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1화 (11/153)

귀환자 식당 11화.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아는 척하지 마라.

전前 게이트 관리국장이었던 장민국 현現 국정원장이 당부한 말이었다.

-그분의 성격으로 봐서 먼저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 우리 쪽에서 코어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면 분명 반발심을 가지실 거다. 그러니 실수라도 먼저 꺼내선 안 돼.

‘···어떻게 하지?’

이건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안 꺼낸 것도 아니게 돼버렸다.

그냥 깨끗하게 인정하고, 코어에 관해 묻는 게 차라리 나을까?

‘원장님한테 죽을지도···.’

그것 하나만 지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었는데, 결국 그것조차 제대로 못 지켜서 이 사달이 나버리다니.

자신 스스로가 한심한 건 차치하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안정민 과장의 머리가 세차게 돌아가는 동안.

왜 저렇게 고민을 하는 거지?

정황을 따졌을 때 코어에 관한 이야기는 어지간한 국가의 수뇌부라면 다 알고 있을 이야기다.

아니지, 리안 녀석의 성격이라면 아마 어디 인터넷에 영상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 안다고 봐야 할 정도일지도.

그런 뻔한 걸 물었는데, 뭘 저렇게 고민을 하나 싶네.

“안정민 과장님.”

“네, 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자세를 고쳐잡는 게 꼭 4성 장군 앞에 선 이등병 같다.

아닌 말로 저렇게까지 반응하면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이거··· 정말 실망인데요.”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정말로 처음부터 사장님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저···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서! ···만약 원하신다면 저 대신 다른 파견 직원으로···.”

이 나이에 장난기가 조금 발동해버렸나.

그래도 안정민 과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나름대로 재미는 있다.

이왕 시작한 거 조금만 더 골려줄까.

“정말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닙니까? 게이트가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걸 지금 이야기하는 것도.”

“아, 아닙니다. 그건 정말 제 이름을 걸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사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예언을 미처 떠올리지도 못한데다···. 또!”

안정민 과장이 처음부터 속일 의도가 아니었다는 건 안다.

지금까지 봐온 그의 성정이나 처음 날 마주한 뒤 집을 구해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면서 정말로 날 걱정한다는 걸 느꼈으니까.

여기서 조금 더 하면 정말 울지도 모르겠네.

그만할까?

피식.

내가 슬며시 웃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알아요. 안정민 과장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그냥 섭섭해서 장난 한번 쳐봤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인상 펴세요.”

“섭섭이요?”

“난 이제 우리가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서 조금 억울하네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설마 감동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사, 사장니임···.”

이 분위기.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안정민을 보며 나는 슬쩍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손바닥을 들었다.

“아, 거기까지만.”

“···네.”

이건 뭐, 애도 아니고.

40대 중반이나 된 양반이 이런 걸로 감동을 하고 그러나.

이제 장난은 그만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저는 게이트가 다시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다.

지구상에 게이트가 열렸던 이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후의 게이트’에 들어갔었던 우리 7명이라면 안다.

당시에도, 게이트를 나와서도.

모두 딱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 없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래도 과장님의 의견은 나쁘지 않군요. 다른 주무관청의 관리를 받는 것보단 저에게도 그 제안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정말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우선 국정원 자체도 주무관청이 아니다.

그런데 국정원도 아니고, 그 하위 부서가 주무관청을 맡는다?

솔직한 말로 가능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가능합니다!”

뭐, 저렇게 자신이 있어 하니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한 번 해보시죠. 필요한 게 있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문득, 개업식날 왔던 그 거대한 화환이 떠오른다.

물론 일개 화환을 대통령이 직접 보냈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는 보고가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례적으로 허가가 날지도 모르지.

정 안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내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없다.

* * *

마포 여자 고등학교.

이시은은 진로 희망서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하아···.”

“웬 한숨이야?”

어려서부터 단짝인 김예령이 다가와 어깨를 툭 하고 친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쉬는 시간이면 누군가가 꼭 찾아가거나 찾아오는 그런 친구.

“이거···. 너는 썼어?”

“나야 뭐. 근데 너는 어차피 어디든 갈 수 있는 성적 아냐?”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성적이면서 걱정이라니.

남들이 보면 욕한다며 핀잔을 주려던 예령은 아차 싶었다.

‘하긴··· 장학금 받아야 한다고 했지.’

그것도 전액 장학금.

다시 말해 과 수석은 돼야 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이라곤 해도 그게 전국구로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너, 한국대 의대 가고 싶어 했잖아.”

“의대···. 가고야 싶지. 우리 언니 알잖아. 내가 가고 싶다고 조금이라도 티를 내면 아마 어떻게든 보내려고 할 거야. 근데··· 나 우리 언니한테 미안해서라도 그 말은 죽어도 못해.”

김예령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볍게 건네는 위로는 친구에게 그저 흘러가는 말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아으! 진짜, 우리 집이 부자였으면 내가 미래 의사 친구를 위해서 투자 좀 팍팍해달라고 할 텐데!”

괜스레 소리쳐본다.

‘의대는 학비가 너무 비싸, 아무리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6년간 이어지는 공부와의 혈투가 기다리고 있다.

꿈에 그리던 대학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치열함 속에서 성적도 우수하게 유지해야 하는 건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공부에 자신 있는 이시은이라도 전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 따라잡을 자신은 없었다.

‘역시 학과는 그냥 무난하게 경영학과 같은 데로 할까···.’

대기업 입사를 목적으로 하는 진로.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긴 하지만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었다.

‘누군 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나···.’

당장 언니인 이시연만 하더라도 미대를 들어갔지만, 학비 때문에 휴학인 상태다.

학비 이외에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한지라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까지 하지만 어려웠다.

두 사람만 있으니 생활비까지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여러 곳에 원서를 넣을까도 했지만, 만약에 그러다 장학금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덜컥 합격해 버리면?

이시연에 알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대에 보내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이시연의 복학은 적어도 6년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냥 중퇴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는 셈이다.

“역시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어!”

한국대 경영학과.

이시은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예령은 살짝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친구가 안타까워서, 또 동시에 친구의 결정을 이해해서.

예령은 조용히 떨리는 친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어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싫었다.

* * *

저녁 장사뿐이긴 하지만, 주방과 홀을 혼자 왔다 갔다 하려니 조금 바쁘긴 하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주방에서 운동화를 신고 일을 하려니 자꾸만 젖는 게 무척 거슬렸다.

그래서 바닥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 슬리퍼나 발목 정도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하나 구할까 싶어서 옷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시연이네 가게를 가도 되겠지만 그곳은 옷만 팔고 신발은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나온 김에 한번 슬쩍 들러나 볼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하는 풀 타임 근무인 모양이니 이 시간에는 가게에 있겠지.

슬쩍 가게 앞을 지나는 척하며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아침에 인사하며 지나친 그 복장 그대로다.

거기에 매장에서 입는 전용 조끼 같은 것만 걸친 듯.

“시연씨.”

문득 누구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아침에는 혼자이고, 함께 일하는 친구는 점심 이후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파트 타임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오전 시간이라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새로 근무하는 누군가 온 건가 싶었다.

근데 어째 부르는 목소리가 상당히···.

재수 없다.

“···네. 점장님.”

“회식 때 왜 먼저 가버렸어. 난 잠깐 화장실 간 줄 알고 한참 기다렸는데.”

회식이라면 벌써 며칠 전의 이야기니, 아마 매일 매장으로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근데, 어쩐지 마음속에서 싸한 느낌이 오는데?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매출이 많이 올랐어. 역시 시연씨가 온 뒤로 장사가 점점 잘되는 것 같아.”

“아니에요. 저야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걸요.”

“없긴 왜 없어. 시연씨야 그냥 있어 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지. 사람들이 참 그래요. 가게 안에 이쁘고 잘생긴 사람이 있으면 왠지 그냥 지나가다가도 한 번씩 들르고 싶고 그러거든. 내가 이래서 시연씨처럼 몸매 좋고 예쁜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거라니까?”

인터넷을 자주 접하다 보니 조금씩 요즘 시대의 분위기를 익혀가고 있다.

예전에야 모르겠지만 요즘엔 직원에게 저런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성희롱으로 간주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걸 과연 저 점장이란 놈이 모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일부러 저러는 거지.

꾸욱-.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데, 느끼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참. 시연씨, 오늘은 끝나고 뭐해?”

“네? 그야 집에 가야죠. ···점장님도 사모님이 기다리지 않으세요?”

하, 심지어 가정이 있었어?

이거 아주 본격적으로 개새끼인데?

“응? 아아, 괜찮아. 요즘 사이가 안 좋아서 서로 말도 안 하거든. 원래 성격도 잘 안 맞았는데 어쩌면 이혼이 답인 것도 같고. ···시연씨는 어떻게 생각해?”

“네? 그걸 왜 저한테···.”

하? 하하···.

순간적으로 딸 가진 아빠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는데?

속에서 뭔가 부글거리는 게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시연씨만 괜찮으면 나는 우리 사이가 좀 더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왜 이러세요.”

시연이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안의 상황까지 보려고 하진 않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마력 차단 물질이 도포가 된 벽도 아니고, 일반적인 콘크리트 벽쯤 투시하는 건 일도 아니지.

눈에 마력을 집중시키자 금세 안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연이와는 띠동갑 이상의 나이 차가 나 보이는 녀석이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다.

이대로 곧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아니, 문을 부숴버리고 들어가려다가 얼른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장 휴대전화를 들었다.

“과장님. 저 이진입니다.”

-네.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막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결과 나왔습니까?”

-네!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정관 작성을 도와줄 행정사 한 분과 오후에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지금 귀환자 재단이라는 이름을 먼저 사용해도 나중에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은 없겠죠?”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안정민 과장이 짧은 생각을 마쳤는지.

-네. 사실상 서류 절차만 남은 셈이니까요. 사장님께서, 아니···. 이제는 이사장님께서 재단 이름 며칠 먼저 사용하셨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아무 탈 없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환영 마법을 이용해 살짝 모습을 바꿨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으로.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각성자라면 금세 눈치챌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지만.

일반인은 마력을 감지할 수 없으니까.

적어도 지금 한국에서 내 환영 마법을 알아챌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거리낄 것은 없다.

나는 자신감 있게 시연이가 일하는 옷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어, 어서 오세요!”

들어서자마자 시연이의 당황한 표정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후우-.

나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살짝 진정시키고.

“혹시 이시연씨 되십니까?”

“···네? 아, 네. 제가 이시연인데요.”

나야 변한 게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의 내 모습은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회사원처럼 보일 터.

이런 캐쥬얼한 가게에 오전부터 찾아올 일은 드문 복장을 한.

한눈에 내가 일반적인 손님이 아니란 걸 알아챈 모양인지.

“저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점장이란 놈이 나섰다.

나는 그놈을 무시하고선, 시연이에게 다가갔다.

“귀환자 재단에서 나온 이ㅈ··· 이호진이라고 합니다. 크흠, 이시연씨와 이시은씨의 장학금 지원 문제로 왔습니다.”

하마터면 본명을 말할 뻔했네.

확실히 난 연기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야.

“이봐, 내가 지금 당신 뭐냐고 묻잖아!”

턱-.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모양인데.

그렇다고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어깨에 올라온 손을 그대로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네.

아니지, 여기선 안 된다.

터져 나오려는 마나를 간신히 억눌렀다.

여기엔 시연이도 있는데 무턱대고 기를 발산시켰다간 자칫 다칠지도 모를 일.

나는 다만 그 점장이라는 놈을 향해 몸을 돌리며 씨익 웃어줬다.

아주 미약한 살기를 담아서.

“어어··· 어어···.”

녀석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바짓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셔갔다.

약간의 냄새와 함께.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나갔다 와도 되겠지?”

공기 흐름을 차단해 녀석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건네자.

“···그, 그럼요. 물론입니다···. 시, 시연씨 나갔다 와요.”

아마 지금 자기 바짓가랑이가 젖어 드는 줄도 모를 거다.

그런 추한 모습을 시연이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어서 내 몸으로 그녀의 시야를 살짝 가렸다.

어차피 시연이가 이 가게에 다시 발을 들일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 시연씨, 잠깐 이 앞에 커피숍이라도 가실까요?”

나는 시연이가 혹여라도 짐승만도 못한 놈이 지려놓은 걸 밟기라도 할까 봐 얼른 다른 쪽으로 그녀의 걸음을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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