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상엽은 일본으로 갔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지금까지 무법천지였다.
섬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막혔고, 누구도 그들을 돌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엽 역시 뱀파이어와의 싸움 이후로는 찾지 않았다.
탈출할 곳이 없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살아야 했고, 인간의 존엄과는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무법자들을 관리하고 왕처럼 군림하던 자들이 모습을 감췄다.
상엽이 절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당연히 자신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급 갓코인 유저로서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지배자들이 사라진 이후, 일본인들은 상엽을 기다렸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1억 명을 훌쩍 넘어섰던 일본의 인구는 이미 300만 명까지 줄어 있었다.
이젠 나라를 운영할 수조차 없는 수준인 것이다.
경제 인프라는 물론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은 오직 상엽의 손길만 기다렸다.
그런 곳에 상엽이 나타났다.
현재 300만의 일본 인구 중의 90퍼센트 이상은 오사카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모습을 감춘 지배자들이 선택했다.
해양 식량을 구할 수 있고, 그나마 건물들이 멀쩡히 남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오사카에서 사람들을 감시하며 왕처럼 군림했다. 그러다 보니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비정상으로 변했다.
인구의 95퍼센트가 여자였고, 그나마 살아 있는 남자들은 꼭 필요한 기술자들이었다.
이것은 지배자들이 남자였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남자들을 처리하고 오직 여자만 남겨 놓았다.
상엽은 그런 오사카를 찾아갔다.
도톤보리 거리를 걷자 대번에 시민들이 그를 알아봤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고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모두 길거리로 뛰쳐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감히 상엽의 앞을 막지 못하고 길을 만들 듯이 옆으로 늘어서서 눈물로 호소를 할 뿐이었다.
“살려 주세요!”
“아이가 굶고 있습니다!”
“저희들을 지옥에서 꺼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상엽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이 만든 길을 통과했다.
100명으로 만들어졌던 길은 점점 더 길어졌고 어느새 만 명이 넘는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호소는 강한 울림이 되어 공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상엽의 표정은 담담했다.
상엽이 지나간 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왔다.
그 인원은 자연스럽게 많아졌고 도톤보리의 거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상엽은 그런 시민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길을 걷다가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식스헤븐.
이제는 그 흔적조차 남지가 않았다.
‘아이리.’
상엽이 일본을 찾아온 이유였다.
행방불명되었던 그녀는 결국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상엽은 그녀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부활.”
상엽은 예정대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리를 부활시켰다.
아이리는 폐허 위에 청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상엽을 보았다.
상엽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으면 전부 알게 될 거야.”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강제로 주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리를 위해 상엽은 시간을 주었다.
아이리는 천천히 상엽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해.”
아이리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일이 영상처럼 펼쳐졌다. 아이리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절 잊지 않아 줘서.”
“널 어떻게 잊겠어?”
아이리는 울었다.
“마지막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아이리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여자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자들로 인해 상엽의 신경이 예민했기 때문이다.
“친구들하고 인사해.”
“네?”
아이리의 뒤로 수십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식스헤븐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그들도 상엽에 의해 부활했고 아이리처럼 지난 일에 대한 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내 뒤를 봐.”
상엽은 좀 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 상엽을 따라온 수만 명의 사람이 보였다. 이미 도톤보리의 거리를 가득 메워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너희들이 책임질 사람들이야.”
“네?”
“일본, 네가 맡으라고.”
아이리는 선뜻 이해를 하지 못했다.
“식스헤븐과는 다를 거야. 그래도 너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정확하게는 이곳에서 상엽이 아는 자가 없었다.
상엽은 힘이나 그동안의 경험보다는 사람을 상대하는 마음을 우선시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리는 훌륭했다. 다만 술집에서 남자를 상대했던 과거는 그녀에게 죄책감이 될 수 있었다.
“전 자격이…….”
“내가 만든 자격이야.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해?”
상엽은 아이리 대신 뒤에 선 일본인들을 보았다.
“지금부터 아이리가 당신들의 희망입니다.”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아이리를 향했다. 그들 중에 누구도 그녀의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현재야. 그리고 현재가 안정되면 미래를 원할 거야. 과거는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아이리는 여전히 혼란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상엽을 믿었다.
“해 볼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도와줄 사람을 좀 더 모아 줄게.”
상엽의 기억 속에 또 다른 일본인이 있었다.
“거친 녀석들이니까 잘 다뤄야 할 거야. 필요한 힘은 내가 줄 테니까.”
“데스문인가요?”
“좋아. 그런 모습을 원했어.”
총명한 아이리가 부활했다.
“네 공식적인 업무는 내일부터야. 무슨 뜻인지 알아?”
“저에게 하루를 주시겠어요?”
“넌 그럴 가치가 있는 여자잖아.”
“고마워요.”
아이리는 상엽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 휴가가 얼마 없어.’
라니르가 매일 상엽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업무가 밀리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선발된 신들과 다 같이 넘어갈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상엽은 이런 변명으로 시간을 벌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신의 대륙으로 가야 한다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빨리 정리하고 자주 놀러 와야지.’
신의 대륙에 시스템만 구축하면 상엽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의무를 다하고 놀 생각이었다.
“자, 떠나기 전에 말해. 당장 필요한 게 뭐야?”
상엽의 질문에 아이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자신 있게 말했다.
“깨끗한 물과 음식, 그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씨앗을 주세요.”
그녀의 말에 상엽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리자 도톤보리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무너진 도시가 가루로 흩어지고 주변이 노란 벼가 익은 비옥한 토지로 변했다.
중앙의 일정 지역의 건물들은 단숨에 복구가 되어 숙소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고, 과일과 빵이 가득 쌓인 창고가 솟아올랐다.
그 모습에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해결된 것이다.
“모두 잘 들으세요.”
상엽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제가 여기 온 건 아이리 때문입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절대 여기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이리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 주었다. 지금까지 일부러 일본인들의 절규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던 이유다.
“자, 이제 시간을 아껴 볼까? 하루밖에 없어.”
상엽은 아이리를 안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날, 다시 상엽과 아이리를 본 사람은 없었다.
아이리 다음은 마루나였다.
아이리와 하루를 보낸 상엽은 데스문의 주요 인물들을 부활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마루나를 살렸다.
그녀에게 한국을 맡길 수는 없었다. 아이리와는 성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 보고 싶어요.”
“데이트 좋지.”
상엽은 한국에서도 하루를 보냈다.
마루나와 하루를 보낸 상엽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아직 복구가 전혀 되지 않은 금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정된 한 명을 살렸다.
“안녕하세요.”
금산에서 처음 만났던 블랙 유저.
“만득이 아저씨.”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지만 부활도 약속한 묘한 관계였다. 이제 갓코인의 힘이 사라져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강렬한 눈빛만큼은 여전했다.
“결국 네가 승리한 건가?”
“네. 제가 이겼어요. 그리고 절대신이 되기도 했어요.”
“절대신이라…….”
김만득은 다른 이들과 달리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제 블랙과 화이트는 없어요. 여전히 절 원망하나요?”
상엽의 질문에 김만득이 웃었다.
“씁쓸해 보이네요.”
“너와 마지막으로 싸우던 당시에 난 후회했다.”
“알아요.”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지. 가족의 목숨이 걸려 있었으니까.”
“그것도 알아요.”
간단한 대화가 오가자 김만득은 상엽의 정면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을 보는 상태에서 상엽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진심과 당당함이 동시에 있었다.
“이제 서로 한 번씩 살려 줬어요.”
“동등하다고 하기에는 민망하군.”
“집으로 돌아가세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김만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한마디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었다.
김만득은 자신의 집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엽이 이를 찾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고맙다.”
“왠지 어색해져 버렸네요. 예상하긴 했지만. 절대신이 되어도 이런 부분은 마음대로 되지 않나 봐요.”
절대신이 되고 유일하게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상대의 진심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진심이 아니라 세뇌는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스스로 우러난 진심은 신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약속하지.”
상엽의 곁을 떠나기 전에 김만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내 목숨은 네 것이다.”
“원하던 선물은 아니네요.”
“지금은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다.”
“아저씨다운 말이에요. 오늘은 그걸로 만족할게요.”
상엽은 다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김만득 앞에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나타났다.
“필요한 것들은 트렁크에 있어요.”
“감사히 받지. 이것들까지 이제 네 것이니까.”
김만득은 목숨을 상엽에게 맡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상엽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네.”
친구와 칼을 겨눈 기억은 상엽에게도 아픔이었다. 그에겐 김만득뿐만 아니라 여러 아픔이 있었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으니까.”
사람들을 살리는 것은 상엽에게도 치료의 과정이었다. 승리자라고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쓸 차례지.”
상엽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떠올랐다.
신의 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호주의 외곽에는 창고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사각형의 건물이 있었다.
기둥 없이 컨테이너처럼 세워진 건물은 창문도 없이 모든 벽이 하얀색이라 들어서는 순간부터 현실과 동떨어지는 느낌을 주었다.
“사하르, 같이 먹자.”
책상 위에 올려진 냄비를 사이에 두고 상엽과 사하르가 마주 앉았다.
사하르는 절대신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불경이라서 거절했지만 상엽의 거듭된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라면이잖아. 예의 따위 버려.”
결국 사하르와 상엽은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어때?”
“역시…….”
사하르는 감탄했다.
“왜 제가 만들면 이런 맛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경험이야. 그리고 라면을 끓일 때의 절실함이지. 넌 돈 없는 시절에 라면을 끓여 보지 못해서 진짜 맛을 내지 못하는 거야.”
“영원히 안 된다는 것입니까?”
“걱정하지 마. 너도 이제 신이니까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사하르는 처음으로 신이 된 것에 만족했다.
그들이 라면을 먹는 사이, 하얀 바닥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러더니 블랙 해머 한 명과 온몸이 묶인 사내가 함께 나타났다.
“수고했어. 와서 라면 먹고 다시 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마법진이 나타났고, 순식간에 백 명이 넘는 자들이 붙잡혀 왔다.
그렇게 늘어난 인원은 결국 천 명을 넘어섰다.
“다들 수고했어.”
블랙 해머들과 실컷 라면을 먹은 상엽은 뒤늦게 붙잡혀 온 자들을 보았다.
“그냥 조용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전쟁의 잔당들이었다. 그들 모두 갓코인 유저였고 지금까지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붙잡혀 온 자들은 화이트와 블랙을 가리지 않고 모두 상엽의 반대편에 섰던 자들이었다.
“눈에 띄는 몇 명이 있네.”
상엽은 자신과 직접 맞섰던 길드의 수뇌부들을 알아봤다. 이를 본 상엽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펑! 펑!
두 명의 사내가 쓰러진 그대로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 버렸다.
“자, 심판의 시간이야.”
그 말에 천 명이 넘는 자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