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27화.
한국 이름 김이루.
당당하게 한국 여권을 내밀고 호텔에 투숙했다.
알아서 찾아오라는 의미였는데, 다행히 알아먹은 모양이다.
“···다시 돌아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일본으로 말인가?”
“네. 실망하셨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일본은 당신이 태어난 나라이자 조국이 아닙니까.”
이루를 찾아온 사람은 내각정보관.
내각정보조사실의 수장이자, 일본 총리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사내.
다키히로 겐.
“왜? 내가 있으면 이진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이지?”
“···그, 그런 생각은.”
피식.
역시나 안 되는 놈들은 안 되는 건가.
도대체 이렇게까지 한국을 미워하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하기도 힘들다.
민족성에 새겨지기라도 한 건가?
“역시, 너희들은 안 돼. 나한테 이러기 전에 그 잘난 정보력을 좀 가동해보는 건 어때?”
이럴 때 보면 정말 신기하긴 하다.
자신들이 가진 알량한 능력은 상식을 벗어난 정도로 과신하면서 상대가 가진 능력은 티끌조차도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아집에 사로잡힌 인간들.
‘예전에 나도 저랬었을까?’
한 발 멀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새삼 부끄럽다.
* * *
임시 내각정보관실.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지만 최소한 문이라도 달아야 했기에 수리 기간 동안 임시로 사용하는 장소.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에 한 장의 문서가 들려있었다.
미국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약속하고 받아온 정보.
“···이게 정말이라고?”
“CIA에서 직접 보증한 내용입니다. 게다가 당시 그 장소에는 국방부 장관과 USS국장. 심지어 국토안보부 장관까지 있었다고 하니 의심의 여지는 사실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키히로는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충격이 너무 커서인가, 아니면 노안 때문인가.
조금 전까지 뚜렷하던 글씨가 흐릿하다.
‘일본 전체의 물리적인 침몰? 그런 걸 정말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지금이야 비록 능력을 잃어버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지만, 게이트 관리국장 역시 현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함께 가진 술자리에서는 늘 그의 무용담을 듣는 고문을 당하곤 해서 잘 안다.
당시 헌터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었는지 정도는.
하지만 맹세코 이런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추억 보정으로 인해 오히려 더 부풀려졌을 능력을 생각하면 더 말이 되질 않는다.
섬이라는 건 그냥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게 아니다.
사실상 침몰이라는 단어보다는 되려 해수면 상승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거지.
그렇다면 이진이라는 이의 능력이 단시간에 해수면을 늘리는 걸까?
아니면 정말 지구의 지형을 바꿀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는 건데.
뭐가 됐든 둘 다 말도 되질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정말 이게 진짜 사실이라면?’
잠깐 상상해본 것만으로 몸이 흠칫 떨린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허위 정보를 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인이 된 김이루가 저렇게 나오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기도 한다.
꿀꺽하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란 건 확실해졌다.
“···총리 각하 연결해.”
“네? 지금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시각이···.”
새벽 3시.
사실 이런 시간에 내각정보관이 이곳에 있는 것도 미국에서 서류를 지금 보내줬기 때문이지, 이런 시간까지 일할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총리에게 전화를 하라니.
“당장 연결해!”
“네··· 네!”
* * *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호텔로 내각정보관인 다키히로가 다시 찾아왔다.
“지위가 높은 양반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한가한가 봐.”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일본의 명운? 고작 그딴 게 문제가 아니다.
만약 정말로 이진이라는 한국인이 가진 능력이 그 정도라면 일본 국민은 물론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마당에 앞뒤 잴 여유가 없다.
“애꿎은 나한테 이러지 말고, 가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건 어때?”
“히로님. 아님, 김이루님이라면 중재를 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루가 멍청한 얼굴로 다키히로를 쳐다봤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는 건가 싶은 마음으로.
“네 눈에는 지금 내가 하는 게 뭐 같아 보이냐?”
“···네?”
“내가 여기 관광이라도 하러 온 것 같아? 아니면 뭐, 내가 가서 이진이랑 맞짱이라도 떠야 중재를 해주는 건가?”
“그, 그런 게 아니라···.”
“만약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배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지금 너희 입장이라는 걸, 굳이 내가 다시 이야기해 줘야 이해를 할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
그들이 그런 요구를 할 리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씁쓸하다.
아마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요구를 해오겠지.
“얼마 전 미국에서 어렵게 구한 극비 문서가 하나 있습니다. 하밀 로넌과 국방부 장관이 나눈 대화 내용이 적혀 있는 문서죠.”
“그래? 하밀이라··· 그 녀석은 잘 지내나 보던데. 역시 미국이야. 안 그래? 누구는 돌아오자마자 영웅 대접을 하면서 저택에 비행기까지 내주는데, 누구는 되려 가진 걸 빼앗으려 드는데 말이야.”
“···그 점은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각조사실이 관여할 여지가 없었던 부분이라.”
“됐어. 그냥 한 소리니까.”
툭 던진 말인데, 왠지 말을 하고 나니 더 기분이 더러워져서.
이루는 그냥 다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안 들어도 알 것 같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 없어.”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인간이 그런 능력을···.”
이루가 창문틀에 반쯤 걸치고 있던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차가운 얼음이 들어있는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다키히로 겐에게 다가가 눈을 맞췄다.
“맞아, 그 안에 적힌 거 다 구라야.”
!!!
다키히로의 눈만 봐도 알 것 같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지만 이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 한··· 열 배쯤 되려나?”
“···네?”
“일본말로 해주는데도 못 알아먹어? 이진의 능력은 우리도 가늠하기 어렵다고. 그러니까 지금 네 머릿속에서 무슨 계획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포기해.”
다키히로는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안의 내용만 봐도 거의 신의 능력에 버금가는데, 그것조차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다음에는 정말 나도 도와줄 수 없어.”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애초에 도와줄 마음도 안 생길 거 같고.
하지만 마지막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먹으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 * *
늦은 저녁.
식당으로 국정원장이 찾아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연구소에서 한 번 뵀었죠. 장민국이라고 합니다.”
“국정원장님이시죠. 기억합니다.”
그 말에 장민국이 나이에 맞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저 표정은 뭐지 싶었는데.
“사실 전 예전에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게이트 관리국의 가장 말단이었죠.”
“당시라면···.”
“30년 전, 게이트로 출발하실 때 저도 있었습니다.”
“아···.”
기억이 나진 않는다.
저 사람은 30년 전이고, 나에겐 고작 5개월 전 일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미안한 건 아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 하시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때 저는 가장 끝에서 자리만 겨우 차지하고 있던 말단이었으니 당연합니다.”
“미안하다곤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꼭 기억하죠.”
“기억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날 만나 영광이라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아,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물론 무료로 드린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도 상당히 늦은데다 오늘 저녁 메뉴는 꽤 인기가 많아서 남은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음식 몇 가지와 함께 간단한 백반을 내놨다.
“오늘 저녁 메뉴가 동이 나버려서 마땅히 차려진 게 없네요.”
“이것만으로 훌륭한 데요? 평소 집사람이 해주는 거에 비하면 진수성찬입니다. 하하하!”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잘 먹고 살 거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첩보와 안보를 책임지는 집단의 수장인 사람인데.
식당을 운영한 지 고작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숟갈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알겠다.
이 남자, 상당히 허기진 상태다.
“이 시간까지 아직 식사도 못 하신 겁니까?”
국정원이야 바쁠 거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라는 게 다 비슷하듯이 아래에선 바쁠지언정, 직책이 높아지면 편해진다.
그게 그간 노력한 보상이든, 그저 나태해지는 것이든 말이지.
“하하···.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네요.”
밥을 먹다 말고 슬쩍 날 살피는 장민국 원장.
저리 바쁜 사람이 괜스레 공짜 밥 한 번 얻어먹자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먼저 말을 걸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밥 먹는데 옆에서 누가 자꾸 말 거는 것만큼 귀찮은 게 또 없지.
나는 잠시 그를 두고 가게를 정리했다.
처음에 가게를 오픈하고 한동안은 혼자서 모든 걸 다 처리했었는데.
이루가 함께 있었던 게 그새 익숙해진 건가?
얼마간 하지 않았던 가게 정리까지 하려니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웃긴 건 이루가 일본으로 넘어가진 이제 겨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는 거다.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처리할 생각으로 갔겠지만, 과연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
이루도 지금 여기서야 성격이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리 차분한 스타일은 아니니까.
아니,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일까?
나야 그 녀석을 처음으로 겪은 건 게이트에서 들어간 후니까.
게이트에 들어가서 차분하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선생님, 정말 잘 먹었습니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
아무런 일도 없는데 쓸데없이 찾아왔다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 * *
장민국 원장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내 머릿속을 채운 건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이루 녀석, 도대체 일본에 가서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서 정부에선 우선 선생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일본에서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말입니까?”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뭘 자기가 쑥스러워하는 거지?
“그럼 한국 정부에선 뭘 요구할 생각입니까?”
“솔직히···. 일본이 저런 제안을 해 온 것 자체가 너무 이례적인데다 파격적이기까지 해서, 정부에서도 조금 당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번 참에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를 확실하게 못 박으실 생각으로···.”
겨우?
솔직한 말로 어이가 없다.
“장민국 원장님.”
“네?”
“고작 그걸로 만족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하지만 이것만 해결이 되어도 한일관계는 눈에 띄게 좋아질 겁니다.”
“한일관계가 좋아지는 게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됩니까?”
무역? 경제? 물론 좋아질 거다.
하지만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인 거지.
“애초에 우리 땅인 독도 문제? 저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당연히 받았어야 하는 사과. 고작 그게 한국 정부에서 원하는 겁니까?”
능력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자기 물건을 빼앗으려는 이에게 빼앗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게 생각해낼 수 있는 전부라면 실망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나와야지.
“두 가지의 조건을 더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바로 제가 오늘 선생님을 찾아뵌 이유기도 합니다.”
“들어보죠.”
도대체 무슨 요구를 할 생각일까.
살짝 기대도 되고,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우선, 각성자 문제입니다. 오래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헌터들 기억하시죠?”
일본에서 사지로 몰아넣은 한국 헌터 100여 명.
지금의 한일 관계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악을 달리는 것은 호의를 가지고 도우러 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부터다.
더군다나 나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안에는 나와 제법 안면이 있던 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 뒤로 일본은 그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진상 규명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첫째로, 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막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막대한 피해 보상이라.
과연 어느 정도의 금액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번에는 내 기대에 미치길 바라본다.
“이미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진상이 밝혀진다면 일본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에 따른 피해 보상금 지급은 일본에게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겠죠.”
“정확하게 얼마나 요구할 계획입니까?”
“당시 일본의 무리한 게이트 공략으로 사망한 한국인 헌터는 93명입니다. 우리는 그에 따라 한 사람당 백억. 그러니까 총 9,300억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9,300억···.
크다면 크다 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겨우 그 정도를 피해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이건 간이 작아도 너무 작다.
상대가 저렇게 저 자세로 나오는데, 겨우 생각하는 게 9천억 원?
애초에 기대한 내가 잘못인가.
이럴 바엔 그냥 직접 가서 내가 담판을 짓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가볍게 오키나와 정도 가라앉히면 좀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고개를 저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선생님, 잠시만요. 뭐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오해?
얼토당토않은 말에 장민국 원장을 돌아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금액 단위가 원이 아닙니다. 9,300억 달러입니다.”
“······.”
음. 그 정도면···.
나는 반쯤 일으키려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묻었다.
“···앞으로 그런 건 먼저 말씀하세요.”
“사실 이런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조금 얄밉긴 하지만, 어린 동생(?) 소원 한 번 들어줬다 셈 치지 뭐.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두 가지를 더 요구할 거라고 했으니 하나가 남은 셈이다.
그리고 저런 시답잖은 상황극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가 더욱 큰 조건이겠지.
이번엔 살짝 기대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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