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8화 (8/153)

귀환자 식당 8화.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화환들.

그 속에서 짧지만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설마하니 그냥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라고 생각한 한미희 통장의 딸이 이시은과 친구라니.

뭐, 한미희 본인에 대한 내 평가가 딱히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위치로 올라온 셈이다.

“둘 다 편하게 앉아. 아직 저녁 전이지?”

아무래도 엄마가 여기 있으니 딸인 김예령은 아직 저녁 전이겠고.

그 친구인 시은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안정민 과장과 강영훈 사장 및 직원들은 벌써 술자리를 시작했고, 돼지머리에 두툼한 봉투를 꽂아둔 답례로 전이며 나물, 과일 등을 잔뜩 차려줬다.

정작 신경 쓰고 싶은 건 이쪽.

우리 조카는 뭘 좋아하려나?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복기하고 있는데.

“시은아?”

“어?! 언니!”

시은이가 언니라고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다.

주방에서도 누군가 가게로 들어섰다는 건 알아챘지만 그게 설마 이시연일 줄이야.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무슨 기차놀이도 아니고, 인연이 줄줄이 이어진다.

“어어. 시연이구나. 이야- 몰라보게 이뻐졌네.”

“아는 사이세요?”

궁금증이 일어 슬쩍 다가가 물었다.

강영훈 사장은 마치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요. 우리 동네에서 시연이 모르는 간첩이죠. 착하지, 공부도 잘하지. 거기다 또 얼마나 효녀였는지 말도 못 하죠···. 아.”

자기 딸 자랑하듯이 말을 잇던 강영훈 사장이 말을 하다가 흠칫한다.

“이런···. 미안하다. 아저씨가 괜한 이야기를···.”

“아니에요.”

외삼촌의 이름이 이정수라고 했었나.

안정민 과장의 눈치를 슬쩍 보니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시연과 이시은 자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사람이 어릴 때 사고로 떠났다고 들었다.

그러니 지금 강영훈 사장이 말하는 효녀라는 건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했던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아, 그런데 너희들은 여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제 퇴근하고 오는 길인가 보네?”

“네. 저는 시은이한테 여기 있다고 문자가 와서···. 이제 집에 가야죠. 가자, 시은아.”

활발한 성격의 이시은과는 달리, 조금은 숫기가 없어 보이는 큰아이.

뭔가 의기소침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응? 언니, 여기 사장 아저씨가 저녁 해주신데. 우리도 여기서 먹고 가자.”

“얘는. 얼른 일어나.”

히이잉-.

언니의 말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길래 내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그 옷가게에서 뵀던 분 같은데, 맞죠?”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날 본 모양인지.

“아, 네. 안녕하세요. ···아, 여기 사장님이셨구나.”

하하.

그날 내가 나오고 다른 직원과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라 나는 그저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그러지 말고 언니분도 앉아요. 오늘이 개업식이라 아직 제대로 된 음식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저녁이라도 먹고 가세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음. 이렇게까지 거절하면 더 권하기가 힘든데.

사실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초대하고 싶었던 두 사람이다.

물론 그간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준 안정민 과장이나, 인테리어를 맡아준 강영훈 사장.

새로운 주민이라고 간간이 들러 근황을 챙겨주시던 한미희 통장님도 고마운 분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일 반가운 손님은 두 조카다.

지금 당장이야 앞에 나서기가 조금 조심스럽지만 언젠가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조금 친해지고 싶은데.

“시연아, 이리 와. 여기 앉아.”

역시 동네 오지라퍼 한미희 통장님.

화이팅!

“네? 어어···.”

분위기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앉아버리는 이시연.

얼떨결에 앉아버린 이상 뿌리치고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다.

“정해진 메뉴는 없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요.”

또 일어나기 전에 내가 얼른 선수를 쳤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뭘 해달라고 할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럼··· 김치찌개로 부탁드릴게요.”

어? 이건 또 의왼데.

싶다가도 왜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지 금세 눈치챘다.

어느 정도 음식 솜씨만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고, 손이 적게 가는 요리를 고른 거다.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이런 식의 반응을 했다면 정작 내가 더 고민할까 봐 그런 거겠지.

참 마음 씀씀이가 남다른 아이다.

“크- 여기 김치찌개 죽이는데. 어떻게 알았어?”

“그래요? 그냥···.”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맛을 봤던 강영훈 사장이 엄지를 치켜들고선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다가가서 저 손을 강제로 내리고 싶지만 참는다.

“학생들은?”

마음 같아서야 이시은을 콕 집어 메뉴를 묻고 싶은데.

그랬다간 혹시 여고생에게 추파를 던지는 변태로 몰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넌지시 물었다.

“아저씨, 혹시 소시지볶음도 되요? 저 그거 먹고 싶은데.”

언니와는 달리 확실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이시은.

환한 얼굴로 웃으며 물어보는 게 얄밉다기보단 슬며시 미소가 나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당연히 되죠. 그럼 쏘야로?”

“콜!”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전 계란찜!”

김예령도 메뉴 하나를 정한다.

한 사람이 하나씩 정했지만 어쩐지 무척이나 조화가 잘 어울리는 반찬들.

나는 세 사람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소시지를 데칠 물을 올리고, 계란을 풀었다.

세 가지 메뉴를 동시에 해야 하지만 모두 손이 적게 가는 음식들이라 크게 부담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밖에서는 도란도란 서로의 근황을 묻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래. 요즘도 계속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하는 거니?”

“네. 아무래도 다음 학기까지는 해야 할 것 같아요.”

한미희의 질문에 들려오는 이시연의 목소리.

학비 때문인가?

통통통-.

계란찜에 넣을 당근과 파를 다지면서도 신경은 온통 밖으로 향한다.

알아보자면 알아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뒷조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다니.

한미희 통장님 최고다. 역시 동네에 저런 분이 한 분쯤은 있어야 해.

“그래···. 그나저나, 내년이면 시은이도 졸업일 텐데.”

“저는 전액 장학금 받고 갈 수 있는 데로 갈 거라 괜찮아요. 아르바이트도 바로 시작해서 생활비에 보탤 거고. 언니, 조금만 기다려.”

“···아저씨가 지금 너희를 보시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어어···.

분위기가 조금 침울하게 흘러가는데?

“아이고, 통장님. 갑자기 어르신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러세요.”

“그러게요. 제가 주책이네요.”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인 모양인데.

특히나 내 삼촌이란 분의 인망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를 유추해냈다.

돌아가신 지가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구나 하고.

그렇다면 100세를 넘기셨던 건가?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육수에 계란을 풀고 랩을 덮어 중탕에 익어가는 계란찜.

들기름을 넣고 볶은 뒤 역시나 육수를 넣고 진한 국물을 만들고 있는 김치찌개를 잠깐 확인하고.

칼집을 넣어 물에 데친 소시지를 꺼내 기름 두른 팬에 올렸다.

파프리카와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함께 볶다가 토마토케첩과 고추장, 물엿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넣는다.

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양파가 반쯤 투명해지면 완성.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와 쟁반에 담은 소시지볶음을 내고.

마지막으로 중탕을 마친 계란찜을 꺼내 랩을 벗기면.

“자, 음식 나왔습니다.”

잘게 다져진 주황빛 당근이 알알이 박혀있는 계란찜이 그릇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린다.

“와! 푸딩 같아요!”

가장 먼저 계란찜에 반응을 보인 건 예령이였다.

자신이 주문한 요리가 생각보다 맛있어 보여서 신이 난 것 같이 웃는다.

시연이도 시은이도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한미희의 딸인 김예령도 못지않네.

활달한 성격의 시은과 어째서 단짝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밥과 밑반찬을 작은 접시에 담아 함께 내어주고 나자, 어째선지 마음이 따듯한 감정으로 충분해진다.

정식 오픈을 한 뒤로 처음 음식을 대접해주는 게 저 아이들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 동네를 고집한 게, 정말 잘한 선택인 듯싶다.

“어? 아저씨.”

“응?”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부르는 시은이.

무슨 일일까? 설마 계란찜에 껍질이라도 들어간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다면 정말 민망한데.

다행히 그런 일은 아니었다.

이시은은 수저를 내려놓고서, 가게 벽면 한쪽을 가리켰다.

“···아저씨 이름이 이진··· 이에요?”

밥을 먹다 말고 시은이의 눈길을 끈 건 바로 사업자 등록증이었다.

안정민 과장이 준 사본을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둔 것인데, 그걸 본 거다.

뭐, 누구나 보라고 걸어둔 거니까.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주민등록등본.

순간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내 거주지가 저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집으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걸 간과하고 있었을까.

“···왜?”

이런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저 아이들은 날 본 적도 없고,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그저 동명이인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겠지.

“아뇨, 그냥···.”

조금 전까지 그렇게 밝아 보이던 아이의 표정에 살짝 드리우는 그늘.

나는 왜 그랬는지를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알게 됐다.

* * *

“알고 있었겠죠. 살면서 주민등록등본이야 다들 한 두 번은 떼어보지 않습니까. 이름밖에 없었긴 해도 아이들한테는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을 테니까요.”

안정민 과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내가 신분을 새로 만들면서 기존의 ‘이진’은 완전한 사망으로 처리됐다는 걸.

서류상일 뿐이지만 그래도 ‘동거인’이 사망 처리 됐으니, 두 조카의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남았겠지.

가족이 없다는 것.

이게 가져오는 울림이 얼마나, 나는 잘 알고 있었는데.

적어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가볍게 결정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그런 아쉬움이 뒤늦게 찾아와 마음이 무거워졌다.

두 아이는 아마 알고 있었을 거다.

‘이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들의 할아버지에게는 조카가 되는 오촌 당숙이 있다는 걸.

그리고 당장에야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혹시라도 언젠가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을지도.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언질을 드렸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이 나이 먹고 그런 것도 제대로 생각을 못 한 제 잘못이죠.”

안정민 과장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 걸로 질책을 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사장님.”

안정민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꺼내기가 어려운 말인가?

“이런 질문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왜 직접 앞에 나서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정작 본인이 아니라면 다른 이에게는 말로 하기 힘든 그런 감정인데.

“···갑자기 나타난 삼촌. 차라리 어려서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모르겠지만, 저 아이들은 심지어 제가 게이트를 들어간 뒤에 태어났잖아요. 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카들이 있는 줄도 몰랐고.”

불쑥 나타나서는 내가 너희 삼촌이다.

사실 이 집도 내 소유니까 앞으로 잘 지내보자?

서로가 어색한 상황이 그려질 게 뻔하다.

무엇보다 삼촌이라고 나타난 내가 나이 차이라고는 고작해야 4~5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고 하면···.

물론 처음부터 밝히고 천천히 다가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나는 그냥 저 아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또 상처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명백히 내 잘못이다.

“그래서, 안과장님.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뭐든 말씀만 하시죠.”

“사회복지과에서 혹시···. 학생들에게 장학금 같은 것도 지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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