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상엽이 절대신이 된 지 5년이 흘렀다.
세상은 평화로웠고 갓코인은 역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많은 나라에 다시 문화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역동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1월 1일.
런던 외곽의 버려진 공장에서는 특별한 파티가 열렸다.
버려진 공장이라고 해도 그 부지가 워낙 넓었고, 실제로 신고가 된 파티였다.
새해를 기념하는 클럽 파티.
메인 DJ가 무대 위로 오르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오직 음악만으로 클럽 음악의 선두 주자가 된 DJ였다.
“DJ 레나!”
그 이름 앞에 모두들 함성을 질렀고 레나는 화답하듯이 음악을 틀었다.
레나는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화려했다.
그녀의 손짓에 분위기가 바뀌었고 폭발적인 음악이 이어졌다.
20분가량 그녀는 축제의 절정을 만들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들이 보이지 않는 무대 뒤로 갔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극한의 쾌감에 심장 박동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여운을 즐기던 그녀는 관계자들과 인사를 하고 난 뒤에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그런데 가방 위에 붉은색 봉투에 담긴 편지가 놓여 있었다.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펼쳤다.
-프렌즈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짧은 문구 아래에는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금빛 망치였다.
레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다.
-내일 이 편지를 찢으면 당신은 초대에 응하게 됩니다.
꽤나 유쾌한 초대장이었다.
레나는 무대 위에서처럼 밝게 웃으며 편지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축제장을 떠났다.
김만득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쉰 살이 넘었음에도 항상 부인과 손을 잡고 산책을 다녔으며, 중학생 딸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였다.
그날도 김만득은 평소처럼 트럭에 공사용 모래를 가득 싣고 새로 건설된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상엽이 그에게 준 차와 트렁크에 있던 돈을 모두 팔아서 산 트럭은 세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산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집을 사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 일과를 마친 김만득은 중학생 딸이 좋아하는 피자를 사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봉투 하나가 내려왔다.
-프렌즈 파티 초대장.
김만득은 자신이 목숨을 맡겨 놓은 상엽에게 5년 만에 연락을 받았다.
* * *
“망자의 신, 잠깐 저 좀 보실까요?”
“주, 주인님…….”
“지금 장난하세요?”
상엽의 비난에 망자의 신이 된 추종자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떻게 신이라는 분이 편지 배달을 못 하세요? 네?”
상엽은 친구들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내고 있었다. 이 일을 추종자가 거들어 주었는데 사고가 난 것이다.
“주인님, 그분들을 제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인님 기억 속에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 분들을 모두…….”
“야!”
결국 상엽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이리랑 레나, 마루나한테 동시에 편지를 보내냐!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신의 대륙이 아니라 망자의 대륙에 보냈다고 시위하는 거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망자의 대륙에서 술 먹고 나한테 섭섭하다고 주정 부렸다며?”
이제 추종자는 의지가 아닌 입으로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
투명하던 몸은 완벽한 신체를 갖췄고 표정도 선명해졌다.
“죄송합니다.”
“내가 너 특별 대우 한다고 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
“항상 감사합니다.”
“사고 치지 마. 다음에 또 그러면 지옥으로 쫓아 버린다. 거기서 술이나 실컷 먹던지.”
“주인님! 지옥은 안 됩니다! 거긴…….”
“왜? 지난번에 지옥 가서 깽판 부렸다며? 마족들이 불만이 많아. 왜 조용히 살고 있는데 건드리냐면서.”
“그거야, 주인님께서 먼저 서큐버스 퀸을 만나…….”
“그만.”
상엽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추종자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주인님, 제가 연락할 방법은…….”
“유령아.”
“네, 주인님.”
“지금 여기, 너랑 나랑 둘이 있냐?”
추종자는 그제야 상엽의 뒤에 루시가 있다는 걸 알았다.
“죄, 죄송합니다.”
“유령아, 정신 차리자. 내가 요즘 너 때문에 심심하진 않다만 스트레스가 많아.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상엽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추종자를 신의 제단에서 내보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종자가 나가자 루시가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편지 말입니다. 빼앗아 올까요?”
“장난해? 너까지 왜 이래?”
상엽은 그제야 루시의 표정을 보았다.
“너 지금 즐기는 거지?”
“아닙니다. 그저 꽤 즐거운 파티가 될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추종자의 실수로 인해서 그와 관계가 있던 여성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었다.
본래 이 파티는 세 명의 여성을 모두 제외하고 편한 사람만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루시, 그거 알아?”
“말씀하시지요.”
“넌 아직 초대받지 못했어.”
“전 갈 자격이 됩니다.”
루시는 당당했다.
“절 제외하시면 보좌관을 그만두겠습니다.”
“너 협박이 많이 늘었어.”
“진심입니다.”
“알았어, 항복.”
상엽은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코드 원, 그런데 누님은 초대하지 않으실 겁니까?”
“해야지. 내가 직접 갈 거야.”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 그래서 지금 가려고.”
“준비하겠습니다.”
“준비는 무슨. 동생이 누나 만나러 가는데 그냥 가면 되지.”
상엽은 손을 저으며 차원문을 열었다.
* * *
절대신의 누나 정다혜.
그녀는 이 타이틀 대신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녀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다시 사는 인생이야.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돼.
그녀는 용기 있게 원하는 바를 밀고 나갔다. 그로 인해 지금은 전혀 다른 타이틀을 얻었다.
-평화와 봉사의 상징 정다혜.
인권 운동가로서 그녀는 법률을 공부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봉사가 먼저였다.
상엽에 의해 대부분의 대륙에서는 충분한 양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항상 가난하던 아프리카의 많은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제 논리는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착취는 사라졌다고 해도 값싼 임금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굶는 아이는 여전히 존재했다.
정다혜는 그런 곳에 머물며 낮에는 봉사 활동을 하고 밤에는 국제 변호사를 준비했다.
실제로 많은 사건들에 개입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녀로 인해 기득권층이 서민들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상엽의 누나라는 타이틀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이런 일을 찾아내고 나선 것은 정다혜의 의지였다.
오늘도 정다혜는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현지어에도 능통해진 그녀는 천막 수준의 임시 학교에서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정규 학교의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이 정규 학교 건설을 위해 지금까지 싸워 왔던 과정이 있기에 그녀는 유독 애착을 가졌다.
‘스스로 변해야 돼.’
동생에게 말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정다혜가 원하는 것은 집권층의 변화였다.
그들이 서민들을 돌봐 주는 선순환 구조가 되지 않으면 한 번의 이벤트 같은 도움은 금세 과거로 회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건설 현장에서 잡일을 도와주고 허름한 숙소로 돌아온 정다혜는 가볍게 몸을 씻고 일과를 정리했다.
버릇처럼 일기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찌는 듯한 더위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어?’
선선한 바람이 그녀를 상쾌하게 해 주고 있었다.
“상엽이야?”
“에이. 뭐 이렇게 금방 알아차려?”
“어서 와, 내 동생.”
정다혜는 이제 19살 소녀가 아니었다.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 된 정다혜는 대뜸 상엽을 꼭 끌어안았다.
“밥 안 먹어? 왜 이렇게 말랐어?”
“요즘은 이게 트렌드야. 신 노릇 한다고 유행도 모르지?”
“밥은 먹어. 굶고 다니면 강제로 데리고 올라가 버릴 거니까.”
상엽은 그녀가 앉아 있던 책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거.”
떡볶이와 튀김, 순대였다.
“내가 만든 거 아니야. 일부러 한국까지 가서 가져온 거야.”
“진짜?”
정다혜는 표정이 밝아지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같이 먹자.”
“그래.”
이럴 줄 알고 상엽은 충분한 양을 사 왔다.
절대신 상엽과 평화의 상징 정다혜 남매는 그렇게 허름한 집 안에서 그들만의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 * *
시간이 되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른 시간에 초대받은 이들은 일제히 초대장을 찢었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녹색 잔디가 깔린 정원이었다.
정원의 가운데는 연못이 있고, 우측은 하얀 모래사장과 시원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있었다.
바닷가 옆의 운치 있는 정원이었다.
넓은 정원에는 아담한 정원수들이 있고, 짧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나무보다 조금 작은 키의 운치 있는 집이 나타났다.
화려함을 버리는 대신 정갈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꾸며진 곳이었다.
“어서들 와!”
백사장 한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냄비가 수증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라면 200개! 신만 만들 수 있는 음식이지!”
그렇게 외치는 이는 상엽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동희가 특제 수프를 만들고 있었다.
절대신이 직접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익숙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커다란 주걱을 쥐고 있는 상엽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망치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친구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먹어! 그리고 놀아!”
상엽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상엽은 오히려 그저 즐겁기를 바랐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준비해 왔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레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큰 가방을 바닥에 놓더니 백사장과 잔디의 경계선에 음악을 틀 수 있는 도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준비를 마친 레나는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좋아! 놀자고!”
상엽이 소리쳤고 그제야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짊어지던 부담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파티는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은 특별했다.
누구보다 힘든 삶을 살았고 결국에는 이겨 냈다. 그리고 지금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그들의 삶이 가치가 있는 건, 언제나 즐거움을 좇고 누구보다 많이 웃는다는 점이었다.
“만득이 아저씨, 춤을 못 추면 수영이라도 해요.”
다른 이들이 모두 파티장에 들어갔지만 김만득은 그러지 못했다.
이에 상엽이 직접 손을 끌고 가서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요리사! 라면 부탁해!”
“걱정 말고 신나게 놀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될 테니까!”
“믿는다!”
그때부터 친구들은 백사장과 바다를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라면 먹어!”
그리고 드디어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누구도 선뜻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상엽만 알고 있었다.
상엽은 친구들의 반응을 보며 먼저 나서서 잘 익은 라면을 입에 가득 찰 정도로 집어넣었다.
맛있게 한 입을 먹은 상엽은 동희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세계 최고의 맛이야.”
“헤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동희의 특징을 모르는 레나와 아이리가 상엽을 따라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두 여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무 맛있는데?”
“정말 맛있어요.”
친구들의 표정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세계 최고 요리사가 끓인 라면이야. 먹어.”
그제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동희는 최고의 솜씨를 발휘했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라면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 레나는 음악을 더욱 크게 틀었다.
“상엽아.”
“응, 누나.”
“잠시 산책 좀 할까?”
한참 춤을 추던 상엽은 누나의 요청에 따라 파도와 백사장이 만나는 경계선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정다혜는 그저 바람을 만끽하며 걷기만 했다.
상엽도 누나를 위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옆을 지켜 주었다.
그러다 정다혜는 걸음을 멈추고 상엽을 보았다.
“누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내가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나서.”
“뭔데?”
정다혜는 상엽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살려 줘서 고맙고, 보살펴 줘서 고맙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동생이라서 너무 고마워.”
상엽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고백처럼 감사 인사를 한 누나를 꼭 안아 주었다.
“앞으로는 웃을 일만 있을 거야. 내가 그런 세상을 만들 거니까.”
“알아. 내 동생은 뭐든 최고니까.”
“누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알아?”
“아닐걸?”
정다혜는 상엽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멀리 보이는 친구들을 가리켰다.
“최고의 친구들이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증명하고 있잖아.”
“그런가?”
“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 친구들이 기다리겠어.”
정다혜와 상엽은 파티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오래 만난 친구처럼 서로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신의 품위나 인간의 체면은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나게 놀아 보자!”
상엽이 끼어들면서 파티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그들의 웃음은 어느새 음악 소리보다 커졌고 치열한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최선을 다해 즐겼다.
신과 인간이 섞인 파티는 그렇게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계속되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