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그러니까 살려 달라는 거지?”
성아는 실체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활을 원했고, 이를 위해 조각이 필요했다.
하지만 상엽은 이를 간단히 정리했다.
“살려 달라고 하는 녀석이 뭐 이렇게 당당해?”
성아는 할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맞는 말이니까.’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널 살려 주면 널 가질 수 있게 된다. 맞아?”
성아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는 맞는 말이었다.
어감이 이상하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니까 구라치고, 아니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성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엽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네 이야기는 알았어. 할지 안 할지는 좀 더 생각해 볼게.”
성아는 화가 났다. 인간의 오만함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다.
“난 신이야.”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었다. 실제로 주변의 풀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에 상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협상 결렬. 다른 놈 찾아봐.”
“인간 주제에!”
“닥쳐!”
결국 상엽도 목소리를 높였다.
“너 따위가 신이라서 내가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을 줬는데? 엿 같은 팔자에서 죽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버텼거든! 그래서 신이 뭐?”
성아는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그녀가 신이라서 상엽에게 도움이 된 건 전혀 없었다.
“그딴 소리는 팔자 좋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놈들한테 가서 해. 난 해당 사항 없으니까.”
상엽은 분노한 표정의 성아에게 쐐기를 박았다.
“신 따위가.”
성아의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영혼이라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 말 없으면 꼭 신분이나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놈들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상엽은 해머를 꺼내며 말했다.
“꼰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지.”
그는 성아가 성녀로 불리든, 실제 신이든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울 작정이었다.
이를 느낀 성아는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
인간은 신 앞에서 무기력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해.”
성아는 실제로 자신을 공격하려는 상엽을 말렸다. 상엽은 잠시 고민하다 해머를 내리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설사 조각을 모은다고 해도 널 위해서는 아니야. 나한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지.”
상엽이 그녀를 거칠게 대하는 건 단순히 루시가 위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한테만 말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가 성아를 경계하는 진짜 이유였다. 신의 입장에서는 여러 인간에게 신령을 내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상엽은 아니었다.
“넌 결국 조각을 가진 사람들이 싸우게 만들겠지. 그중에 살아남은 사람에게 신이랍시고 몇 마디 칭찬을 하고 수호신이 될 테고. 치열한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니까 당연히 아주 강한 녀석일 거야.”
성아는 핵심을 꿰뚫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치부가 드러난 듯해서 부끄러운 감정도 생겼다.
“분명히 말하지만 만약에 내가 조각을 모으면 네가 나한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네가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살려 줄 이유도 없어. 그러니까 분명히 대답해. 신의 자존심을 걸고.”
상엽은 성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너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성아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대답을 해야 했다. 부활을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실제로 자신을 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줄게.”
“잊지 마. 뭐든지라고 했어.”
“약속해.”
상엽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널 가질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볼게.”
그 말을 남기고 상엽은 동굴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성아도 홀연히 사라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인간…….”
상엽과의 대화는 그녀가 인간에 대한 많은 다양성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 *
“성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원해.”
휴식이 끝나자 적설은 자신이 원하는 대가를 말했다.
“너도 그것 때문에 천진에 있었던 거야?”
“아주 오랫동안 추격을 했어.”
상엽은 적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많은 길드와 관련이 되어 있고, 블랙과 화이트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성녀 하나만을 쫓은 건 아니야.”
“무슨 뜻이야?”
“왜 이래? 그냥 공짜로 듣겠다는 거야?”
“몸으로 때우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어떻게 안 될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여기서?”
적설은 옆에 있는 루시를 보았다.
“나갔다 오겠습니다.”
“농담이야. 그냥 여기 있어. 미안해. 자제할게.”
상엽은 사과를 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좋아. 내가 먼저 말해 줄게. 루시 목숨값에 비하면 거저네 뭐.”
“역시 넌 말이 통해서 편해.”
상엽은 성아에 관련된 모든 사실을 말했다. 단 하나도 숨기지 않았고 방금 전의 일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적설은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예뻐?”
“응?”
“그 성녀. 예쁘냐고.”
상엽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성녀를 가지겠다고?”
“아직 모르겠어. 성아라는 여자의 의도도 모르겠고,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으니까.”
상엽은 신이 아니라 여자라는 표현을 썼다. 실제로 그렇게만 인식하고 있었다.
“설사 가진다고 해도 예뻐서는 아니야. 오해하지 마.”
“전혀 상관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
적설이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상엽은 받아칠 말이 생각나긴 했지만 루시가 있어서 꾹 참았다.
“이제 네가 말할 차례인 거 같은데.”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난 지금 네 비서를 구해 준 대가를 받은 거야. 내가 정보를 풀어 줄 의무는 없어.”
“잘 생각해 봐. 있을 거야.”
상엽은 당당했다. 적설은 강한 눈빛으로 맞섰지만 결국 고개를 돌렸다.
“쳇.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해.”
“목숨값이 원래 제일 비싸.”
상엽은 적설을 살려 주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살려 준 이가 적설이었다.
“좋아. 어차피 지금쯤 정보를 공유하려고 했으니까.”
적설은 오랫동안 홀로 움직인 이유를 말해 주었다.
“기존 갓코인 시스템에 변화가 생기고 있어. 그건 이미 눈치챘지?”
“알아.”
“그게 시작된 건 꽤 오래됐어. 갓랭킹이 등장한 시점부터야.”
상엽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 갓랭킹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어. 뭔가 대단한 존재가 만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갓랭킹을 조사한 거야?”
“동생을 살리고 싶으니까. 제일 빠른 방법을 알고 싶었어. 갓랭킹을 만든 사람이라면 그 방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상엽이 그녀를 살려 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갓랭킹이라는 게 아무리 추적을 해도 잡히지가 않는 거야.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어. 이게 유저가 만든 게 아니지 않을까?”
적설의 행보는 흥미로웠다.
갓랭킹에 대해 조사를 하던 그녀는 다른 대상을 찾았다.
“그게 상점들이야. 그중에서 그레이 상점.”
그녀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는 그레이 상점을 목표로 잡았다.
“간단히 실험을 했어. 갓랭킹이 업데이트되는 시간에 상점을 이용해 봤거든. 아주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3시간 동안 상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얻어 냈다.
“그 상점에 소속된 사람들의 랭킹 업데이트가 느렸어. 그래 봤자 10초 정도지만. 난 다른 상점이 일을 대신해 준 거라고 판단하고 있어.”
갓랭킹이 정확했던 이유가 상점에서 운영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든 그 시점이 묘해. 갓랭킹이 등장하면서 경쟁이 엄청 심해졌거든. 그런데 그 경쟁을 부추기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어.”
“에레나의 생명초?”
“맞아. 그건 대놓고 그레이 상점에서 한 거잖아. 유저들끼리 빨리 서로를 죽이길 원하는 거지.”
적설은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이유가 궁금했어. 뭔가 서두르는 데다가 왠지 유저들의 신경을 갓랭킹과 전투에 집중시킨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다녔어.”
그때부터 적설은 갓랭킹이 등장한 시점에 일어났던 일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다 영국에서 묘한 의뢰가 있었다는 걸 알아냈어. 특수 의뢰가 떴는데, 조각을 파괴하는 의뢰였어. 그 길드에서 사진을 찍어 놨는데 당연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문양이었고.”
적설은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고 비슷한 의뢰를 세 번이나 찾아냈다.
“그 의뢰의 보상이 꽤 높았어.”
“그러니까 그레이 상점과 상관없는 신들이 성아 외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거지? 그레이 상점에서 그걸 막으려고 하고 있고.”
“맞아. 내 예상은 그래.”
상엽으로서는 생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배경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왜 그 사건에 집착하는 거야?”
“너 때문이야.”
“뭐?”
“널 만나고 알았거든. 난 이 싸움에서 승자가 될 수 없어.”
이 역시 상엽이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도 동생은 살리고 싶어. 동생을 살린 이후에 꽤 풍요롭게 살고 싶기도 하고. 누구든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할 자격은 있잖아.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지.”
상엽은 그녀의 생각을 인정해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할 거야?”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히 걱정되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역시 위로가 되는 남자야. 아주 가끔이지만.”
적설은 웃으며 상엽의 볼에 입을 맞췄다.
“미안.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는 루시에게 사과를 하더니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그렇게 가는 거야?”
“나 은근히 바빠.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니 다시 움직여야지. 이 비밀은 내가 밝혀낼 거야. 그리고 제대로 이용할 거고.”
“나한테는 공짜지?”
적설은 대답 대신 웃음을 보이고 동굴을 나섰다.
상엽은 떠나는 적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는 선명한 연민이 떠올랐다.
“루시. 복귀 준비해.”
“같이 가실 겁니까?”
“아니. 난 여기서 좀 더 있어야겠어. 새로운 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이 정보는 코드 제로 내에서도 소수만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어?”
“최근에 코드 제로에 자진 신고가 몇 건 있었습니다.”
상엽이 인간 변종을 처리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외부에서 코드 제로 요원들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자진 신고를 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밀 정보 등급을 높이고 있습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미안해.”
루시는 상엽의 사과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못하는 부분이라 루시만 힘들잖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제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전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아닙니다. 훌륭한 생각이셨습니다.”
루시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엽은 미안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음에는 거절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내가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멍청할 때가 있거든.”
상엽이 농담을 섞어 웃으며 말하자 루시도 더 이상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드 원. 성녀에 관련된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아.”
“그래도 하시려는 겁니까?”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적설의 말대로 상점들이 그렇게까지 막으려고 했다는 건 분명히 위협이 되기 때문일 거야.”
루시도 이 부분은 인정했다.
“그 힘을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가게 둘 수는 없잖아.”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루시는 상엽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곧바로 복귀 계획을 세웠고 코드 제로로부터 안전한 경로를 전달받았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조심해.”
루시도 적설처럼 인사를 하고 떠났다.
동굴에 홀로 남은 상엽은 잠시 시간을 보내다 밖을 향해 말했다.
“근처에 있는 거 알아. 할 말 있으니까 나와.”
상엽의 명령조에 푸른 옷의 여인이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성아였다.
“결정했어.”
그는 사설을 생략하고 결론을 말했다.
“널 가져야겠어.”
상엽이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