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9화 (19/153)

귀환자 식당 19화.

며칠 후, 안정민 과장은 신주희 박사와 함께 장민국 국정원장을 만났다.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던 모양이군.”

“설마, 그렇게 완강할 줄은 몰랐죠. 꽉 막힌 사람이에요. 완전히!”

“···그, 그래도 백숙은 맛있었잖아요? 하, 하하···.”

별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온 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시더군요. 좀 도와주시면 어디 덧나나?”

신주희 박사가 입술을 샐쭉였다.

“···아무 이유 없이 무턱대고 거절하실 분이 아니에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안정민 과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그게 뭔지 알려줄 수도 없고요?”

“···그렇죠.”

“후우. 알겠어요. 일단 조금씩 접근해보는 게 좋겠네요. 그래도 언젠간 꼭!”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 마치 아이 같다.

어려서부터 연구실에서만 지낸 탓이려나?

그런 모습에서는 오히려 이진과 살짝 닮았다고, 안정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택배요-!

이른 아침부터 들리는 우렁찬 외침에 가게 앞으로 가보니 스티로폼 상자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누구지?

최근에는 딱히 주문한 게 없는데.

이루 녀석이 뭔가를 시켰나 싶어서 발신인을 확인하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함석웅]

형님이 갑자기 뭘 보내주신 걸까.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면포에 곱게 쌓인 보랏빛 과실이 가득 담겨 있었다.

8월.

그래, 이맘때면 복분자가 나오는 시기였지.

[복분자주가 익어갈 때쯤 찾아가겠다.]

하하하-.

석웅 형님이 동봉한 작은 쪽지를 보고선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려버렸다.

“하아아암-. 아니, 형은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즐거워?”

“너는 일찍 좀 일어나라.”

“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뭐하러···. 응? 근데 그건 뭐야? 과일?”

“일본에는 없어? 있을 텐데.”

내가 알기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산딸기가 있다.

산딸기의 종류가 너무 광범위해서 그 안에 복분자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아, 산딸기인가? 근데 이걸 가지고 뭘 하려고?”

아무래도 일본에서는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괜한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뭘 하긴, 한국에서 남자가 복분자로 할 건 하나뿐이지.”

“오옴? 구게 몬뒈(그게 뭔데)?”

그게 복분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녀석이 입안에 신맛이 도는지 눈 한쪽을 찡그리며 묻는다.

“술.”

한국에서 자란 성인 남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술.

모두가 요강을 뒤엎겠다는 야심 찬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한 이들이 눈을 뒤집고 덤벼드는 것도 맞다.

“···술이라, 그거 괜찮겠는데?”

* * *

마음 같아서는 직접 누룩을 만들고, 찹쌀까지 쪄서 만드는 전통 방식으로 하고 싶지만.

내가 무슨 양주 장인도 아니고, 그렇게까진 못한다.

그래도 강원도 산골에서 힘들게 모은 복분자를 보내주신 석웅 형님을 위해서라도 마트에서 사 온 싸구려 담금주로 담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이곳저곳 알아본 결과 구한 것이 바로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증류주다.

당연한 말로 일반 소주와는 비교하기 힘든 가격이지만 상관있나?

콸콸콸-.

작은 병당 몇만 원이 넘어가는 술이 항아리로 마구 쏟아지니 그 독특한 향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운다.

“···나한테도 이런 소주 좀 내주지. 칫-.”

향기만 맡아도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러움.

설탕과 함께 하루를 발효시킨 복분자가 그득한 항아리에 거의 10병이 들어가고 나서야 비율이 맞았다.

“그럼 이건 언제 먹어?”

“적어도 두 달은 기다려야지.”

“···두 달이나? 아우, 그걸 언제 기다려?”

하긴, 이런 향을 맡고서 먹을 수 없다는 건 고문과 같지.

그래도 저 나이를 먹고서 저러고 싶을까?

나는 항아리의 주둥이에 미리 준비해둔 한지로 밀봉을 하고선 뚜껑을 덮었다.

한참 뜨거운 시기라 그늘에 둬도 알아서 발효가 잘 될 터.

주방을 대강 정리한 뒤, 역시나 원두커피 한 잔을 내려서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지나갈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그리고 얼마 뒤, 아니나 다를까.

“삼초온-!”

“시은이도 안녕? ···근데 얼굴이 반짝거리네?”

“그쵸? 요즘은 그냥 비누로 세수만 해도 무슨 물광 메이크업이라도 한 것 같다니까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살짝 눈을 감는 게 정말 피부가 좋아지는 걸 느끼는 모양이다.

산삼에 그런 효능도 있었나?

그런 시은이의 뒤로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시연이.

“안녕하세요.”

“어어. 시연이도 안녕? 오늘도 어디 가나 봐?”

“네, 오늘은 할아버지한테 다녀오려고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 말은 아마도 산소이거나 봉안당을 말하는 걸 테지.

내 감이지만 산소는 아닐 것 같고, 아마도 봉안당으로 가는 모양이다.

“그래···. 어디쯤 모셨는데?”

“여기서 가까운 곳이에요. 양평에 있는 무궁화 공원이라고···.”

“거기까지 뭐 타고 가려고?”

“버스 타면 금방인데요. 뭐.”

시연의 말대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봉안당이나 묘원이 으레 그렇듯 걸어서 가기엔 외진 곳에 있을 게 분명한데.

이 날씨에 저 아이들이 땀을 흘려가며 힘겹게 걷는다니.

“···시연아.”

“네?”

“혹시 운전면허 있니?”

* * *

“이상해. 형, 진짜 이상하다고!”

“시끄러워. 얼른 짐이나 들고 따라와.”

아무리 날씨가 덥다 한들, 우리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플 일도 없고.

하지만 시연이와 시은이는 다르다.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

도착한 뒤에도 배차 간격이 그리 짧지 않은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그뿐인가? 봉안당이 있는 위치까지 또 걸어야 한다.

그나마 봉안당이면 나을지도.

만약 묘지라면 산일 테고, 그 높은 언덕을 올라야 하는데.

이 더위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이 빠지고 말 거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래서 내 차를 내어줬다.

다행스럽게도 시연이는 차는 없어도 면허는 취득해뒀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나.

“···호, 혹시 숨겨둔 딸? 아니지···. 형 나이를 생각하면 손녀! 손녀들이구나! 맞지?!”

황당한 소리에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금세 입을 다문다.

그래 앞으로 한국에서 살려면 눈치를 좀 챙기는 법을 배워야 좋을 거다.

“으으··· 내가 언젠간 그 두 사람이랑 어떤 관계인지 꼭 알아내겠어.”

“그러던가.”

이루 녀석과 투덕거리며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저기! 지, 진이 형!”

녀석이 저렇게 날 부른다는 건 무슨 부탁이 있는 거겠지.

이번엔 또 뭘까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이루가 헤실헤실하는 표정으로 휴대전화기 가게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너한테 꼬리가 없는 게 다행이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네가 휴대전화기는 뭐 하려고?”

가지고 있어 봐야 추적만 당할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괜히 SNS니, 뭐니 하는 걸 시작하면 덜미가 잡히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다.

이 녀석, 자기네 나라 정부를 너무 우습게 아는 거 아닌가?

“정말 딱 필요한 전화만 할게. 진짜야! 약속할 수 있어!”

“너 혹시, 메를린이랑 통화하고 싶어서 그런 거냐?”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고···. 흠흠.”

그래. 뭐.

남들 연애사에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려는 건 아니지만.

“만약 덜미 잡히면 나는 모른다?”

“걱정하지 마, 형! 정말 딱 필요한 전화만 한다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메를린이 있는 독일로 가지 그랬나 싶지만.

독일과 일본은 묘하게 친한 관계니까.

만약 이루 녀석의 행적이 독일로 이어진 걸 확인했다면 당장에 붙잡혔을지도.

그러고 보니, 일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알아냈을 텐데.

왜 이리 조용하지? 한국 정부에서 그만큼 방어를 잘해주고 있다는 건가?

“좋아. 사줄게. 그것도 제일 최신형으로.”

“역시! 난 형을 믿고 있었지!”

“대신!”

“뭐, 뭐야···. 설마 조건이 있어?”

긴장하지 마라.

아직 이야기도 안 꺼냈는데.

“조건까진 아니고. 메를린한테 좀 대신 물어봐 줄 게 있어.”

“···안 돼.”

안되긴 뭐가 안 돼.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사람 중에서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 딱 하나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불안한 녀석.

그 녀석이 지금 어디 있는지, 혹은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메를린은 아마 블랙, 그 녀석의 소재를 알고 있을 거야.”

“갑자기 블랙은 왜 찾으려고?”

사실 헤어진 후에야 각자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나 이루의 경우를 보니 알겠다.

아마 각 정부에서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근을 할 거고, 그중 몇몇은 정말 넘어갈지도 모르겠다는 걸.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불안한 녀석이 바로 블랙이다.

다른 이들과 달리 끝까지 본명조차 밝히지 않는 녀석.

어처구니없는 게, 이름만 들어서는 거의 빌런같은 녀석의 능력이 치유.

즉,  힐러라는 점이다.

소심의 극에 달한 은둔형 스타일.

만약 그런 녀석에게 정부의 압박이 가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그 녀석이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 하긴 해도 설마 그런 이유로 코어를 넘기지는···.”

물론 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겨우 사람들이 찾아와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전 세계가 다시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걸 내어주진 않겠지.

···그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따르던 사람이 메를린이니까. 분명 블랙에게 연락할 방법을 알겠지.”

우린 녀석이 어느 국가 출신인지도 모른다.

백인인지, 흑인인지, 황인인지도.

늘 검은 마스크에 온몸을 다 가린 검은 복장 일색이었으니까.

블랙이라고 불린 이유도 그거다.

이루 녀석은 그걸 보고 닌자라며 눈을 빛내곤 했었지.

“그러고 보니, 메를린을 제외하면 너랑도 제법···.”

“···.”

이 녀석 지금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 같은데?

“너 일로 와.”

“나, 나는 진짜 몰라! 진짜야! 맹세한다고!”

* * *

“섬?”

“···응. 아마 우리가 들어갔던 게이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것 같은데 정확한 위치는 어딘지···. 지, 진짜야! 나도 더 이상은 몰라.”

“메를린도 몰라?”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메를린이 아는 것도 거기까지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인도라고?”

병적으로 사람들을 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무인도에 들어가서 살 줄이야.

“그럼 차라리 다행이긴 한데.”

완전히 세상에서 단절되기로 마음먹었다면 되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가 아무리 막 나가도 설마 ‘그’ 유리코프를 건드리진 않을 테고.

하밀은 관심 종자이긴 하지만 해도 될 일과 그렇지 않은 걸 구분하는 것쯤이야 걱정하지 않는다.

메를린이야 알아서 잘 처신할 테고.

남은 건 이제 한 명.

“···라미야도 알아서 잘 하겠지 뭐.”

이루 녀석이 연락을 한다고 받을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전화를 하기도 좀 그렇다.

라미야 압둘라흐만······ 어쩌고.

이름이 너무 길어서 솔직히 외우는 걸 중간에 포기해버렸다.

“와-. 나한테는 멜한테 물어보라고 닦달하더니, 결국 자기는 전화도 못 하는 거야? 형,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 스마트폰 갖기 싫어?”

“···치, 치사해!”

치사하다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녀석.

이래서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한다.

* * *

이세 슬슬 저녁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야! 김이루! 너 빨리 안 내려와?!”

저 자식, 국제 전화비가 얼마나 비싼 줄이나 아는 건가?

“왔어, 왔어. 어휴- 간만에 멜이랑 통화 좀 편하게 하려고 했더니···.”

“너, 전화요금은 다 월급에서 깐다?”

“흥! 멜론톡으로 한 거거든?!”

이야. 이 자식, 이거.

그새 그런 것까지 알아냈어?

열심히 한국 문화를 배운다니 기특하긴 하다.

“와이파이 비번 바꾼다?”

“···형, 뭐부터 할까? 양파 깔까? 마늘 다져?”

“됐고, 가서 가게 문이나 열어라.”

“네! 사장님!”

난 피식 웃어주고선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자재 손질이야 이루에게 맡겨도 충분하지만 역시 요리는 직접 하지 않으면 조금 불안하다.

이루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저 녀석 입맛은 확실히 한국 사람과는 조금 다르니까.

“어? 형, 벌써 손님이 오시는데?”

이제 겨우 5시인데, 벌써?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더니 또 익숙한 얼굴이다.

“삼촌-! 우리 다녀왔어요!”

이왕 교외로 나간 김에 맛있는 것도 먹고 천천히 오라고 했더니.

벌써 와버렸네.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언니가 밤 운전은 도저히 못 하겠데요. 그래도 진짜 삼촌 덕분에 엄-청 편하게 갔다 온 거 있죠?”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여워서 난 또 시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그럼 온 김에 저녁 먹고 갈래? 오늘 갈비찜인데.”

“아-싸. 갈비찜! 언니, 빨리 와-!”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시연이가 날 보며 고개를 숙인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나야 어차피 거의 타지도 않아서 세워두기만 하는 걸, 뭐.”

“···네.”

수줍게 웃으며 답하는 모습이 정말 예전의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들어가자, 온 김에 저녁 먹고 가.”

아직 조리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다.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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