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36화.
저녁 장사를 마치고, 이루와 함께 마주 앉았다.
녀석답지 않게 종일 말이 없는 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화났냐?”
술 한잔을 잔에 따라주며 넌지시 물었다.
돌아올 대답이야 뻔하지만, 이렇게라도 시작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마주 앉아 술만 들이키겠다.
“···하나만 물어볼게. 왜 일본과 사우디의 대처가 이렇게 다른 거야? 일본이 영원한 증오의 대상이라서?”
이루의 말이 날카롭게 찔러온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이건 얼버무리며 넘어갈 수 없겠다.
“···미리 알지 못했던 내 잘못이기도 하고, 강압이 있었다곤 하지만. 결국 코어를 꺼낸 건 라미야의 결정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그 전에 일본에서 코어를 꺼냈어도, 그래서 게이트가 열렸어도 날, 일본을 도와주러 왔을 거야?”
역시 이게 마음에 걸렸던 거구나.
나는 이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당연하지.”
“쳇. 뭐가 이렇게 쉬워.”
“네가 부탁했다면 난 똑같이 널 도우러 갔을 거야.”
“형, 일본 미워하잖아.”
“맞아. 난 일본이 싫어. 우리나라에 그런 짓을 했는데, 싫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너를 싫어하진 않아.”
“···흠. 분명 나도 싫어했던 것 같은데.”
그 전에도 그저 사이가 어색했을 뿐인데.
하지만 이루도 그 이상 따지고 들진 않았다.
“···비겁해. 이러면 나만 속 좁은 놈이 된 것 같잖아.”
“나도 처음엔 사우디 왕실을 뒤집어 버릴까 싶기도 했어. 결과야 어쨌든 라미야를 협박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럼 왜 참은 건데? 내가 지금이라도 가서 확 뒤집을까?!”
어쩌면 오늘 이루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일 거다.
나도 그걸 알기에 답해주기 위해 먼저 말을 꺼낸 거고.
이미 벌어진 일에 만약에 그랬다면 이란 가정은 지금 이루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겠지.
하지만 이번에 게이트를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건 일어나야만 했던 거라고.
어쩌면 코어가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너한테는 말을 해줘야겠네.”
라미야에게 네스티에 대한 건 발설하지 않기로 철석같이 약속해놓고.
겨우 하루 만에 깨버리게 된다니.
면목이 없긴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루라면 알 자격이 있지 않나.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나는 라미야와 네스티 그리고 게이트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루는 마치 화해라도 하듯이 내 잔을 채웠다.
“···마왕인데, 그때의 마왕은 아니라···. 그럼 라미야가 그 꼬마 마왕, 네스티라고 했나? 그걸 감시하는 거고?”
“감시보단 오히려 육아에 가깝다고 해야 하려나?”
이루는 네스트를 ‘그거’라고 불렀지만 지금 그걸 가지고 딴죽을 걸 수는 없다.
“···육아?”
“어떻게 보면 오히려 순수한 생명체에 가까워. 어쩌면 올바르게 키워서···.”
“형. 미친 거 아냐? 마왕이라고. 그 마왕이란 말이야. ···아아, 그래. 알았어. 둘 다 못하겠으면 차라리 내가 할게. 지금 당장 가서 내가 그놈 모가지를···.”
“이루야. 잠깐, 네스티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딴 마왕 따위의 도움이 왜 필요한데! 막말로 형 혼자서도 마왕 정도는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잖아. 마력을 조절하면서도 이겼으면서.”
“···알고 있었어?”
최후의 게이트에서 마왕과 벌였던 접전.
그때는 다른 이들의 안전을 위해 힘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니. 그건 몰랐는데.
“우리가 바본 줄 알아? 당연히 다 알고 있었지!”
주먹을 움켜쥐는 게 상당히 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없다면? 너나 다른 동료들도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까.
내가 걱정하는 건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는 올지도 모를 그 순간이다.
“이루야. 넌 우리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마력이 사라지고 힘을 잃은 각성자들은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됐어. 우리에게 30년은 없었던 세월이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갑자기 시간에 맞춰서 노화가 진행된다면? 난 이미 80이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란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왜 오지도 않은 일을 벌써 걱정해? 이것 봐, 아침에 비해서도 공기 중의 마력 농도가 벌써 이만큼이나 짙어졌어. 우린 늙지 않았고, 앞으로도 100년은 거뜬할걸?!”
“물론 나도 그렇게 믿어. 하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야 해.”
“···하. 그 대비가 마왕이라고?”
이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건 말이 안 되긴 하지.
게이트를 여는 원흉일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보호를 부탁한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긴 하다.
잠시 생각하던 이루가 답답하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고, 이루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아까 형이 했던 말.”
“······.”
“상황이 바뀌었다면 일본도 도우러 갔을 거라는 거. 진심이야?”
“그래.”
이제와 만약이라는 가정은 필요 없겠지만, 그랬다면 정말로 나는 이루를 도우러 갔을 테니까.
“네가 도움을 청했다면. 분명히.”
“그거면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이루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혼자 남아 술잔을 몇 차례 더 들이켰다.
됐을 리가 없겠지.
그걸로 그렇게 간단하게 납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루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의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 *
유전에 관한 특집 방송은 며칠째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해서 쏟아졌다.
관심이 집중되는 건 늘 그 ‘의문의 남성’이었지만, 끝내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다.
“저희가 다 막았습니다! 하하하-.”
오후 늦게, 가게가 열기 직전에 찾아온 안정민 과장이 큰소리를 쳤다.
솔직히 이번에는 칠만 하기도 했고.
“청와대에서는 뭐랍니까?”
“아, 그렇지. 오늘은 그 일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온 겁니다.”
저런 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서류.
하지만 난 이번엔 서류를 받고선 그냥 대강 앞장만 훑어 봤다.
봐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그냥 설명해 주세요. 이런 거 본다고 제가 아나요.”
“그럼···. 크흠, 우선 가장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면 유전 개발은 석유공사와 건설사 3곳이 공동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시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한국 정부가 전량을 매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선생님께는 유가의 20퍼센트를 지급하겠다는 게 정부의 제안입니다.”
“제안이요?”
“그렇죠. 말 그대로 유전은 선생님의 소유니까요.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에서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합니다.”
국가를 상대로 갑의 위치라니.
기분이 묘하다.
“일단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양도한 유전은 예상 총채굴량 약 130억 배럴에 하루 최대 30만 배럴의 원유를 채굴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하루 30만 배럴이면··· 얼마나 되는 거죠?”
그냥 국제 표준을 정하면 안 되나.
어디선 리터(L)를 쓰고, 어디선 배럴이고.
“변화가 있긴 하지만 배럴당 40에서 50달러 선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40달러로 치면 1,200만 달러라는 소린데···.
한국 돈으로 치면 대략 130억이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에 적어도 25억은 생기는 셈인가?
솔직히 실감이 잘 나질 않는다.
“원유라는 게 떨어질 때는 또 왕창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오히려 수입하자는 게 정부의 계획입니다. 어쨌든 한정된 자원이니까요. 최대한 아껴 쓰자는 이야기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기 서명하면 되는 겁니까?”
“네. 계약은 3년마다 갱신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서류상에 다른 의도로 작성된 문장 같은 건 없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믿는다.
* * *
사우디에서 돌아온 뒤로 뉴스를 자주 챙겨보게 됐다.
그 뒤로 딱히 게이트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진 않고 있지만, 그거야 모를 일이지.
이미 알만한 국가에서는 라미야가 코어를 꺼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자기들 역시 어떻게든 시도하고 싶어 안달일 테고.
실제로 그걸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라미야처럼 마력을 빼앗기면 대책이 없을 테니 고심 중이겠지.
어떻게 하면 코어를 꺼내서 연구할 수 있을까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다른 어떤지 궁금해졌다.
“이루야. 메를린은 좀 어떻데?”
“멜? 잘 지내지.”
“···별일은 없는 거고?”
“뭐, 코어?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서로 잘 안 했어. ···그리고 요즘은 통화도 좀 뜸하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
개방적인 유럽 여자치고 4달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으면 많이 참은 셈이라고 봐도 되려나?
사우디를 다녀온 뒤로 이루와의 관계가 조금 서먹해졌다.
딱히 티를 내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에 작은 응어리가 남은 듯한 느낌이랄까.
“이루야.”
“응?”
함께 위층 거실에서 한가하게 뉴스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 일본에서 찾은 돈은 어떻게 할 거야? 한국 돈으로 환전하려면 내가 안정민 과장한테 말해줄까?”
“뭔 소리야. 벌써 다 환전했는데? 정민이가 벌써 다 해결해 줬어.”
“···정민이?”
“응. 어차피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데 뭐. 그냥 반말하기로 했어.”
그렇구나···. 그래도 되긴 하겠다.
근데, 뭐지? 살짝 오묘한 기분이···.
“아, 그래서 근처에 집 하나 알아보려고.”
“갑자기 무슨 집?”
“이제 돈도 있겠다. 형한테 얹혀살 필요 없으니까.”
얹혀 산다고···.
말에 뼈가 있는 듯한 느낌인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
“아냐. 근처에 좋은 빌라들 많더라. 요즘 짬 내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금방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함께 생활한 지 두 달이 되어가서 그런지.
이젠 없으면 좀 허전할 것 같기도 한데.
“너, 서울 구경해 본 적 없지?”
“···갑자기 무슨 구경?”
“그냥. 관광?”
슬쩍 머리를 긁적이더니.
“그러네. 딱히 뭐 구경하러 다니고 한 적이 없긴 한데···.”
“그럼 오늘 둘이 서울 관광이나 할까?”
“···남자 둘이?”
흠. 아무래도 그건 이상하려나?
이루가 못 볼 거라도 본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뭐 어때. 가자.”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이런 때 아닐까.
남자 둘이면 또 어때.
“···그래. 뭐, 간만의 휴일인데 집에만 있기도 아깝고.”
밖은 또 한참 가을이라 나들이하기도 적당한 날씨고.
자, 그럼 어디부터 구경시켜줄까.
역시 서울에 처음 왔다면 거기부터겠지?
남산타워부터 시작해볼까.
* * *
한 시간이다.
아침 먹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다가 나오기로 한 터라 벌써 오후 2시가 다 넘어가는데.
“···이루야. 아직 멀었냐?”
“기다려봐. 한국 첫 나들이인데, 아무렇게나 입고 갈 수는 없지.”
대체 옷은 언제 이렇게 산 거지?
환전하자마자 옷부터 사들인 건가.
이루 방을 들어와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휘황찬란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한쪽 벽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다양한 옷들이며, 그 옷들을 관리하는 각종 기기들.
거기에 액세서리가 들어있는 장식장까지.
“···이사 빨리 가야겠다.”
홧김에 이사를 하겠다 선언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이 정도라면 이사를 가서 드레스룸을 따로 가져야 하는 게 맞다.
“음··· 그래. 이 정도면 오늘의 컨셉과 어울리겠어.”
우리가 지금 패션쇼를 나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오늘의 컨셉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걸음 정도는 떨어져서 걷고 싶은 마음인데.
“불편하지 않겠어? 남산타워는 산꼭대기에 있는 건데.”
“괜찮아. 어차피 케이블카 타고 올라갈 거잖아?”
그새 또 그건 언제 알아봤는지.
차라리 정장이라면 낫겠다.
연미복 수준을 입어도 좀 과한 패션을 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남산타워에 올라가면서 한복이라니.
그것도 개량 한복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사극에서나 보던 전통 한복을 입었다.
“···갓은 또 어디서 난 거야.”
저놈의 갓이라도 좀 뺐으면···.
낫겠다 싶어서 한 말인데.
“이거 이쁘지? 이거 한복 명인이 수제로 만든 갓이라고. 봐, 여기 은색 자수로 내 이름까지 새겼지. 자고로 남성한복의 완성은 갓이지.”
나는 가벼운 캐쥬얼 복장인데, 옆에는 조선시대 선비가 있다.
괜히 서울 관광을 시켜준다고 했나, 살짝 후회도 되긴 하는데.
이루가 오랜만에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래. 가자!”
하루 정도 기분을 맞춰주는 것쯤이야.
차에 올라타고선 곧장 남산타워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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