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주인님을 찾는 방문자가 나타났습니다.”
“방문자?”
“네. 자신을 동희라고 밝혔습니다.”
“내가 직접 갈게.”
상엽은 바로 차원문을 열었다.
도착한 곳은 방문자의 숙소였고 자신이 통과했던 것처럼 거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상엽아!”
정말 동희가 상엽을 찾아왔다.
스트라인버그를 통해 누구든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웬일이야?”
“헤헤. 보고 싶어서 왔지.”
상엽은 자신이 직접 신원을 보증하며 동희를 자신이 머무는 신전으로 데리고 왔다.
“일단 이거 받아.”
동희는 상엽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예전에 프로토와 싸울 때 복용했던 음료였다.
“고마워.”
이번에는 서른 병이나 되는 터라 아끼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이걸 주려고 온 거야?”
“아니, 성아 때문에.”
“성아?”
그렇지 않아도 상엽은 성아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흘 전에 내가 붙잡아서 실험을 좀 했어.”
“무슨 말이야?”
동희는 성아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진실의 신이라더니 나보다 거짓말을 더 잘하네.”
“헤헤. 진짜든 거짓말이든 상관없어.”
동희에게 성아의 사연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엽은 진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상엽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동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은 믿을 존재가 안 돼.”
그 말에 곁에 있던 라니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동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실험이라니?”
“응. 신을 상대로 꼭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서.”
상엽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동희의 말을 기다렸다.
“진실의 신이 아니잖아. 그런데 여전히 신이더라고. 그게 이상해서 강제로 알아냈어. 그랬더니 또 하나의 이름이 나오더라고.”
“거짓의 신.”
“알고 있었어?”
“진실의 천칭을 열었거든.”
진실의 신 성아.
거짓의 신 성아.
본래 진실의 신은 두 가지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신.
진실의 신은 애초에 두 가지 직책이 통합된 지위였다.
진실의 천칭에는 수많은 기밀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성아의 과거였다.
성아는 원래 거짓의 신으로 시작했고, 자신의 힘으로 진실의 신을 몰아내고 진리의 신이 되었다.
다만 진리의 신이라는 직책을 진실이라는 단어로 바꾸면서 거짓의 신을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갓코인 시스템을 애초에 성아가 만든 것도 알고 있겠네?”
“응. 그것도 천칭에 있었어.”
“그럼 성아가 널 선택한 이유도?”
“여러 후보에게 동시에 접근했고, 그중에 내가 살아남은 것뿐이라고 알고 있어.”
“정확하네. 에이, 괜히 직접 왔어.”
“아니야. 이게 꼭 필요했어.”
상엽은 음료가 담겨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 얼굴 보니까 기분도 좋아졌고.”
“헤헤.”
“이제부터 남은 신들을 처리하는 작업을 시작할 거야. 성아처럼 너희들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각별히 주의해.”
“알았어. 아 참, 그리고 성아는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지?”
“응, 마음대로 해. 대신 절대 살려 주진 마.”
“헤헤. 그럴 거야.”
동희는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보이더니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라니르는 표정이 어두웠다.
“제하드의 후계자인가요?”
“맞아. 내 친구이기도 하지.”
“주군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군요.”
“그것도 맞아. 그런데 이걸 확실히 기억해.”
상엽은 주의를 주듯이 라니르에게 말했다.
“동희가 없었으면 난 이미 죽었어.”
동희의 음료와 음식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몇 번이나 뒤집을 기회를 주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내 친구들은 건드리지 마. 설사 날 배신한다고 해도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나서지 말고.”
상엽은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미리 차단했다.
“자, 그럼 도망간 놈들을 잡으러 가 볼까?”
“아직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본래 계획대로 영지를 강탈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아니, 방법이 있어. 진실의 천칭에 많은 것이 묻혀 있더라고. 그리고 영지 강탈보다 급한 일이야.”
라니르는 상엽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나보다 먼저 이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놈이 있잖아.”
“데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녀석이 소멸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녀석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고, 그걸 부활시킬 방법이 천칭에 있었어.”
라니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예전부터 궁금했거든. 성아가 천칭을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했어. 콜렉터라는 뛰어난 길드는 천칭을 얻으려고 필사적이었고.”
단순히 신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고 보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게다가 상엽과는 단 한 번도 협상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엽의 말을 거부하면서까지 일을 진행했다.
“데빌의 부활, 그 녀석들이 원하던 거야. 성아가 가진 마지막 무기이기도 했고.”
성아가 숨기려던 것은 그녀의 과거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아가 그걸 다른 자들에게 공개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거래가 있었지. 데빌을 살리는 데 꼭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설마…….”
“동희. 제하드의 연금술이 필요해. 그래서 동희에게 접근한 거고.”
“그런데 왜 말해 주지 않았나요?”
“지금쯤 듣고 있을 거야.”
라니르는 그제야 상엽의 곁에 추종자가 없는 것을 알았다.
“미안한데 어떻게 처리할지는 너한테도 비밀이야. 그래서 직접 말해 주지 못했어.”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난 널 믿어.”
“그렇다면 왜…….”
“네가 동희에 대해서 더 이상 몰랐으면 해서.”
상엽은 라니르와 동희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제하드의 죽음에서 너도 자유롭지 않잖아. 동희는 인간계에서, 너는 여기 신계에서 둘은 절대 만나지 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죽이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라니르는 진실의 천칭에 많은 것들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제 이야기도 있었던 것입니까?”
“그래. 제하드를 죽이자고 결정했던 장로회. 너도 그중의 한 명이잖아. 그리고 장로회의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 판단은 존중해. 널 죽이려고 하는 자를 미리 제거한 거니까. 그렇지만 동희가 그걸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지는 마.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군주님.”
“서로를 위해서 앞으로는 마주치지 않도록 해. 동희의 눈빛은 너도 봤지?”
상엽은 해맑게 웃던 동희의 표정에서 라니르를 보던 분노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번 계획에서 라니르를 빼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기다려. 처리하고 올 테니까.”
상엽은 라니르를 남겨 두고 인간계로 갔다.
도착한 곳은 동희의 연구실이었다.
연구실에서는 성아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아의 하얀 피부에 각양각색의 핏줄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고, 모든 관절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무슨 실험을 하는 거야?”
“두 가지 실험이야. 죽이는 실험, 그리고 죽기 직전에 살리는 실험. 그리고 신들의 신체에 대해서 분석 중이야.”
성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멀쩡한 정신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본 동희는 유리관을 들더니 그녀의 눈물을 담았다.
“신들의 눈물, 이것도 좋은 재료야.”
동희에게 성아는 그저 실험용 동물일 뿐이었다. 어떤 감정을 드러내도 동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성아의 동공은 상엽을 향하고 있었다.
동희를 공략할 수 없으니 상엽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다.
상엽은 그 눈빛을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이 남아서 안타깝네.”
상엽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특별히 몸을 묶지 않아도 동희가 주입하는 약물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동희야, 말은 가능해?”
“응.”
동희는 상엽을 위해 목으로 들어가는 약물을 살짝 조절해 주었다.
“이제 될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아가 입을 열었다.
“살려 주세요.”
“첫마디가 그거야?”
“미안해요.”
“그래, 그게 첫마디였어야지.”
성아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목숨을 구걸했다.
“당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진실의 신이 아닌 저는 다른 신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진실을 말하면 고통이라도 좀 줄여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정말이에요.”
“약물 때문에 멍청해진 거야?”
상엽은 그녀와의 만남 이후로 곧바로 의심을 가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 진실의 신전으로 찾아왔다면 당연히 내가 알았겠지. 아니야?”
성아는 대답이 없었다.
“결국 누구도 침범한 적이 없다는 뜻이지. 그건 네가 제 발로 나갔다는 뜻이고. 그리고 이미 네 계획은 전부 예상하고 있어.”
상엽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아가 끝까지 숨긴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갓코인,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성아는 갓코인의 설계자였다. 여기에는 프로토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절대신의 자리를 노리면서 내가 계속 강해지도록 내버려 둔 이유.”
성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엽이 그동안 성아를 믿은 이유는 간단했다.
강해지는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에도 적극적이었다.
만약에 성아가 절대신이 되고자 한다면 걸림돌이 될 상엽의 성장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갓코인 리셋.”
성아에겐 갓코인으로 일어난 모든 변화를 취소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상엽은 다시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너 대신 신을 처리해 줄 해결사를 찾으러 다닌 거잖아.”
“어떻게 그걸…….”
진실의 천칭에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성아는 끝까지 상엽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진실의 신전에 있던 새들한테 들었어.”
진실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실제로 새들에게 들은 정보는 단 하나였다.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어.
이걸 토대로 진실의 천칭에 있는 내용과 종합해서 유추를 한 것이다.
“나도 머리라는 게 달려 있거든. 갓코인 덕분에 꽤 똑똑해지기도 했고.”
상엽은 조금 허리를 숙여 성아에게 다가갔다.
“뭐해? 이제 본색을 드러내야지. 네가 가진 무기는 전부 끝났어.”
“감히 인간 주제에…….”
성아가 표정을 구겼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의 청초하고 불쌍한 감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악마와 같은 표정으로 분노를 드러낸 성아는 징그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인간은 노예다! 노예 따위가 주인을 해하려 드느냐!”
“지랄한다.”
“저주를 내릴 것이다! 저주를!”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는 성아를 보며 상엽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제 남은 건 없어.’
그가 일부러 대화를 한 이유였다. 혹시 숨겨진 다른 무기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상엽아, 그냥 죽여 버릴까?”
“아니야. 좀 더 고통을 즐기게 해 줘. 고통이 꽤 어울리는 여자니까.”
“응, 그건 내 전문이야.”
“그리고 조심해. 곧 다른 녀석들이 올 테니까.”
“안 그래도 성아를 좀 이용할까 해.”
“이용하다니?”
“헤헤. 지금 내가 세뇌를 연구하고 있거든.”
상엽은 뜻밖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이마오의 실, 그게 있으면 좀 더 쉬울 거 같아.”
그 말에 상엽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마오의 실을 넘겼다. 어차피 전수 유산이라 누군가에게 주는 데 문제는 없었다.
“신을 세뇌하는 게 가능해?”
“정확하게는 신의 능력을 인간 이하로 떨어트려서 세뇌하는 거야. 지금 성아한테 들어가는 약물이 그거야.”
“아…….”
“그런데 안전장치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있어.”
상엽은 동희가 평범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이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정신을 완전히 파괴할 거야. 혹시 세뇌가 풀리더라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회복할 수 없다는 거지?”
“응. 뇌의 기억이랑 몸만 남는 거야. 사고와 계산은 불가능해. 완전히 파괴할 거라서.”
상엽은 그 말을 듣고 미친 듯이 발광하는 성아를 보았다.
“잘 어울리겠네.”
“헤헤. 그럼 바로 시작할게.”
그들의 대화에 성아는 목이 터질 것처럼 쇳소리를 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룰루루.”
그 비명 같은 외침에 동희는 콧노래를 부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