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쾅!
동희의 연구실 한쪽 벽이 무너지며 만신창이가 된 성아가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의 모습으로 뛰쳐나온 성아의 몸 곳곳에는 주사 자국과 얼룩진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파팟!
성아가 나타나자 땅속에 숨어 있던 담비들이 일제히 튀어 올라 공격에 나섰다.
몸에 상처가 늘어났지만 성아는 포기하지 않고 숲속을 달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안개로 흩어지더니 산을 벗어났다.
잠시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성아를 뒤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설악산을 탈출한 성아는 추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차원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고 성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안심하시오.”
나타난 이는 5미터 신장에 다리가 비정상으로 긴 사내였다.
머리에 고깔 같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긴 몸이 더욱 길어 보였다.
“제사장.”
제단의 신, 또는 제사장으로 불리는 신이었다. 신의 제단을 지키는 신이기도 했다.
“작전은 실패했어요.”
성아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소.”
“제하드의 후계자는 결코 약하지 않아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어요.”
“그래 봐야 한낱 인간일 뿐이오. 한 명의 신은 상대할 수 있으나 열 명의 신은 상대할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이 끝나자 제사장의 등 뒤로 열 개가 넘는 차원문이 열렸다.
상엽에 맞서는 열다섯 명의 신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가 우리 영지를 강탈하기 전에 제하드의 후계자를 잡아야 하오. 당신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하오.”
“당신들에겐 이미 기회가 있었어요. 당신들이 약속대로만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인정하오. 하지만 우리는 신중해야 했소. 그리고 다행히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소.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를 잡지 못한다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것이오.”
그 말에 성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이를 악물며 물었다.
“데빌을 제어할 방법은 찾았나요?”
“그건 나에게 맡기시오. 지금까지 계속 데빌과 소통을 했으니.”
“당신이 전부를 가지겠다는 말이군요.”
“내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것이오. 평등하게 대륙을 분배할 것이며, 그 권능도 평등할 것이오.”
데빌이 상엽을 처리한 후에 누가 가장 큰 권력자가 될지는 분명했다.
바로 데빌을 제어하는 자였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제사장뿐이었다.
성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동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신을 죽이는 공식이 있어야 돼.
그래야 협력한 신들을 모두 처리하고 절대신이 될 수 있었다.
“좋아요. 어차피 정상엽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잘 생각하셨소.”
“그는 이미 오로라의 정수를 완성했어요. 물론 용도는 다르지만.”
성아는 신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오로라의 정수를 정상엽에게 주려고 해요. 오로라의 정수가 본래 어떤 용도인지는 다들 알고 계시죠?”
오로라의 정수는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제거하는 용도였다.
그래서 봉인된 데빌의 근거지도 녹일 수가 있었다.
“정상엽이 오로라의 정수를 가지게 되면 여러분들의 영지를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어요.”
영지의 증표마저도 녹일 수 있는 것이 오로라의 정수였다.
“상황은 오히려 더 좋아졌군요. 오로라의 정수만 가져올 수 있다면.”
“맞아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정상엽의 유령이 연구소에 함께 있거든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소. 유령 추종자쯤이야 우리가 처리할 수 있으니.”
“정상엽이 오기 전에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가 끝나요.”
“그가 오기 전에 끝날 것이오.”
신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추종자라고 해 봐야 신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좋아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 지금이 기회요. 정상엽이 신의 대륙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왔소. 그리고 지금 습격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오.”
성아는 결국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로라의 정수가 무엇인지만 알려 주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합의가 끝났다.
신들은 일제히 설악산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인간도 아닌 신들이 암습을 시도했다.
몸을 숨기고 흔적을 감추는 건 그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번 습격에 다섯 명이 함께했다.
담비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히 몸을 숨긴 그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오는 동희를 보았다.
동희는 담비 대장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잠시 연구실을 떠났다.
“최고급 재료가 도망가 버렸어. 어쩌지?”
동희는 성아를 놓친 것이 아쉬운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 때, 신들은 연구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아의 말에 따라 오로라의 정수를 챙겼다.
-이제 데빌을 부활시킨다.
제사장은 만족했다. 그런데 갑자기 곁에 서 있는 성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푹!
제사장이 쥐고 있던 얇은 지팡이가 성아의 몸을 관통했다.
“이, 이게 무, 무슨…….”
“당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요. 앞으로는 방해만 될 존재니 사라져 주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오.”
성아는 지팡이에서 발산되는 빛으로 인해 그대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좋은 물건을 가져가니 값은 치르고 가지.”
성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제사장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 * *
“상엽아, 조심해.”
“걱정 마.”
상엽은 동희의 인사를 받으며 쓰러진 성아를 보았다.
제사장은 성아를 쓰레기처럼 버려 놓고 갔다. 동희에게 비참히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됐어.”
“그 녀석들이 액체를 사용하면 전부 마비가 될 거야. 30분쯤 마비된 채로 있을 테니까 천천히 처리해.”
오로라의 정수는 당연히 가짜였고 성아의 탈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상엽은 그들을 한 방에 잡기 위해 함정을 준비했고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잊지 마. 그 약은 진짜야. 가짜면 금방 눈치를 챌 테니까.”
그들이 가져간 것은 진짜 오로라의 정수였고 동희가 다른 약품을 섞어 놓은 상태였다.
“고마워. 잘 처리할게.”
“그것만 끝나면 다 끝나는 거지?”
“아마도.”
“그거 끝나면 우리 예전처럼 놀러나 갈까?”
“좋지. 꼭 가자.”
동희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송연지와 함께 셋이서 놀던 때였다.
“조심해.”
상엽은 동희의 인사를 받으며 신들의 대륙으로 돌아갔다.
신의 대륙에서 상엽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신의 제단만 들키지 않게 감시해.
이 명령을 남겨 놓고 기다리기만 했다.
“나타났습니다.”
“좋아. 조금 더 기다려.”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됐다.
“시간은 충분해. 녀석들이 오로라의 정수를 사용하면 간다.”
상엽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을 기다렸다.
* * *
신의 제단 앞에 신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큰 원을 만들며 힘을 모았고 제단은 빛을 뿌리며 응답했다.
제단을 움직이기에 그들의 힘은 부족함이 없었다.
빛이 절정에 달했을 때, 원을 만든 신 중의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제단에 새겨진 문양 중에 유일하게 내부로 통하는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구멍 앞에서 신은 들고 있던 유리병의 마개를 땄다. 그리고 천천히 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빛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평온한 호수에 폭풍이 몰아치는 형태였다.
빛은 자신의 아픔을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 보란 듯이 어지럽게 잔상을 흩날렸다.
그렇지만 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모든 액체를 구멍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하늘로 치솟은 기둥 전체가 강하게 진동했다. 동시에 정교하게 새겨진 모든 문양이 붉은빛을 뿌리더니 깊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으로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여전히 제단을 둘러싸고 주문을 외우던 신들은 냄새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힘을 쏟았다.
툭!
신들이 이상을 느낀 것은 한 명이 쓰러지고 난 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툭. 툭.
두 명이 더 쓰러지자 모든 신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몸은 마비가 되고 있었다.
툭. 툭. 툭.
결국 제단 곁에 있던 모든 자들이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차원문이 열렸다.
“역시 동희야. 효과 끝내주네.”
나타난 이는 상엽이었다.
상엽은 쓰러진 신들을 보며 해머를 들어 올렸다.
“너무 쉽네.”
지난 과정을 생각했을 때, 허무할 정도의 마무리였다.
“빨리 끝내자.”
상엽은 자비가 없었다. 쓰러진 신들의 머리에 직접 해머를 꽂았다.
그가 공을 들이는 것은 숫자를 세는 것뿐이었다.
“열셋, 열넷?”
그런데 이상했다.
“한 명이 없어.”
쓰러진 신은 열네 명이었다. 한 명이 없는 것이다.
“찾아.”
함께 왔던 라니르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추종자와 유령 군대까지 수색에 합류했다.
하지만 남은 한 명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왜 계속되는 거지?”
신들이 더 이상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단의 균열은 멈추지 않았다.
기둥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주변 공간을 뒤흔들 만큼 진동이 커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파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아?’
그때, 수색을 마친 라니르가 급히 돌아왔다.
“제사장이 사라진 것 같아요.”
“녀석을 찾아야 이걸 멈출 수 있어.”
라니르는 다시 돌아서서 주변을 살피려 했다. 그런데 상엽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망할.”
제사장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균열이 시작된 기둥의 내부였다.
상엽은 이를 보고 곧바로 해머를 들었다. 그리고 관 속에 누운 것처럼 기둥 내부에 잠들어 있는 제사장을 향해 휘둘렀다.
콰쾅!
하늘의 색을 바꿔 버릴 만큼 강한 빛이 폭사되었다.
“쳇.”
그런데 기둥은 무너지지 않았다. 상엽이 다시 한번 해머를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기둥 속에 있던 제사장이 눈을 떴다.
제사장의 몸은 기둥의 균열에 의해 피부가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사장은 웃었다.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웃음은 독기로 가득 찼다. 이를 보면서 상엽은 그가 소멸한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상엽의 반대편에 섰던 신들은 모두 제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크하하! 넌 진짜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제사장은 갑자기 악마처럼 웃으며 그렇게 외쳤다.
“지랄한다. 신이라는 놈이 책임감도 없이 데빌을 부활시켜 놓고 죽으면서.”
상엽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니르, 돌아가서 기다려.”
“군주님.”
“방해만 되니까 가라고.”
결국 라니르는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상엽은 기둥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파편이 떨어졌지만 상엽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상엽은 기둥이 가루로 부서져 바람처럼 흩어지는 것을 모두 확인했다.
잠시 동안의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더니 상엽이 밟고 선 바닥이 일순간 내려앉았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였다. 상엽은 이미 고스트 실드를 만들어 추락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엄청난 구덩이 안에는 굉음과 같은 심장 박동이 들리고 있었다.
‘괴물.’
상엽이 그 생각을 했을 때였다.
구멍 전체를 가득 메우는 용암 같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상엽은 그 자리에서 실드를 만들어 용암을 버텨 냈다.
방패가 뚫리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상승 기류에 몸이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상엽도 힘으로는 밀리지 않았다.
그때, 화염이 점점 열기를 더하더니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뭐야?’
상엽이 힘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고스트 실드라 안정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런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힘이었다.
방패와 함께 상엽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속도가 빨라지자 상엽은 옆으로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붉은 빛은 하늘을 뚫을 것처럼 끝도 없이 치솟았다.
우우웅!
구덩이에서 엄청난 상승 기류가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상승 기류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대한 붉은 눈.
데빌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최강자들이 현실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역사와 역사의 충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