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5화.
저녁 장사라곤 하지만 생각보다 늦은 시간까지 하진 않았다.
물론 마지막 손님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닦달을 하진 않지만 지금까지는 그리 술을 즐기는 손님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고.
덕분에 오늘은 4 테이블에 손님이 가득했지만 9시가 조금 넘어서는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이걸 다 직접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너, 내가 형이라고 부르랬지.”
“한국에서 친한 형한테는 반말한다고 하던데? 진이 형.”
···이 자식.
인터넷을 잘하는 모양이네?
“너랑 나랑 10년 차이거든? 그 정도면 친해도 존댓말 써.”
“근데 어차피 우리 둘 다 새로운 신분 아닌가? 그럼 두 살 차이인데.”
말도 잘하네?
“···설거지나 해라.”
“그냥 마법 쓰면 안 되나? 형, 마법 잘하잖아.”
“뭐든 마법으로 처리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이야기를 못 들었어? 아마 우리가 가진 마력도 조금씩 사라져갈 텐데, 너도 미리 익숙해지는 게 좋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지금은 능력이 있는데 뭐하러 불편을 감수해?”
원래 히로 녀석이랑 이렇게 긴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녀석.
“···너 말 되게 잘한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형?”
거기다 저 뒤에 붙이는 형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거슬리는 건 역시 기분 탓이겠지?
“나도 어차피 너한테 시킬 거니까 내가 불편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닥치고 설거지나 해.”
“···치사하다.”
나도 안다.
이번엔 조금 치사했다는 거.
남의 약점을 잡고서 이러고 싶진 않은데, 어째 어린 나이의 새로운 신분을 얻고선 진짜 어린애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그리고 괜히 마법을 썼다가 괜히 들키기라도 하면 서로 곤란하지 않을까?”
뭐, 이렇게 말하기에는 이미 몇 번이고 자잘한 일에 마법을 써오긴 했지만. 이 녀석은 모르니까.
그래도 내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 모양인지.
“뭐, 그건 그렇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히로가 결국 고무장갑을 꼈다.
달그락- 달그락-.
히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오늘 하루의 매상을 정리했다.
4 테이블에 손님의 수는 총 12명.
저녁 메뉴는 비교적 간단한 우렁쌈밥 정식을 준비했는데 나름 평이 좋았다.
솔직히 실패하기 어려운 메뉴이기도 하고.
큼직한 우렁을 듬뿍 넣고, 감자와 두부가 들어간 짭조름한 강된장.
거기에 시장에서 사 오긴 했지만, 상당히 신선했던 상추와 부드러운 배추 속의 조화는 두말하면 입 아프지.
오늘은 시연이도 밥 값을 내고 갔다.
계속 돈을 안 받으면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시연이의 약간은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이 조금 걸린다.
설마 뭘 눈치챈 건가?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딱히 실수하진 않은 것 같은데···.
뭐 그저 노파심이겠지.
난 그렇게 매상을 정리하고 히로가 설거지를 끝낸 뒤 바닥 청소까지 끝마쳤다.
그러니 어느덧 시간이 10시 반을 넘겼다.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히로 녀석의 이야기가 조금 궁금하기도 해서.
“히로! 아, 이제 히로가 아니지···. 이루야, 맥주나 한잔 할까?”
내일은 저 녀석의 옷이며 생활필수품들도 사러 나가야 한다.
어차피 둘 다 술을 마신다고 취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음은 안 하는 편이 좋겠지.
* * *
“아- 개운하다. ···언니, 무슨 생각해?”
“응? 아니, 그냥 이것저것···.”
샤워를 마치고 나오며 묻는 시은의 물음에 시연은 멍하니 있던 정신을 얼른 깨웠다.
“근데, 식당 아저···. 이제 삼촌이지. 아무튼, 요리 은근히 잘한다. 그치?”
“응. 오늘 강된장 너무 맛있더라.”
“나도! 진짜로 그런 삼촌 있었으면···.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똑같네. 이진 삼촌이랑.”
만난 적도, 본적도 없지만.
이진이란 이름을 가진 삼촌이 있었다는 건 안 다.
정확히는 오촌 당숙이긴 하지만.
“···시은아.”
“응?”
티비 앞에 앉아 과일 하나를 집어 든 시은이 시연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너, 우리 지원해주는 재단 이름이 뭔지 알아?”
“응. 알지. 귀환자 재단이잖아. 그 정도야 당연히 기억해야지.”
“그 재단이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이라는 것도 알아? 우리가 그 첫 번째 지원 대상자인 것도?”
“우음···. 그건 몰랐는데?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어쨌든 우리한테는 고마운 곳이잖아. 왜? 언니는 뭐가 이상해?”
이시연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동생의 말마따나 정말 고마운 곳이고, 매달 지원해주는 엄청난 돈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학업이나 진로 등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구하기 힘든 미술 도구들을 해외에서 구해주거나 기간이 지나버려서 다음 학기로 미루려 했던 복학 신청까지도.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자신들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시은이 역시 학교에서야 상당한 기대를 받는 학생이긴 하지만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더 어려운 환경에서 더 열심히 사는 아이들도 있을 텐데.
“너 그 식당 이름이 뭔지는 알지?”
“귀환자 식당?”
“뭐 이상한 거 못 느끼겠어? 식당 이름이랑 재단 이름, 거기다 식당 사장님 이름까지.”
“글쎄? 요즘 귀환자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유행이잖아. 미국에서 난리 난 그 사람 때문에.”
이시연도 듣긴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튜브나 뉴스에서 나오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고.
‘난 그래서 더 이상한데···. 그 사람이 말한 귀환자 중 한 명의 이름이 이진이잖아.’
과일을 오물거리며 티비를 보고 있는 동생은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이라 치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끓여주시던 맛이 났던 김치찌개도 그렇고, 오늘 시은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의 그 눈빛···.’
괜한 오해를 하거나 하는 게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감상에 젖어 들게 만들던 그 눈빛.
어떻게 그런 따듯한 눈을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네 식당 사장님이 지을 수 있었던 걸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한 가정의 가장인 그녀가 보는 세상은.
동생인 시은이와는 조금 달랐다.
* * *
부르릉-.
안정민 과장이 준.
정확하게는 나라에서 준 SUV가 처음으로 가동을 시작했다.
막상 멀리 갈 일이 없어서 그냥 세워뒀던 것인데, 오늘에서야 드디어 첫 시동을 걸었다.
“꼭 백화점을 가야겠냐? 그냥 시장에서 대충 사 입지?”
“지금 입고 있는 이런 거?”
안정민 과장의 트레이닝 복.
사실 내가 봐도 조금 그렇긴 하다.
나도 저게 입기 싫어서 첫 외출을 하자마자 곧장 옷가게로 달려갔던 거니까.
자고로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 하기 싫은 법 아닌가.
“그래. 가자, 가!”
새 차라서 그런지, 길이 안 들어 쭉쭉 나가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성능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차에 내가 모르는 기능이 덕지덕지 달려 있었을 뿐.
“이건 뭐지?”
동그라미 안에 AI라 쓰인 버튼이 유난히 크게 달려 있었다.
대강 짐작은 한다마는, 그게 진짜 가능한가 싶어서 망설이는 사이.
“몰라? 이거 자율 주행이잖아.”
“···그게 진짜로 되는 거야?”
“뭐야, 돌아와서 운전 처음 해봐?”
······.
“진짜 처음인가 보네. 요즘은 다들 직접 운전 안 해. 목적지 설정하고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다 가니까. 주차도 다 자동으로 된다고.”
허어.
30년 사이에 많이 바뀐 것도 제법 있는 모양이네.
나 때는 그저 언젠가는 상용화가 될 거라던 일종의 ‘미래 기술’에 가까웠는데 말이지.
딸칵-.
버튼을 누르자마자 핸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던 시끄러운 안내 음성도 사라지니 차 안이 고요해지고.
확실히 편하다.
백화점까지 오는 동안 할 일이 없었음에도 두 사람이 딱히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온 것은 아니지만.
“한국 백화점은 너무 작네.”
확 한 대 쥐어박을까.
“시끄럽고, 빨리 옷이나 사서 가자고. 오후에는 시장도 가봐야 하니까 서둘러.”
“어차피 저녁 장사만 한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은 충분할 것 같은데.”
“오늘은 좀 멀리 있는 시장으로 갈 거야.”
이왕 차를 끌고 나온 김에.
전부터 한 번 가봐야지 하며 벼르던 시장을 들러볼 생각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최대한 빨리 고르도록 노력해볼게.”
뭔가 상당히 신뢰성이 떨어지는 말투인데.
입구부터 다투긴 싫어서 그저 혀를 차고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당연히 캐쥬얼 매장으로 가는 거로 생각했는데.
띵동-.
내려서자 눈에 들어오는 옷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옷을 여기서 고를 생각인 거야?”
“당연하지.”
“너 일하는 곳이 식당이라는 건 알지?”
“물론.”
“근데도 이런 옷을 입겠다고?”
내 말에 히로, 아니. 이루 녀석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든다.
저 녀석 조만간 정말 나한테 한 대 맞을 것 같다.
내 기운을 느꼈는지, 녀석이 살짝 움찔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형이 돼서 동생을 때리고 그러면 안된다?”
“···너 어째 네가 필요할 때만 동생이 되는 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드냐?”
“응. 전혀. 진이 형.”
언제고 가까운 시일 내로 날을 한번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휘황찬란 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캐쥬얼 매장이 가득한 층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남성 정장 코너.
늘씬한 마네킹이 멋들어진 연미복부터 쭉 뻗은 정장을 입고 늘어선 곳을 자연스럽게 거니는 녀석.
시장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데도 얼핏보면 모델처럼 거니는 녀석.
아슬아슬한 바짓단의 길이가 퍽 우스운데도 주변에서 녀석을 보는 시선에서는 웃음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어머, 비율 미쳤다.’
‘모델아냐? 근데 옷은 또 왜 저래?’
‘어디 재벌 집 아들 아닐까? 왜 저것도 유럽에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옷일지도 모르지.’
‘맞네! 진짜 그런 것 같아. 나 패션 잡지에서 봤던 것 같아!’
아니라고.
저거 안정민 과장이 집에서 입던, 그냥 시장에서 산 옷이라고 이 사람들아.
“진이 형. 이거 어때?”
네이비 색의 정장을 입고 있는 마네킹 앞에 서서는 날 부르는 녀석.
이렇게 보니 누가 사람이고, 누가 마네킹인지 헷갈릴 정도긴 하다.
물론 나도 그에 뒤지지 않지만.
“···네이비면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색이지. 이걸로 할 거야?”
“응? 무슨 소리야. 한 번에 보고 결정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건 일단 후보 1번이지.”
그 뒤로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걷는다고 다리가 아플 일은 없지만, 어쩐지 심적으로 봐서는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것만 같은데.
“음···.역시 후보 1번이 가장 좋겠어.”
후보 24번까지 정한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서 나는 실소를 지었다.
자꾸만 ‘그날’이 점점 당겨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후우, 그럼 이제 끝이지?”
“첫 번째는 그렇지. 두 번째는 역시 환한 계열이 좋겠지?”
“···몇 벌이나 살 생각인데?”
“적어도 5벌은 있어야지. 물론, 이 아이들은 일할 때 입을 건 아니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도 저런 옷은 안 입을 거다. 이 자식아!
뭐, 그래. 어차피 네 옷이니 네 맘대로 해라.
그렇게 반쯤은 포기하고 있을 때.
후보 1번의 매장에 도착한 녀석은 당당하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어쩌긴. 카드 줘야지?”
나와 녀석의 시선이 잠시 마주친 뒤.
“너 돈 없어?”
“진이 형, 내가 지금 돈이 어딨어. 당연히 정부에서 전부 동결시켜 놨지.”
지금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바보인 거야?
너무 당당해서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뭐, 이 정도 옷 한 벌 사주는 거야 일도 아니다.
막말로 매장에 있는 옷을 전부 사줄 능력도 된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아아아-! 이, 이거 좀 놓고. 진이 형!”
그날 백화점 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진귀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말끔한 옷을 입은 모델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델의 귀를 잡고 끌고 가는 모습을.
* * *
“···너무 해.”
“너무해? 너무해애?!”
나는 녀석을 끌고 캐쥬얼 매장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 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면바지와 청바지, 셔츠 몇 장과 티를 강매시켰다.
물론 계산은 내가 했지만.
“오늘 산 건, 앞으로 네 월급에서 조금씩 차감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 이자도 있다.”
“와, 와아-! 치사하게 정말 이럴 거야?”
이 녀석 진짜 뭘 착각하는 건가? 아니면 너무 낙천적이라 그새 잊어버린 건가?
지금 자기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니, 이쯤에서 한 번 되새겨줄 필요가 있겠다.
“너, 지금 쫓기고 있다는 건 알지?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띄어야 한다는 걸 내가 굳이 말해줘야 겠냐?”
“···조심할게. 형.”
‘광속의 검’이라고 불리던 녀석이.
설마하니,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을 줄이야.
앞으로 어쩐지 이 녀석 때문에 피곤한 일이 늘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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