서 아리랑을 부른다는 게 말이 되냐곸ㅋㅋㅋㅋ

-비율이 인간이 아닌데? 마네킹 앉혀놓은 거 아냐? 주작이라고 본다.

-저기 사람들 안 보이나? 저걸 어떻게 주작으로 만드냐. 생각 좀 하자.

-와, 간만에 국뽕 차오르네.

-미쳤다 ㅋ 일본인이 아리랑 부르는 거 실화냐?

-아니, 한국 사람도 아닌데 한복이랑 갓이 저렇게 잘 어울려도 되는 거야?

시은이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마치 자기가 칭찬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연신 히죽거리며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악플 다는 사람도 많다. 오빠 착한데···.”

뭔가 속이 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다시 오더니 시연이가 그리고 있던 걸 바라봤다.

"근데, 언니... 뭘 그리고 있는거야?"

"응?"

동생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고나서야, 시연은 자신의 그림을 다시 바라봤다.

"...이거 뭐지?"

자신이 뭘 그린 건지.

잠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생명체와 그 앞을 막아선 사람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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