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26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싫은 이루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굳이 일등석까지는 안 해줬어도 되는데···.’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고작해야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떠오른다.
‘정말 이렇게 가까운 나라가···.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사이가 나빠졌을까.
그 이유야 뻔하다.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된 악연은 이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따지는 게 무의미해졌다.
솔직한 말로 지금 이진의 분노가 얼마나 클지, 자신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를 당시에도 그리 끔찍하게 여겼던 조카들인데.
이제는 새로운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진이 어려서 처음 각성했을 당시 유일하게나마 그를 보살펴줬던 인물.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인물이 알고 보니 어머니의 동생.
즉, 그 아이들의 할아버지였다니.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아이들을 건드리려고 했었다?
‘멍청한 작자들,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비행기 창문 아래로 구름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로는 맑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역시나 오랜 세월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곳.
그저 단순한 명칭일 뿐인데.
국제적인 정당성을 따지는 거야 사실상 큰 이득이 없었던 곳.
하지만 그 이름 하나 때문에도 수십 년을 다퉜다.
지금이야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높아져서 동해로 표기하는 나라가 많아졌지만, 양국에서는 여전히 서로의 이름에 정당성이 있다며 싸우고 있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그러는 게 어찌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혹시 일본인이세요?”
옆자리에 갑자기 들려온 일본어.
한동안 듣지 못했던 자국어에 이루의 고개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어머, 맞나보네요. 반가워요.”
여자는 주변을 슬쩍 살펴보더니.
“···사실 일본행 비행기에서 일본 사람 만나기가 어렵거든요. 근데 이렇게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 정도는 아닐 텐데요?”
양국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긴 했지만, 관광객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고. 적지만 무역도 오간다.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서로 간에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아뇨.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조금씩 일본을 찾기 시작하는데도, 일본 사람이 한국을 찾는 정말 극소수거든요. 정말 이런 것 하나만 봐도 우리 일본의 단합력은 정말···.”
“저기요. 한국 욕하고 싶은 거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네요.”
일본인들의 우월의식.
예전이었다면 아마 자신도 저 말에 동조해 한국인들은 자존심도 없다며 한바탕 뒷담화 잔치를 펼쳤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게 얼마나 멍청하고, 편협한 생각인지 이제는 아니까.
그리고···.
“저, 한국 사람이거든요.”
이루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구름 아래 바다를 내려다봤다.
얼마 전에는 맨몸으로 건너왔던 곳.
이제는 자신도 자연스레 동해안이라 부르는 푸르고 푸른 바다를.
* * *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그곳에 이제는 외부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 찾아왔다.
잔뜩 열이 뻗친 상태로.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연락 두절이라니!”
대뜸 튀어나오는 하대에 내각정보관의 미간이 잠시 꿈틀했지만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
게다가 저 늙은이가 가진 인맥은 자신이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요새와 같다.
“흥! 그야 어디서 굴러먹던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을 보내서 그런 것 아냐?!”
“···그들은 하운드 부대에서 차출한 최고의 요원들이었습니다.”
“최고라면 성공했어야지! 고작 여자애 둘 처리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젠장, 그깟 일도 못 하면서 최고는 무슨···.”
“그러는 국장님께서는 고작 여자애 둘을 왜 그리 신경 쓰시는 겁니까?”
관리국장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각정보조사실의 수장. 어쩌면 이미 알고 물어봤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정보를 수집한 것과 직접 입으로 듣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
그걸 제 입으로 직접 이야기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게이트 관리국 기밀이다.”
“저희 쪽에서도 우수한 요원을 넷이나 잃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명확히 알려주시지 않으면 더는 협조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
“이유도, 목적도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요원들을 사지로 넣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내각조사실에서 이렇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그거겠지.
갈수록 늘어나는 국민들의 요청.
게이트도 없는데 일 년에 수천억의 예산이 들어가야 하는 게이트 관리국의 폐지 요청이 그 이유다.
결국 게이트 관리국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거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두 사람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사이.
삐익- 삑-.
갑작스러운 경고음이 들려왔다.
정황으로 봤을 때, 이건 건물 전체에 울리는 긴급 경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곳은 일본 최고의 정보기관인 내각정보조사실이다.
그런 곳에서 이런 경보가 울린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
인터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가 답변을 해왔다.
-치, 침입자 경보입니다!”
“···뭐? 침입자?”
미치지 않고서야 여길 침입해?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침입자가 있다고 한들, 이런 경보가 울린다는 사실 그 자체다.
“당장 경보 끄고 다시 상황 파악해서 보고해!”
-그, 그게··· 이미 2단계 방어선이 돌파당했다는 보고가···.
방어선이 돌파당했다는 이야기에 조사실장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군대라도 쳐들어왔단 말이야?!”
탱크라도 몰고 오지 않고서야, 말이 되질 않는다.
그가 현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하려는 순간.
콰앙-.
내각정보조사실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각정보관실.
그 문이 날아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문이 부서졌다는 것보다는 경보가 울린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리고 부서지며 날아간 문이 만들어내는 분진 사이로.
“내가 경고했지.”
인형人形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그저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다리가 풀릴 정도의 압박감과 함께.
온몸의 피가 흐름을 멈추고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
‘뭐야 이건···. 이, 이게 살기라는 건가?’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몰라야 하는데, 몸이 자연스레 감지하는 기운.
이건 살기였다. 그것도 몸을 옥죄일 정도로 농후한 살기.
“···난 너희에게 충분히 기회를 줬다.”
총을 꺼내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몸이 떨리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이질적인 감각.
“누, 누···. 누구냐.”
힘을 짜내서 겨우 꺼내든 말.
하지만 상대는 대꾸할 마음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너희가, 일본이 살 수 있는 하나 남은 길이될 테니까 이번에는 잘 선택해라. ···한때 일본인이었고, 일본을 사랑했던 이로써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이, 배, 배신자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내각정보관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 이제는 호랑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이 늙은이는 상대가 누군지 아는 눈치다.
“다, 당신···.”
절로 이가 갈린다.
이 모든 상황이 이 늙은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내가 여길 떠났던 건 너희들 따위가 무서워서가 아니었어. 그저 쓰레기 같은 명령이라도 그걸 따라야 하는 죄 없는 생명을 거두기 싫었을 뿐이지.”
공기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한층 더해지자 결국 두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내가 분명 경고했지? 한국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야.”
“무, 무슨 말인지···. 우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고작 조선 여자 두 명을 처리하는 거라고 믿진 않았고, 나름 조사를 했다.
그 뒤에 ‘이진’이라는 한국인 귀환자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하지만 맹세코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내각정보조사실을 단신으로···. 그것도 고작 몇 분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일본인이라면 한 명뿐이다. 저자가 바로 히로 무야시!’
하지만 설마하니, 자국의 정보기관을 이런 식으로 유린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 그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걸까?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옆에 있는 이 늙은 괴물의 요구를 들었던 게 화근이었던 거다.
“저, 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개소리는 통하지 않아. 어차피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이미 상관도 없고.”
“대, 대체 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요. 그대도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아니오? 왜 이런 짓을···.”
분진이 가라앉고, 이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에는 일본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은 이미 티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에 가득 담긴 건 그저 경멸의 감정뿐.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나? 고작 나조차도 막아내지 못하면서··· 내각정보조사실 전체가 나선들. 아니, 일본 자위대 전체가 덤빈다 한들 그를 이길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설마. 한국의 이진을 말하는···?”
“내가 먼저 온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거야. 만약 이진이 직접 왔다면 내각정보조사실이 아니라, 일본 전체가 침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분명 저건 과장이다.
상대가 각성자이고, 세계 정점에 서 있던 이 중 한 명이라고 한들 일개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해야 마땅한데.
저 차가운 눈을 한 사내의 얼굴을 보면 단순한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어찌 그런 능력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최후의 경고음이 날아들었다.
“한국 정부에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 공문을 전달하고,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수락해. 그리고 신이든 악마든, 조상신에게든··· 누구에게든 기도해라. 그걸로 그의 화가 조금이나마 가라앉기를 말이야.”
“모든 조건을 수락하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상대가 무엇을 요구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수락하라고?
백지 수표를 건네주라는 말과 다름없다.
아니, 현재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보다 더 과한 요구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이건 협박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야. 말 그대로 일본이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이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려주고 있는거라고.”
이루는 잠시 말을 멈추고선,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실 어쩌면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직접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한때나마 내가 사랑했던 조국이,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말하지만, 명심해. 이 이상 쓸데없는 짓을 했다간 내가 아니라 그가 직접 올 거다. 정말 일본이 가라앉을 꼴을 굳이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고.”
이루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건 했다.
이제는 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나마 살길은 보일 터.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나는···.’
평생을 일본을 위해 살아온 히로 무야시로서 일본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김이루로서 관망해야 하는 것인가.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삼촌, 이루 오빠는 요즘 안 보이네요? 어디 갔어요?”
“아아···. 잠깐 집에 다녀온다고 갔어.”
그 말에 시은이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본?”
“응? 어어···. 알고 있었어?”
“뭘요? 일본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었죠. 근데, 귀화한 거 맞죠? 그럼 이제 한국 사람이죠. 뭐.”
일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알면서도 그간 아무런 편견없이 대했다는 생각이 드니, 대견한 마음도 든다.
“흐음. 시은아.”
“네?”
낮이면 간혹 놀러 오던 시은이에게 슬쩍 운을 띄워본다.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으로.
“곧, 추석인데···. 혹시 할아버지 산소에 가니?”
“네. 당연히 가야죠. 차례 지내야 하니까.”
봉안당이 아니라 산소라는 건 얼마 전 시연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텐데도 굳이 무리했다면서.
“그··· 혹시, 차례상을 내가 좀 도와줄까?”
“···삼촌이요? 우리 할아버지 차례상을?”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전혀 관련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차례상을 차려준다니.
“신경쓰지마. 그냥 해본 말이니까···.”
“아뇨. 저야 좋죠! 언니도 음식을 하긴 하지만···. 솔직히 맛이 별로거든요. 할아버지한테 음식 솜씨는 못 물려 받았나 봐요.”
가게 안에 둘 뿐인데, 굳이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말하는 시은이.
시연이가 들었으면 서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시연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언니 요즘 정신없어요. 학원이 학원이 아니더라고요. 집에서도 그림 그리느라 얼마나 바쁜지···. 아무튼 이제 곧 새 학기 시작인데 자기 혼자 뒤처져졌다면서 얼마나 열심인지 몰라요. 아마 삼촌이 해준다고 하면 겉으로야 아니라고 해도 속으론 은근히 좋아할걸요?”
몰랐으면 모를까.
내 외삼촌이라는 걸 알게 된 마당인데,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게 어려서 방황하던 날 유일하게 챙겨줬던 사람이라면 더.
그리고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었냐고.
만약 그때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정말 그랬다면···.
나도 조금이나마 기댈 곳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원망도 있고.
어차피 직접 가서 인사를 드릴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음식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이제라도.
이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래. 그럼 추석날 아침에 언니랑 가게로 올래? 아, 그리고 모레는 가게 안 열 수도 있어.”
“모레면··· 일요일도 아닌데, 갑자기 왜요?”
“아. 잠시 어딜 좀 다녀올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먼저 간 녀석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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