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들이 가장 경멸하는 악마들의 대장이었다.
추방된 신.
데빌은 신들의 대륙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악마를 모아 침공에 나섰다.
그도 신이었기에 자격은 충분했고, 대륙을 휩쓸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천상의 방어전’이라고 기록했다. 철저하게 이긴 자에 의해 남겨진 기록이었다.
그리고 최초로 대륙의 신들이 모두 같은 편이 되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오직 데빌 하나를 잡기 위해 살아남은 모든 신이 힘을 합친 것이다.
그렇게 데빌은 제거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신의 제단 아래에 봉인되어 있었다.
기록과 달리 데빌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어서 봉인을 선택한 것이다.
데빌은 그만큼 강력한 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신의 선택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뭐야?”
결전을 준비하던 상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데빌의 붉은 눈이 사라지면서 상승하던 기류가 멈춘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구덩이에서 발생하던 모든 현상이 사라졌다.
“도망간 거야?”
데빌은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데빌 대신 라니르가 곁에 나타났다.
“악마 군대를 찾으러 간 것 같아요.”
“군대라니?”
“데빌이 침공할 당시에 함께했던 군대예요. 데빌이 봉인되면서 갑자기 사라졌어요.”
“어느 정도 실력이었어?”
“데빌에게 죽은 신 중의 절반은 군대에 당했어요.”
죽은 신의 절반은 데빌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군대의 힘만으로 쓸어버린 것이다.
“모든 악마들이 함께했으니까요.”
상엽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악마를 떠올렸다. 암흑의 신전에 있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많다는 거지?”
상엽은 그 상상을 하자 이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도 군대가 필요하겠네.”
“그렇습니다. 이레라핌들을 빠르게 합류시켜야 합니다. 그들이 데빌의 편에 설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진행해.”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엽은 신의 군대를 모두 모으기로 했다.
파구스는 10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
상엽은 그들 누구도 직접 처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흩어졌고 새로운 주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을 가진 상엽은 그들을 지금까지 받아 주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 나면서 병사들은 대륙 전체로 흩어져 할 일을 잃었다.
그런데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데빌의 부활.
소문은 곧 사실임이 밝혀졌다.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던 병사들만 50만 명에 달했고 가장 강력한 이레라핌 종족 출신은 5만 명 정도였다.
상엽은 이레라핌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약한 녀석들이 끼어들 싸움이 아니야. 강한 녀석들만 모아.”
이것이 상엽이 내린 명령이었다.
“데빌이 어디 있는지도 찾아내.”
“바로 제거하실 작정이십니까?”
“괜히 귀찮게 오래 끌 거 없잖아. 어차피 싸워야 되면 군대를 모으기 전에 끝내야지.”
상엽의 의도는 확실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의 대륙에서 상엽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99퍼센트의 힘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남은 1퍼센트가 바로 신의 제단이라는 공통 영지였다.
데빌을 제거하면 그 남은 1퍼센트도 상엽의 것이었다. 드디어 절대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엽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군대를 모으면서 데빌을 찾던 상엽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째서 찾을 수가 없는 거지?”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우리 편에 배신자가 있어.”
상엽의 정보력이 통하지 않는 곳은 바로 아군으로 합류한 신들의 영지뿐이었다.
그들의 힘을 보장해 주었기에 보고를 통해 듣고만 있었다.
“모든 권한을 줄 테니까 아군의 영지를 수색해.”
상엽은 사안이 중대한 만큼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이 시발점이 되었다.
아군으로 합류했던 신 중의 다섯 명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데빌을 숨겨 주었던 신들이었다.
“일이 재미있게 되는데?”
“쉽게 보실 일이 아닙니다.”
“알아. 짜증 난다는 뜻이야.”
“죄송합니다.”
라니르의 말투도 점점 딱딱해졌다. 그런데 신들의 이탈은 다섯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
라니르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도 어느 순간 데빌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상엽에게 합류했던 열 명이 모두 등을 돌린 것이다. 남은 신은 라니르가 유일했다.
“난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
“전 남았어요. 그리고 인원은 적지만 정예라고 할 수 있는 5만 명의 이레라핌이 있어요.”
라니르는 이번 사건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어설픈 병사들은 모두 포기하고 오직 이레라핌만 접촉해서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것이다.
같은 종족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서로 연결된 선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들 중에는 데빌을 선택하기 직전에 있던 자들도 있었다. 그런 집단까지 전부 빼내 온 것이다.
“처음에 거절했던 게 미안해지네.”
“많은 보장을 약속했습니다.”
“잘했어.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상엽은 그들로 만족하며 라니르를 보았다.
“너한테도 기회를 줄게.”
“제 충성심을 의심하진 말아 주세요.”
“객관적으로 봐. 내가 이길 확률은 크지 않아.”
“작은 확률만 있다면 전 군주님께 걸겠습니다. 작은 확률에 배팅하는 것이 얻는 것도 큰 법이니까요.”
“위로야? 진심이야?”
“둘 다입니다.”
상엽은 라니르가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너 관능의 신 맞아? 도박의 신 같은데?”
“도박의 신은 군주님에 의해 이미 소멸했어요.”
“데빌이라는 놈도 그렇게 될 거야.”
상대의 힘이 급격히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엽은 당장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신의 대륙에 남아 있던 모든 힘이 데빌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상엽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라니르.”
“네, 군주님.”
“악마들이 여길 침공할 때, 넌 어떤 기분이었어?”
라니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솔직히 대답했다.
“주체성을 침략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신들이 같은 감정을 느꼈기에 하나로 뭉쳤습니다.”
“너도 그 싸움에 참여했겠지?”
“그렇습니다. 200명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상엽은 고개를 끄덕이다 라니르를 보았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났네.”
“그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은 군주님과 데빌 외의 다른 신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맞아. 아주 다르지. 그래서 너한테 미리 말해 주는 거야.”
상엽은 웃으며 라니르에게 말했다.
“이제 인간이 신의 대륙을 점령할 거야. 인간의 군대가 승자가 되는 거지.”
인간 군대.
신의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악마와 인간의 대회전이 예고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상엽은 신의 대륙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블랙 해머에게 전했다.
블랙 해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합류를 결정했다.
이로써 신의 대륙을 휩쓸었던 악마의 군대와 갓코인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의 군대들이 서로 칼을 겨누게 되었다.
상엽의 초대만으로도 블랙 해머는 자격을 얻고 신의 군대에 합류했다.
95명의 블랙 해머와 다섯 명의 아마존 전사, 송연지, 사공강, 적설까지 10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악마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지만 상엽은 자신감이 있었다.
‘이미 전부 신급의 능력을 가졌어.’
동희의 프로젝트가 모두 끝난 그들은 전투에서만큼은 하급 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개개인의 능력은 하급 신이라고 해도 그들의 전략과 전술, 개성을 감안하면 그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지막 전쟁이 될 거야. 이 싸움이 끝나면 우리가 원치 않아도 평화가 찾아오겠지.”
상엽은 광장에 모든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연설은 장황하지 않았다. 이번 역시 짧고 강한 메시지만 남겼다.
“살아서 평화로워지자. 죽어서 편안한 건 너무 심심하잖아.”
그의 말에 병사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진심이 느껴지는 연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웃음을 보며 상엽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모두 고마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설사 대장인 자신이 약해 보이더라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시간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전투가 시작되면 너희들의 대장이 어떤 놈인지 분명히 알게 될 테니까.”
상엽의 말에 수하들이 다시 웃었다.
“전투가 끝나고 다시 웃자고.”
상엽은 수하들의 표정에 만족하며 연설을 끝냈다.
전투는 정해져 있었다.
그 시기도 빠르게 다가왔다.
데빌은 40만에 이르는 신의 병사를 모았고, 거기서 10만에 달하는 악마 군대를 소환했다.
50만의 대군을 모은 데빌은 별다른 전략이나 함정 없이 상엽의 영지로 다가왔다.
전력이 앞서는 만큼 전면전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상엽도 피하지 않았다.
그도 전투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정면 대결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악마의 군대는 상엽의 영지를 눈앞에 두고 이동을 멈췄다.
그들의 전진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상엽이었다.
“악마답게 생겼네.”
붉은 피부에 같은 색의 동공을 가진 데빌은 5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괴물이었다.
머리에 두 개의 뿔이 솟아 있고 하체에는 공룡을 연상시키는 긴 꼬리까지 있었다.
등에서는 검은 날개가 가시 같은 뼈 사이에 오리발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털이 가득한 발등에서는 강한 독성을 담은 악취가 풍겼다.
“몇백 년을 자고 일어났으면 샤워부터 할 것이지…….”
상엽은 불쾌한 냄새로 인해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건방진 인간.”
“재수 없는 악마 주제에.”
데빌과 상엽이 다시 눈을 마주 보았다.
데빌의 거대한 체구에 비하면 상엽은 빈약할 정도로 작은 존재였다.
하지만 상엽을 내려다보는 데빌은 결코 상대를 무시하지 않았다.
“훌륭한 인간이군.”
“넌 별로야.”
“지금 마음껏 즐겨라. 네 군대와 함께 지옥으로 보내 줄 테니.”
“지옥이라고 해 봐야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놈은 없을 텐데.”
“크크. 걸레처럼 찢어진 영혼으로 가게 될 테니 즐길 만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데빌은 여유가 넘쳤다. 굵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는 악마라기보다 중후한 중년의 느낌이 풍겼다.
“기회를 주마.”
“부하가 되라고? 어떻게 원하는 게 전부…….”
“그냥 돌아가라. 인간계는 너에게 줄 테니. 그리고 영원히 간섭하지 않겠다.”
“그건 꽤 좋은 제안인데?”
상엽이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다.
“미안하게 됐어. 모처럼 좋은 제안을 해 줬는데 나도 절대신이 되어야 해서 말이야.”
“인간계의 인간들을 살리는 것 말인가? 그것도 내가 해 주지. 몇 명이든 네가 원하는 인간들을 전부 부활시켜 주겠다.”
“화끈하네.”
전투를 포기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질문은 상엽에게 묘한 파동을 주었다.
“원한다면 악마의 서약서를 주지. 이것은 내 존재의 가치를 걸고 하는 계약서다. 죽어서도 지켜지지.”
상엽도 진실의 천칭을 통해 알고 있었다.
데빌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되면 그 내용은 지켜진다. 대신 상엽도 두 번 다시 절대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이 역시 계약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악마인가? 내 마음을 참 잘 아네.”
“크크.”
상엽의 인정에 데빌이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결코 인자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욕심이란 그런 것이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진실을 가리고 꽤 멋진 사연을 만들어 욕심을 숨긴단 말이야.”
“인정해.”
상엽은 정곡을 찔렸다. 그런데도 데빌은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듯이 질문을 이었다.
“어리석은 인간. 네가 절대신이 되려는 것은 정말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모두 이룰 수 있다. 그들을 모두 살려 주고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당연히 네 군대도 무사히 돌아가겠지.”
이번에는 상엽이 웃었다.
“인정한다니까. 그래, 내가 절대신이 되려는 이유는 하나야.”
상엽은 진실을 말했다.
“절대신이 되고 싶으니까.”
누나를 살리겠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것은 상엽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신에 대한 명확한 욕심도 있었다.
이를 가려 왔던 상엽의 행동을 데빌은 이런 식으로 비꼰 것이다.
“말싸움은 네가 이겼어. 그러니까 이제 진짜 싸움을 시작해야지?”
상엽은 데빌이 원하는 방식의 기 싸움을 거부했다.
데빌은 이런 식으로 상엽의 감정을 흔들고 가능하다면 상엽과 엮여 있는 많은 자들에게 의심을 심으려 했다.
하지만 데빌의 계획은 오히려 상엽의 잠들어 있던 야성을 건드렸다.
“널 죽이고 절대신이 되어야겠어. 내가 그걸 원하거든.”
상엽의 강렬한 투지를 느낀 데빌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투지만으로 대지의 기운이 모두 상승 기류로 변했다.
요동치는 기류에 담긴 상엽의 투지에 데빌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떤 것에도 굴복할 자가 아니다. 소멸시키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데빌은 기선 제압을 위해 떠벌렸던 이야기들이 소용없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