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블랙 해머들은 모두 신이 되었다.
그들 개인적으로는 신이 아니라 상엽에 대한 신도가 된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루시의 계략이기도 했다.
-그들은 코드 원을 절대적으로 신봉합니다. 신이 아니라 신도가 되라는 느낌으로 접근하시면 됩니다.
루시는 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녀의 말대로 신의 대륙에서 상엽을 도와주는 신도가 되라고 설득하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지옥은 같이 가야지.”
“동생, 나한테 하는 말이야?”
“아, 들렸어? 혼잣말인데.”
상엽은 복구가 한창인 대한민국 서울에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10층 건물은 예전처럼 헤븐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건물은 예전 흑점 길드의 본부였고 다시 박광신의 소유가 되었다.
“이왕 들었으니까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마지막 전투를 함께했던 이들은 모두 신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상엽은 박광신을 만나서 협상에 나섰다.
“형, 지옥에 함께 가자.”
“부탁이야, 명령이야?”
“제안이야.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잖아.”
“하하! 그래도 동생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있네.”
“같이 가는 거지?”
“알았어. 그런데 부탁이 있어.”
“뭔데?”
“흑점 길드원들, 부활시켜 줄 수 있어?”
“거래 조건이야?”
“아니. 들어주지 않아도 지옥은 같이 갈게.”
흑점의 길드장이었던 강청은 이미 부활했다. 하지만 닷새 만에 떠나 버렸다.
뱀파이어가 되어서 길드원들을 죽였던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알았어. 부활시켜 줄게.”
상엽은 박광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마워. 동생이 어제 한 연설 때문에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상엽은 많은 이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다고 했다.
“형은 예외야. 형 외에도 전쟁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전부 예외야. 목숨을 걸었는데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
“훌륭한 융통성이네.”
“내가 그걸 참 잘하잖아.”
“그럼 나도 선물을 줘야겠지?”
그 한마디에 상엽의 표정이 기대로 물들었다.
“3층으로 가 봐.”
“설마…….”
“절대신을 능가하는 상상력이 있을 거야. 이건 내가 잘하는 거지.”
“형, 내가 이 말을 참 오랫동안 안 한 거 같아.”
상엽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
박광신의 웃음을 보며 상엽은 3층으로 향했다.
그곳은 어두웠다.
별빛조차 없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물론 상엽의 눈은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툭.
조명 하나가 떨어지듯이 바닥에 닿았다.
작은 원으로 떨어진 빛은 정확히 침대 하나를 비추었다.
붉은 실크 커버의 침대 위에는 붉은 입술과 길게 뻗은 눈매가 도드라지는 여성 한 명이 옆으로 누워 상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붉은 실크 가운은 마치 침대 전체를 그녀의 옷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온통 붉은색 사이로 뻗은 하얀 살결은 상엽의 심장 박동을 올리는 데 충분했다.
툭.
끝이 아니었다. 붉은 침대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또 하나의 빛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하얀 의자였다. 세 명은 충분히 앉을 것 같은 의자 위에는 하얀 천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여신과 같은 느낌의 은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은발 여인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고 곱게 모인 손 사이에는 하얀 백합이 들려 있었다.
툭.
물이 채워진 투명한 욕조에서 젖은 머릿결만큼 촉촉한 눈빛의 서양 미녀가 있었다.
툭. 툭. 툭.
빛은 시간을 두며 떨어졌고 전혀 다른 색감과 느낌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총 12개의 빛과 12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상엽을 중심으로 정확한 간격의 원을 만들었다.
그 상태에서 마지막 빛이 떨어졌다.
그것은 상엽과 주변에 그림을 그렸다.
‘시계.’
그곳은 시계의 방이었다. 그리고 여인들은 시간을 의미했다.
째깍.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시계는 12시에서 시작했고 시간에 따라 밝혀져 있던 여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임 어택.’
12시간의 타임 어택.
상엽은 상상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언제나 목표를 가지고 살았던 상엽이기에 지금의 평화는 가끔씩 지루하기도 했다.
그런 지루함이 편안함으로 바뀌는 장소가 있었다.
절대신이지만 여전히 인간이기에 우거진 숲을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단숨에 뛰어넘을 능력이 있음에도 상엽은 천천히 숲을 걸었다.
“상엽아, 안녕.”
그가 산책을 하듯 도착한 곳은 설악산이었다.
상엽을 본 동희는 언제나 그렇듯이 밝게 인사를 했다.
“밥 먹었어?”
“아니. 밥 좀 줄래?”
“헤헤. 알았어.”
상엽이 처음으로 먼저 식사를 요청했다. 신이 난 동희는 대화를 멈추고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절대신인 상엽은 음식의 맛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동희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상엽은 동희가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그대로 먹었다.
“어?”
동희가 끓여 준 정체 모를 수프를 먹은 상엽은 놀란 눈으로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맛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헤헤. 말했잖아. 맛도 연구를 한다고.”
동희의 음식은 맛있었다. 그것도 상엽이 먹어 본 어떤 음식보다 훌륭했다.
“몸에는 조금만 좋아. 특별한 기능을 전부 뺐거든.”
“아…….”
순수한 음식이었다. 재료가 가진 영양소 외에는 어떤 첨가물도 없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잖아.”
동희의 말에는 씁쓸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일단 다 먹고 이야기하자. 너무 맛있어.”
상엽은 꽤 많은 양임에도 모든 그릇을 완전히 비웠다.
“헤헤. 한 번씩 이렇게 만들어 줄 걸 그랬나?”
“그랬으면 널 더 사랑했을 거야. 지금도 넘칠 만큼 사랑하긴 하지만.”
“알아. 맛없는 음식도 전부 맛있게 먹어 줬잖아.”
“알고 있었어?”
상엽의 질문에 동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혀 있어.”
그 말에 상엽은 처음으로 동희가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음식의 신이 되기에 충분하겠는데.”
상엽은 일부러 농담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은 싫어.”
“제하드도 신이 되고 싶어 했잖아.”
동희는 신을 싫어했다. 상엽도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동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난 이미 신이 됐고 이제 그걸 포기했어.”
“무슨 뜻이야?”
“보여 줄까?”
동희는 상엽을 연구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연구실에는 1미터 신장의 특이한 생명체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구실 안에서 책을 보거나 잠을 잤고, 때로는 연구 도구로 뭔가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창조한 생명체야.”
동희는 생명을 창조했다. 제하드의 마지막 연구를 완성한 것이다.
“포기했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이제 연금술은 그만둘 거야.”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돼?”
“원래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어. 그리고 생명을 창조한다는 게 무서워졌어. 저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가 않거든.”
동희는 다섯 명의 생명을 창조했다.
창조는 곧 책임을 의미했다. 적어도 동희에겐 그랬다.
“난 엄마 아빠처럼 안 해야지. 이 아이들과 담비들을 키우면서 살 거야.”
상엽은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말이 있었다.
“동희야, 엄마 아빠 살려 줄까?”
상엽의 지인들이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활시켜 주었다.
블랙 해머 개개인의 가족은 물론, 친구나 친척들까지 원하는 자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어차피 인간계에 인구가 필요했고, 이런 이유가 없더라도 전우들이 원하는 건 조건 없이 들어주는 게 상엽의 방침이었다.
앞으로도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 한 명, 동희의 가족은 부활시키지 않았다. 동희가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를 통해 연락을 받았음에도 동희는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상엽이 직접 물어보러 온 것이다.
“아니.”
동희는 이번에도 부활을 부탁하지 않았다.
“알았어. 대신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줄 테니까.”
“헤헤. 고마워. 그럼 지금 부탁해도 돼?”
“말해.”
“섬 하나만 줘. 거기 물도 만들어 주고, 과일나무랑 비옥한 땅도 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 아, 산도 있어야 돼. 담비들도 갈 거니까.”
동희는 혼자만의 공간을 말했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와 담비들이 살아갈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직접 재료를 기르며 음식 연구를 할 계획이었다.
동희는 신이 나서 자신의 계획을 말했고 상엽은 묵묵히 들어 주었다.
‘신이 되라는 말은 못 하겠네.’
상엽은 동희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자 그 꿈을 깰 수가 없었다.
“전부 해 줄게. 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헤헤. 역시 내 친구.”
친구라는 단어를 상엽은 참 오랜만에 들었다.
“그래, 친구.”
둘은 서로 주먹을 맞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준비해 줄게.”
“고마워. 그리고 안 바쁠 때, 언제든 찾아와. 친구들의 쉼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만들 거야.”
“훌륭한 생각이야. 다들 좋아할 거야.”
“헤헤.”
훌륭한 요리사가 있는 별장이었다.
상엽과 친구들에겐 고향 같은 곳이 될지도 몰랐다.
그들만의 작은 섬.
상엽은 왠지 신의 도시보다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누나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집은 상엽이 누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것이었다.
예전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집 안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가구와 집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누나, 사람 시키면 되잖아.”
“그냥 심심해서.”
19살의 누나.
그녀는 이제 겨우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연예인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었던 그녀는 동생에 의해 부활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 정리가 좀 되거든.”
“같이 해.”
상엽의 능력이라면 영원히 먼지가 들어오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나를 위해 함께 청소 도구를 잡았다.
그래 봤자 이미 거울처럼 깨끗한 바닥에서는 작은 얼룩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익숙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응.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신이 되는 건 아닌 거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누나만큼 예쁜 여신도 없을 텐데.”
“모든 직책에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앉아야 돼. 능력이 부족하거나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힘들어져.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건 공부하면 돼. 사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지식은 내가 전달해 줄 수 있어.”
상엽은 무엇이든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블랙 해머들에게도 신에 대한 지식들을 모두 전달했다. 그저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상엽에겐 숨을 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상엽아, 누나는 그냥 예전처럼 살면 안 될까?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내고, 한 계단씩 올라가고. 그리고 네가 부끄럽지 않게 봉사 활동도 많이 하고.”
“날 위해서 살 필요는 없어.”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널 위하는 모든 건, 내 삶의 일부분이야.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어.”
상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나한테 아주 즐거운 일이야.”
“알았어. 앞으로도 많이 챙겨 줘.”
“잔소리도 많이 할 거야.”
“얼마든지.”
“그럼 이제 우리 동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줄래?”
청소 도구를 손에서 내려 둔 누나는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았다.
“좋아. 웬만한 드라마보다 재미있을 거야.”
“솔직한 게 더 좋아. 과장하지 말고, 숨기지도 말고.”
“약속할게.”
상엽도 거절하지 않고 바로 옆에 앉았다.
“잠깐만.”
누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와 과일을 깎아 테이블에 내려 두고는 기대에 찬 눈으로 상엽을 보았다.
“내 동생이 정말 어른이 되어 버렸구나.”
“나 이제 곧 서른 살이야.”
“누나는 아직 열아홉 살인데.”
“이 정도 특별함은 괜찮잖아.”
상엽은 이 부분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힘들어할 때는 안타까웠고 극복해 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해 봐.”
“뭘 듣고 싶은데?”
“내 동생의 여자들.”
“응?”
“어른이 된 내 동생이 어떤 여자와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게 제일 궁금해.”
상엽은 당황하면서 물었다.
“솔직히 말하겠다고 내가 약속했지?”
“응.”
“그거 취소.”
상엽은 가족끼리도 비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