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32화.
축제의 메인 이벤트인 장기자랑의 시작은 오후 8시라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그 사이에 뭘 할까 했더니, 시은이가 얼른 답을 했다.
“삼촌, 우리 언니한테 가봐요. 잘하고 있나 보러.”
분명 예령이와 함께 듀엣 무대를 신청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그래. 근데 너희는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돼?”
“원래 시험 당일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
성격이 태평스러운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긴장 안 돼?”
“왜요?”
“왜냐니··· 무대에 서는 건데 보통 떨리지 않나?”
작긴 하지만 무대다.
나는 저런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수업 시간에 발표만 하려고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는데.
시은이는 너무 덤덤해 보여서 그런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에이-. 긴장은요 무슨. 자고로 노래는 사람들 앞에서 해야 제맛이죠.”
“하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코야키도 다 먹었고, 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와- 저기, 쟤 봐라. 대박 아니냐?”
“아, 쟤? 홍대 다니는 미대생이라던데?”
“얼굴이랑 몸매 봐라. 아주 죽이겠는데? 흐흐-.”
웬 남자 몇몇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째 기분이 별로다.
대놓고 험담을 하는 건 아니지만 겉모습만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게.
“저기요!”
“···우리?”
시은이도 그 대화를 들은 건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아저씨들 지금 그거 성희롱이거든요?!”
“우리가 뭘? 우리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웃기지 마! 지금 여기서 좀팽이들 마냥 쑥덕쑥덕 거렸잖아!”
“뭐 이런 게 다 있어. 우리가 진짜 뭐라고 했다 한들, 증거 있어?”
“증거는 무슨! 내가 다 들었거든?!”
다행히 아직 거리가 좀 있는 데다, 사람들이 많아서 시연이는 여기 상황을 모르는 모양인데.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게 더 소란을 피우면 괜히 두 사람만 피해를 보게 생겼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법보단 주먹이 가까운 게 현실이니까.
“그만들 하지. 자자- 시은이도 그만 진정하고.”
“···이건 또 뭐야? 원조 교제하냐?”
킥킥-.
저들끼리 그 말을 하고선 비웃음을 짓는데, 살짝 거슬리기 시작한다.
“···이쯤하고 그만 가지. 학생들인 거 같은데,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뭘 그만하고 가, 씨발. 시비는 저년이 우리한테 걸었지.”
“넌 또 뭔데, 뭔데 가라 마라야! 그냥 못 가겠다면 어쩔 건데? 엉?! 칠래? 쳐! 쳐보라고!”
왜 이런 것들은 치워도 치워도 나타나는 걸까.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험악해지자 시은이도 살짝 당황한 눈치다.
보통 정상적인 이들이라면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으니까.
“사, 삼촌. 우리 그냥 가요.”
“하, 저년 말하는 거 봐라? 이제 와서 가긴 어딜 가. 사람을 좆나게 병신 취급해놓고 간다고 하면 단 줄 아나. 너넨 오늘 잘못 걸렸어.”
그렇게 말하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데.
솔직히 이 상황도 어이가 없지만, 저것들이 하는 행태가 무척이나 거슬린다.
잘못은 저들이 해놓고 되레 적반하장이라니.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들이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당장의 알량한 힘만 믿고 상대를 핍박하는 것들.
턱-.
시은이에가 다가가기 전에 내가 앞으로 나서서 어깨를 붙잡았다.
“하, 씨발. 이 새끼는 생긴 거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
어떻게 할까.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좀 그렇지?
퍼버벅-.
옆구리에 살짝 충격을 줬더니, 이내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이건 뭐, 고블린 수준도 안 되는 녀석들이었네.
“뭐, 뭐야 이 새끼! 씨발!”
할 줄 아는 욕이라곤 그것뿐인가.
직접 나서서 손을 봐줄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정말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이만 꺼져라.”
시은이의 시야를 살짝 막아섰다.
저번처럼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릴까 싶어서 살기를 더 약하게 조절했는데도 다행히 내 마음은 전해진 모양이다.
“가, 가자.”
쓰러진 녀석도 챙겨가라니까 그냥 저들끼리만 몸을 피한다.
정말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기인 것들.
“삼촌··· 괜찮아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응? 당연히 괜찮지.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잘못한 건 저놈들인데 네가 왜 미안해.”
“근데, 삼촌은 진짜 못하는 게 뭐에요? 잘생겨, 착해, 부자인데. 이제 거기다 싸움까지 잘하는 거예요?”
너무 이러면 좀 창피한데.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얼른 시연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 됐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아이고, 학생이 고생했지. 나야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걸 뭐. 와- 정말 잘 그렸네. 고마워요. 집에 가서 액자에 걸어놔야겠어.”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림을 건네주며 웃는 시연이는 정말 빛이 나는 것처럼 예뻤다.
우리 두 사람을 이제야 발견한 건지.
“왔어? 삼촌도 오셨어요? 이런 데는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내가 끌고 왔지. 헤헤- 근데 알바는 어때? 손님 많아?”
“아니. 조금 전 손님이 딱 두 번째였어.”
[30분 초상화]
[최선을 다해 그려드립니다.]
[3만원(2인은 5만원)]
조금 허술하게 적힌 가격표를 한번 슬쩍 내려다보고선 입술을 오므렸다.
“음··· 너무 비싼가?”
“아냐! 절대 안 비싸. 얼마 안 가서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가 되실 분인데, 3만 원이면 거저지! 언니 실력을 알아본 두 사람은 완전 복권 당첨된 거라고.”
시은이의 너스레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3만 원이라는 금액이 비싼 느낌은 아니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그럼···. 내가 세 번째 손님이 돼볼까?”
“네? 아, 아니에요. 삼촌은 제가 나중에··· 따로 그려드릴게요.”
억지를 부릴까도 했는데, 시연이가 정말 정색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났다.
나중에 제대로 그려준다니 살짝 기대도 되고.
-아아,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마포 한마당의 하이라이트인 우리동네 장기자랑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무대 뒤쪽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이제 슬슬 준비할 차례가 다가오는 것 같다.
시은이는 예령이에게 전화를 하더니 간단하게 약속을 정한 건지.
“삼촌, 저 이제 가볼게요! 언니랑 꼭 보러 와야 해요?!”
“당연하지. 열심히 해!”
그걸 보라고 데려왔을 텐데, 안 보면 큰일 나게?
그나저나 두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을지 궁금한데.
“푸흡-.”
시은이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시연이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왜 그래?”
“···시은이요. 도대체 어떻게 예선을 통과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노래 잘한다고 하던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던데··· 아마 들어보시면 알 거예요.”
시연이는 말하면서도 계속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이길래···.
그때까지는 그저 동생이라 점수를 짜게 주는 건가 싶었다.
상큼한 무대가 펼쳐졌다.
보고만 있어도 과즙미가 터져 나올 것 같은 귀염귀염한 여고생 둘이 준비한 무대는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걸그룹의 춤과 노래라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어느새 다가온 이루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둘 다 정말 대단하네.”
“넌 푸드트럭 벌써 접은 거야?”
빌리는 값만 해도 상당했을 텐데, 본전이라도 찾았나 모르겠네.
“괜찮아. 반쯤은 그냥 재미로 한 거였으니까.”
나머지 반은 뭐였을까.
아마 일본 문화를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아니, 저 노래를 어떻게 저렇게까지 망칠 수가 있지···.”
시은이와 예령이는 정말···. 멋졌다.
화려한 무대 매너에 자신감 넘치는 안무와 표정.
다만···.
“아악! 음치에 박치에 이 정도면 완전 테러 아니냐?”
“도대체 어떻게 예선을 통과한 거야?”
“몰라. 축제 진행 위원회에 무슨 빽이라도 있나 보지. 아··· 정말 너무하네.”
평소라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번만은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음악과는 평생 좋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내가 들어도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와아. 그래도 오늘은 목 컨디션이 정말 좋은가 봐요. 평소보다 훨씬 잘하는데요?”
“···그, 그래?”
시연이의 말에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무대를 다시 올려다봤다.
간혹 시은이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얼른 환한 미소를 장착해야 했지만.
“···우승 상품은 어렵겠네.”
춤은 모르겠지만, 노래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아마 제로에 한없이 가까울 것 같다.
이럴 거면 그냥 춤만 추지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
더 놀라운 건 예령이도 시은이에 못지않은 음치에 박치라는 거.
둘의 그 엄청난 불협화음은 거의 음파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의···.
아니. 아니지, 그래도 삼촌인 나는 적어도 응원을 해줘야 할까?
하지만 역시나.
우승은 연세대학교의 밴드부가 가져갔고, 시은이와 예령이는 참가상도 타지 못했다.
대신, 코믹상을 거머쥐었는데.
“우씨! 상품이 겨우 이게 뭐야!”
“우리가 우승할 줄 알았는데 코믹상이 뭐야. 우리 웃긴 것도 없었는데”
축제에서 두 사람만 이해할 수 없는 코믹상의 수상.
상품은 어디서나 흔하게 사용되는 문화상품권이었다.
“풉- 그래도 그게 어디야. 너희들 문제집 사는 데 쓰면 되겠네.”
“우승하면 언니한테 스포츠카 주려고 했단 말이야!”
“맞아! 언니 복학 기념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상품을 못 타서 못내 아쉬운 듯했지만, 시연이는 지금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다.
“됐어. 내가 스포츠카는 무슨. 너희들 마음만 받을게. 알았지?”
“···알았어.”
“히잉-. 그래도 아쉽다. 근데 설마, 엄마까지 경쟁자로 나올 줄이야!”
예령의 엄마인 한미희 통장도 듀엣을 결성해서 꽤 오래전 유행했던 트로트를 불렀는데, 상당히 잘 불렀다.
덕분에 인기상으로 주방 도구 세트를 타가셨지.
···그럼 예령이는 아빠를 닮은 건가.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축제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푸드트럭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든 봉투에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축제라는 걸 처음 경험해봤는데 나쁘지 않다.
전에도 비슷한 게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참석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평온하고 즐거운 날들.
그것을 이렇게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 * *
제법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여느 아침과 같은 평온한 날 아침이 시작되고.
“삼촌! 좋은 아침!”
“그래. 시연이랑 시은이도. 학교 잘 다녀와.”
이제는 빠지면 섭섭한 아침 인사.
아침에 마시는 이 모닝커피에도 어느새 완전히 적응을 해버렸다.
그렇게 잠시 아침 햇살을 즐기다가 마당을 쓸고 있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람.
끼이익-.
“사장님!”
안정민 과장은 그렇게 자주 찾아오면서도 단 한 번도 차를 마당에 주차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색이 된 얼굴도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선생님!”
“···신주희 박사님까지 이 시간에···.”
신주희 박사도 최근 가게를 자주 찾기는 했지만, 추석날 아침을 제외하면 저녁때가 대부분이었다.
이제 겨우 오전 8시가 조금 넘어가는 이른 시간인데, 이렇게 다급하게 어쩐 일이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습니까?”
“새벽에 중동 쪽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기다리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달려온 겁니다.”
“새벽에요?”
한국 시각으로 새벽이었다면 중동에서는 밤이었다는 소린데.
아니, 그보다 중동에서 터진 사건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사우디아라비아 현지 시각으로 오후 8시 30분경에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네?”
뭐가 열렸다고?
“게이트요! 게이트가 다시 열렸단 말입니다.”
내가 잠이 덜 깬 건가? 아니면 안정민 과장이 잠이 덜 깬 건가.
“무슨 소립니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게이트라니···.”
뜬금없어도 너무 없는 말 아닌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위층에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진이 형!”
황당해하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하늘색 바탕에 캐릭터가 들어간 잠옷을 입은 이루가 2층에서 뛰어내렸다.
말 그대로 2층에서 마당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저, 전화 좀 받아봐.”
“전화? 누군데.”
갑자기 게이트도 황당한데, 이루 녀석까지 이러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라미야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
“···라미야?”
난 안정민 과장을 돌아봤다.
뭔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남부 사막 지역에서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고, 미국 측에서 몇몇 국가에 급하게 알려온 사실입니다.”
“···몇몇 국가라는 게 혹시.”
“각성자가 있는 국가들입니다.”
진짜라는 소린가.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고···.
그런데 왜 하필 사우디아라비아지?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뜬금없이 게이트가 열렸다는 말은 그곳에서 무언가 벌어졌다는 소리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라미야가 있다.
귀환한 7명 중 한 명이자 지금 전화를 걸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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