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24화.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런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웃고 있는 시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꾸밈없이 맑게 웃는 모습.
아마 복학을 계기로 예전 친구들과 함께 만난 모양이다.
동기들과 비교하면 일 년이 뒤처지긴 했지만, 이제는 근심걱정은 덜어놓고 학교생활을 마음껏 즐겼으면 한다.
나야 겉으로 보기엔 20대 중반도 되지 않지만 실제 나이는 이미 80세가 넘었다.
대격변이 일어나는 순간 각성을 한 1세대 헌터.
그저 겉모습만 젊은 건지, 아니면 정말 그 외모에 맞게 오래 살 수 있는 건지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버겁다 느낀 적은 없지만, 언제까지 살지는 미지수.
실제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죽는다 해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이니 그전까지만이라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과 행복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그런, 아주 평범한 삶.
단지 그것만 원한 것뿐인데.
그마저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
일본.
이루 녀석 덕분에 조금이나마 미운 감정이 사라질 찰나였는데.
역시인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했던가.
그런 사람들이 수십 세대를 걸쳐 내려오며 단단하게 굳혀진 문화나 국민 의식은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 * *
보통 국정원 요원이 보고할 때는 팀장에게, 팀장은 다시 국장에게, 차장에게.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원장에게 보고가 되는 체계.
하지만 현재 국정원에는 그런 절차를 무시해도 되는 단 한 가지 예외 사항이 있다.
[이진과 관련된 일]
국정원 소속의 요원이라면 본인의 판단하에 중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국정원장에게 곧장 보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처음엔 몰랐었다.
정보 분석실에서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 소속의 인원이 입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저 확인차 나왔던 것뿐이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분란을 만들지는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지금 양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작은 불씨가 핵폭탄이 되어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잠시지만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눈에 띄게 검은 정장을 입고서 홍대 앞을 거니는 것만 제외하고선.
관광이라도 온 것은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조심스럽게 그들을 지켜보던 요원의 눈에 한 여대생이 비친 것은 정말 우연에 가까웠다.
‘···어? 저거 설마?!’
확신을 가진 뒤로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요원은 곧장 휴대전화를 들었고, 평생 전화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워, 원장님. 저는 방첩정보센터 국내 대응 2팀의···!”
-누군지는 알고 있으니까, 용건부터 말하지. 지금 무슨 상황인가?
역시 국정원장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이미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듯 침착했다. 자신과는 달리.
“일본 정보부 소속의 요원들이 현재 홍대 입구 부근에서 목표의 행적을 좇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목표? 설마, 이진 선생님의 뒤를 쫓고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이진 선생님이 아니라, 그분의 큰 조카인 이시연 양으로 확인이···!”
우당탕-.
전화기 너머로 일련의 집기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아오···. 지금 당장 대, 대테러부대 출동시켜! 아니지, 그건 내가 할 테니까,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시연 양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야!
“네? 네! 알겠습니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갑자기 국가의 사활을 짊어지는 일이 됐다.
“아! 그러고 보니···.”
분명 그 자매에게 경호원이 있었는데?
서둘러 휴대전화를 뒤져서 찾아냈다.
“맞아, 박수현이었지···.”
동기 한 명이 경호원으로 배정됐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그걸 이제야 기억해내다니.
잠시 자신을 책망하며 전화를 걸었다.
-네.
“나야. 방첩센터 진민성.”
동기이긴 하지만 군대에서 차출된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조금 있는, 약간은 어색한 사이.
-무슨 일이야?
“지금 네 담당 업무 때문에. 지금 혹시 상황 파악하고 있나 싶어서.”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나중에 통화해!
띠띠-.
다급하게 끊어진 전화.
진민성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국가의 사활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말단 요원에 가까운 자신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도.
‘이건··· 기회다!’
하지만 상대는 네 사람이다.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그곳의 요원들이 한국 국정원 요원들과 그리 큰 실력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원장님의 당부가 있었지 않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요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
자신은 그것에 충실히 따르면 된다.
품속에 권총 한 자루.
하지만 홍대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일 수도 없는 일.
결국 충돌이 생기면 육탄전으로 갈 확률이 높았다.
과연 4:1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이지만 진민성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할 수 있고 없고가 아니잖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자신이 왜 국정원에 지원했는데.
타국의 스파이들이 국내에서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다.
그것도 상대가 일본이라면 더욱 참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자리를 박차려는 순간.
‘···뭐지?’
네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그들의 시간만 정지한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리고 잠시 후.
털썩-.
네 사람이 동시에 쓰러졌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에게 다가가서더니.
꺄아아악!
주, 죽었어!
누가 119 좀 불러요!
갑작스러운 혼란에 진민성도 덩달아 혼란에 빠져들었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지더니 죽었다고?
그가 빠르게 현장에 다가갔고, 행인들 사이에서 평범한 복장을 한 익숙한 얼굴이 띄었다.
이시연의 경호 담당인 박수현.
두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박수현은 그대로 사라졌고, 어느새 선글라스를 착용한 진민성이 행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통제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조금 전의 상황을 되돌려보고 있었다.
* * *
미국 애리조나주 외곽에 마련된 거대한 저택.
거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활주로까지 있다.
게다가 작지만 개인 비행기까지 준비된 저택.
집 주변은 24시간 경호원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는 곳은 요새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하밀 로넌이 살고 있는 저택.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는지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늘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안으로 검은색 세단이 줄지어 들어섰다.
“어? 저거! 국방부 장관 자동차 아냐?!”
누군가의 외침에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든다.
“USS(United States Secret Service-미국 비밀경호국) 국장도 있다!”
“잠깐··· 저거 설마···.”
“미, 미친! 국토안보부 장관이다!”
“특종이다!”
기자들답게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자동차 번호판 정도는 달달 외우고 있다.
저택의 주인이 워낙에 중요 인물인지라 그간에도 유력 인사들의 출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한 번에 찾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다.
기자들의 손가락이 다급하게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둘러 노트북을 켜는 순간.
그간 별다른 제재 없이 지켜만 보던 이들이 다가왔다.
“지금 촬영하신 모든 사진의 원본 데이터를 회수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린 정식 취재진이오! 아무리 USS라고 해도 이건 명백한 언론 탄압이란 말이야!”
철컥-.
요원들은 두말하지 않겠다는 듯.
총을 겨눴다.
“지금 우리가 부탁하는 걸로 보입니까?”
기자들은 두 눈을 뜨고 코를 베이고 있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후 관련 내용이 기사화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정부의 협박이다.
21세기에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싶은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이렇게까지···!”
이곳에는 미국 언론사뿐 아니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온 언론사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그만큼 중차대한 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
그야말로 국제사회의 비난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태생부터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기자들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답은 결국 듣지 못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그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하밀 로넌은 지금 자기 삶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가끔 방송에 출연하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나름 유명해지는 걸 즐기기도 했고.
“하밀 씨, 지금 한국에 일본 측 비밀 요원들이 입국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전에 그러셨죠. 만약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면 미국은 그 어느 쪽 편도 들어선 안 된다고 말이죠. 무슨 의미였습니까? 혹시, 당신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겁니까?”
USS국장의 말에 하밀은 싱긋 웃어 보였다.
무테안경을 쓴 그는 말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실크로 된 로브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국토안보부 장관이나 USS국장, 국방부 장관을 맞이하는 복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격식이 없는 차림.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한국과 일본은 현재 아시아 경제의 중심입니다. 양국의 사이가 극과 극으로 치닫긴 했지만, 전쟁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칫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일에 차질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세계 경제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겁니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다시 자리를 잡는 데 무려 30년이 걸렸다.
그 상황에서 세계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두 나라가 전면전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파장은 대격변에 못지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의 입장에서는 두 나라 모두 우방국이자 동맹국.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지 쉬이 결정할 수 없다.
아니면 그저 중립을 지키거나.
“만약 한 곳을 골라야 하는 최후의 선택이 필요해지면 무조건 한국의 편을 들라고도 했죠. 그 이유를 오늘은 들어야 겠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여기까지 온 이유.
오직 그의 답변 하나를 듣기 위함이다.
“이유야 뻔하지. 일본은 죽어도 한국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하밀 씨, 일본 역시 강대국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전력은 대등한데 어째서 그렇게 장담할 수가···. 혹시 이진이라는 헌터의 존재 때문입니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거짓을 말할 이유도.
돌려서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벌어지진 않을걸? 이진이 있는 한, 일본은 동해안을 건너기도 전에 가라앉을 테니까.”
“가라앉는다니··· 배가 말입니까?”
피식.
하밀은 그들의 똥줄이 타들어 가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여유롭게 차 한 모금을 삼켰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배가 아니라, 일본 전체가 가라앉을 거란 말이야.”
“···일본 전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리 각성자의 능력이 대단하다곤 하지만 일본은 큽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나라를 어찌 개인이···!”
“당신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지.”
하밀의 기세가 바뀌자 자리에 있는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방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전쟁터의 한복판에 있는 것같이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기가 얼어붙는 듯 소름이 돋아나고, 하밀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들, 최후의 게이트에서 마왕을 잡은 게 우리 7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닙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고 USS의 국장까지 된 이조차도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
“그래. 아니지··· 마왕을 때려잡은 건 이진 혼자였어. 우린 그저···.”
파스스-.
고급스러운 찻잔이 하밀의 손에서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가루가 되어버렸다.
“나머지는 그 둘이 벌이는 전투의 여파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게 전부였지.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그조차도 못했던 것뿐이고.”
하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조금 숨을 쉬기 쉬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라 하나를 지울 수 있는 능력이라니···. 도대체 이진이라는 인물의 능력이 뭡니까?”
하밀의 능력은 마법이다.
아이스 계열의 정점에 서 있던 마법사.
다른 6인의 능력에 대해서도 대부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예전 기록에도 이진의 능력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는 자료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하밀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해줄까 말까를 고민한 게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권능이라고 해야 할까?”
“권능···?”
너무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나?
하밀은 다시 정정해서 말했다.
“그래. 신의 권능이라고 하면 가장 적절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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