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크크. 일이 편하게 됐군.”
데빌은 이런 상황이 싫지 않았다.
그는 200명의 신들에게 협공을 당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하나하나의 신은 혼자서 처리할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협공으로 무너지던 당시에 억울함이 더했다.
“네놈만 처리하면 내가 절대신이다.”
이제 상황이 간단해졌다.
“미리 말해 두지. 네가 살던 차원의 인간들은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될 것이다. 너와 관계가 된 자들은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이며, 가장 가까웠던 여자들은…….”
“그 새끼, 참 말 많네.”
상엽은 데빌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절대신은 내가 될 거야. 그리고 내가 절대신이 되어도 네가 있던 마계는 내버려 둘게. 난 너보다는 훨씬 관대한 존재라서 말이야.”
“크크.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는군. 인간은 항상 그런 식이지.”
“너랑 대화하는 거 재미없어. 이제 그만 시작할까?”
상엽은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이야.’
그 역시 데빌과 같은 생각이었다.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대회전.
마지막 전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데빌의 근처로 50만의 병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반면 상엽의 군대는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데빌은 자신의 위엄을 보여 주고 싶어 했고, 상엽은 실리를 따졌다.
그 결과는 첫 충돌로 드러났다.
우우웅!
상엽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하늘로 뛰어올라 파괴의 일격을 날렸다.
대화를 하며 다섯 번이나 압축한 거대한 해머가 나타나자 데빌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지만 데빌은 피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상엽도 예상을 했지만 휘두르는 해머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드디어 둘의 힘이 처음으로 부딪쳤다.
데빌은 떨어지는 해머를 보며 거대한 낫을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순간 단두대와 같은 날카롭고 거대한 기파가 생성되어서 떨어지는 해머를 향해 날아갔다.
쩌어엉!
파괴의 일격과 데빌의 기파가 공중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상엽으로서는 자신감이 있는 한 방이었다.
예상대로 압축된 파괴의 일격은 상승하는 기파를 유리처럼 깨트려 버렸다.
낫의 파편은 파괴의 일격이 만든 기운에 의해 바닥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됐어.’
상엽이 원하는 건 데빌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첫 공격의 충돌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을 대규모로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파편이 원하는 방향으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화염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낫이 만든 파편은 화염으로 인해 완전히 소멸해 버렸고 파괴의 일격을 모두 집어삼킨 화염은 상엽까지 덮쳤다.
‘망할.’
데빌도 이를 예상한 것이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기고 연속 공격으로 우위를 점했다.
결국 상엽은 화염을 피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한 방에 모든 걸 걸진 않았다.
히이잉!
지옥마가 나타나 상엽을 태우고 데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다 한순간 소멸해 버렸다.
지옥마 덕분에 충분히 가속도를 붙인 상엽은 데빌의 목을 향해 날아가다가 팔각 대시로 방향을 바꿨다.
데빌의 거대한 덩치는 힘의 근원이지만 상엽의 입장에서는 공격할 목표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데빌도 이를 알기에 직접 검으로 막기보다 방어막과 반격을 동시에 진행했다.
우웅!
붉은 화염의 방패가 상엽의 앞을 막았고, 데빌의 낫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검날이 방어막을 크게 돌아 상엽을 덮쳤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
상엽은 애초에 데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상엽의 이동 방향이 갑자기 지상을 향하며 최고 속도로 떨어졌다.
콰콰쾅!
병사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곳에 상엽이 떨어졌다. 한 지점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 앞에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흩어졌다.
무려 3만 명의 병사가 소멸했지만 상엽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이다.
데빌은 상엽이 바닥을 향하자 곧바로 다리를 들어 상엽을 밟으려 했다.
그 행동이 워낙 빨라서 상엽은 피할 틈을 찾지 못했다.
유령 걸음.
찰나의 순간이었다.
상엽이 유령 걸음을 쓰며 뛰어올랐고 아슬아슬하게 데빌의 발등에서 다시 나타났다.
‘기회.’
위기 뒤에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다.
상엽은 바로 아래 나타난 데빌의 발등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콰쾅!
뜻밖의 기회는 확실한 효과로 나타났다.
악마의 손길까지 뿜어낸 한 방에 데빌의 발등이 폭발하듯이 터져 버렸다.
공격을 확신했기에 보호막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고, 단단한 피부라 해도 상엽에겐 이를 뛰어넘을 힘이 있었다.
크아!
데빌은 비명을 질렀고 순간 엄청난 화염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쳇.’
신을 죽이는 공식에 의해 데빌이 소멸될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데빌은 타격을 당하는 순간, 스스로 꼬리를 자르듯 발을 폭발시켜 버렸다.
이미 이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이다.
상엽은 좀 더 타격을 하고 싶었지만 데빌이 뿜어낸 화염을 버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며 뒤로 물러났다.
“별거 아니네.”
상엽의 조롱에 데빌의 분노한 눈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동공을 시작으로 데빌의 몸이 모두 불길에 휩싸였고 양손에 쥔 거대한 낫에서는 불덩이가 용암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은 버틸 수 있어.’
상엽은 데빌의 불길이 두렵지 않았다.
불에 대한 내성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데빌이 만들어 낸 지옥의 불길은 상엽의 피부를 태울 만큼 뜨거웠지만 단숨에 녹일 정도는 아니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봉인된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거야?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상엽은 오히려 데빌의 분노를 자극했다.
화르르!
예상대로 데빌은 화를 참지 못하고 두 개의 낫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엽이 예상치 못한 현상이 일어났다.
낫이 만들어 낸 화염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푸른 하늘이 가려졌고 이글거리는 구름이 하늘에 자리를 잡았다.
불의 구름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확장을 하더니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치익. 치익.
불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불길이 그의 병사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상엽은 비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작지만 따끔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오래 지속되면 위험하겠어.’
상엽은 버티지 않고 방어 스킬을 활용했다. 그러자 불의 비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때, 데빌이 두 개의 낫을 앞에서 교차했다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었다.
그 순간, 상엽과 닿아 있던 공기에 불이 붙었고 문이 열리듯 양쪽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한 공간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 공격은 상엽의 몸에서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상엽은 단순히 방어벽으로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며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그가 밟고 서는 바닥 역시 화염에 휩싸였다.
하늘과 땅이 모두 불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불놀이라니. 흥미롭네.”
상엽은 데빌이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몸을 낮추며 불길에 몸을 숨긴 것이다. 그리고 불의 정수를 이용해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
데빌은 그때부터 상엽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찾아라!”
데빌은 거칠게 낫을 휘둘러 상엽이 있던 자리에 꽂았다. 하지만 상엽의 흔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데빌은 땅의 불길을 거두어들였다.
“찾았습니다!”
데빌은 원하던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악마의 군대가 집결한 곳이었다.
화염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공간을 뒤트는 커다란 원형 기파가 퍼져 있었다.
“피해라!”
데빌이 소리쳤지만 이미 원형의 기파는 공간을 파괴하며 상승 기류를 만들고 있었다.
크아!
악마의 군대가 단숨에 비명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려 5만에 이르는 병사들의 몸이 가루처럼 부서지더니 결국에는 소멸해 버렸다.
화가 난 데빌은 손을 뻗으며 상엽의 몸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상엽의 주변에서 불길이 튀어나와 사슬처럼 몸을 묶었다.
“어설프기는.”
챙!
상엽은 사슬을 힘으로 풀어내고 오히려 반격을 위해 다가온 악마 병사들을 향해 다시 해머를 휘둘렀다.
쾅!
한 번의 폭발 이후에는 소음이 변했다.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상엽이 데빌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악마 병사들을 도륙했다.
그러다 악마 병사들이 방어진을 형성하자 다시 인간이 되어 해머를 꽂았다.
콰쾅!
데빌은 상엽을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너무 얕봤군.’
그는 수하들의 목숨을 부지하려 강력한 스킬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악마 병사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5천 명만 모이면 신 하나를 압도하는 병사들이었다. 그런 능력을 너무 믿었고, 상엽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다.
“후우. 이제 냄새나는 놈들은 모두 치웠고.”
결국 상엽의 손에 10만의 악마 병사들이 모두 소멸했다.
남은 병사는 신의 병사 35만.
아직 엄청난 숫자가 남았지만 상엽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합지졸이야.”
신의 병사들이 듣는다면 억울할 만한 평가였다.
이레라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도 신의 대륙에서는 좋은 대우를 받는 고급 병사들이었다.
“크크크!”
데빌은 악마의 군대를 모두 잃자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놈 말대로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잔 모양이군.”
“또 대화하자고?”
상엽은 말을 받아 주는 척하면서 데빌의 발을 보았다.
‘일부러 시간 끄는 게 아니야.’
발은 이미 완벽히 회복되어 있었다. 피부를 터트렸지만 뼈까지 부러트리진 못한 것이다.
모든 힘을 모아 내려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회복이 너무 빠른데.’
상엽은 뭔가 계산이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발등을 타격할 당시만 해도, 계획을 수정해서 데빌을 먼저 소멸시킬 것도 고민했던 그였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데빌은 갑자기 상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까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싸우던 데빌이 아니었다.
방어막을 거둔 그는 두 개의 거대한 낫을 버리고, 각각의 손에 검을 쥐었다.
한 손에는 불, 다른 한 손은 서리가 낀 검이었다.
우웅!
데빌이 휘두른 불의 검은 상엽이 지금까지 상대한 어떤 검사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상엽이 놀라서 몸을 피하자 화염의 검에 있던 불길이 원반 형태로 뻗히며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불길은 더 이상 수하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노예들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
챙!
데빌은 여유롭게 말까지 하며 얼음의 검을 휘둘렀다.
화염의 검이 만들어 낸 기파가 워낙 강렬해서 반격을 생각하지 못했던 상엽이 다시 다가오는 검을 해머로 막아 냈다.
그런데 그 힘에 밀려 몸이 떠올랐고 200미터나 날아가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바닥에 내려서려 했다.
그런데 바닥에서 돌기 같은 얼음 기둥이 솟더니 미사일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채채챙!
상엽은 아르마딜로의 보호막으로 솟아오르는 얼음 기둥을 막아 냈다.
그런데 그 힘만으로도 아르마딜로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말았다.
“크크크!”
겨우 방어에 성공하고 바닥에 내려선 상엽은 달라진 데빌의 모습을 보았다.
몸을 세로로 나누어 절반은 화염, 나머지는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기괴한 모습의 거인이 뿜어내는 기운은 자신들의 수하들마저 고통스럽게 했다.
“시끄럽군.”
데빌은 보란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 한 방에 10만 명의 수하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이어진 얼음의 검에 모두의 몸이 터져 버렸다.
이를 본 상엽은 공포 대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넌 대장이 될 자격이 없어.”
“절대자에게 수하는 그저 노예일 뿐이다.”
“그게 널 죽일 거야.”
“감히 충고라도 하겠다는 건가?”
데빌은 다시 한번 상엽을 향해 뛰었다.
‘빠르다.’
상엽은 반격의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데빌이 공격을 하기 전에 미리 움직여 위험을 피했다.
그런데 상엽의 이동을 본 데빌이 검을 양쪽으로 뻗으며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순간 불의 회오리와 얼음 폭풍이 형성되며 데빌의 곁에 머물렀다.
데빌은 양쪽에서 형성된 두 개의 기운의 중심으로 다시 검을 찔러 넣었다.
쾅! 쾅!
두 개의 기운이 폭발과 동시에 수만 개의 파편이 되어 상엽을 덮쳤다.
‘방패.’
상엽은 어쩔 수 없이 방패를 들어 이를 막았다.
파편은 무사히 막아 냈지만 이것이 데빌에겐 큰 기회가 되었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데빌은 상엽의 방패를 향해 화염의 검을 뻗었다.
쩌어엉!
방패는 화염의 검을 버텨 냈다. 그런데 상엽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엄청난 한기가 상엽을 덮쳤다.
‘부서질지도 모른다.’
상엽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때, 데빌의 얼음 검이 방패를 때렸다.
잠시 모든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방패는 다행히 얼음 검을 막아 냈다.
쩌적!
그런데 방패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균열을 일으켰다.
챙!
결국 모든 것을 막아 내던 방패가 깨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