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성아는 화가 났다.
예정되었던 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정이 발각됐다.
열 명의 신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성아는 상엽이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갔음을 확신했기에 이를 갈 정도로 분노했다.
“멍청한 놈들.”
성아는 모든 것을 걸었다.
신의 자리를 포기했고,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
“라니르!”
그녀의 계획에 변수가 생긴 것은 라니르 때문이었다.
관능의 신 라니르가 상엽에게 굴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진실의 신이라면 이를 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예전부터 라니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성아가 물려준 진실의 신을 적대시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의외로 라니르는 상엽의 편에 서서 성아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이제 내가 배신한 걸 알아차렸겠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협력을 하던 열 명의 신이 지금의 태세를 유지할지도 미지수였다.
“마지막 방법을 써야 하나?”
궁지에 몰린 성아는 상엽이 다시 찾아오기 전에 결단을 내렸다.
동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동희는 성아와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그 꿈의 감정은 오랫동안 남았다.
눈을 떴지만 그 설렘은 사라지지 않았고 성아를 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여자에게 단 한 번도 감정을 주지 않았던 동희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연구를 앞둔 기대와 비슷했다.
동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좀 더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그는 다시 꿈을 꾸었다.
마치 시리즈 드라마처럼 그의 꿈은 눈을 뜨기 전의 상황과 연결이 되었다.
꿈속에서 동희는 성아를 위한 요리를 했다. 성아는 그런 동희를 지긋이 바라보며 누구보다 예쁜 미소를 지었다.
음식은 달콤했고 이를 먹는 성아의 입술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행복이었다.
그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갑자기 상엽이 나타났다.
상엽은 우악스럽게 성아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은 것은 주인을 잃은 음식뿐이었다.
쓸쓸함만 남는 꿈이었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어렸을 때,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지금 꿈에서는 상엽이 그러했다.
동희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시 꿈을 꾸면 행복해질까?’
그런 희망으로 꿈을 꾸었다.
긴 기다림이었다. 동희는 쓸쓸히 음식을 만들었고 외로움이 극에 달할 무렵, 누군가 그의 등을 따뜻이 감쌌다.
등에 닿는 몸의 감촉은 겨울에 처음 꺼낸 따뜻한 이불처럼 포근했고 곧이어 다가온 향기는 봄의 새싹을 닮았다.
소중한 선물을 개봉하듯이 동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는 건 행복이 아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고 하얀 옷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동희는 분노했다.
“으아!”
평생 단 한 번도 질러 본 적이 없는 괴성을 토하며 동희는 눈을 떴다.
꿈은 여기까지였다.
다시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꿈이야.”
동희는 언제나 그렇듯이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상념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계속 생각났고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성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웃음엔 행복했고, 그녀의 눈물엔 불행했다.
그 안에서 동희의 감정은 몇 번이나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결국 동희는 연구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쓸어 내자 답답하던 마음이 한결 풀렸다.
상엽이 프로토를 죽인 이후에 그는 설악산으로 돌아와 담비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스트라인버그와 용소도 거리가 있지만 설악산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을 맞으며 숲으로 들어갔던 동희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성아…….”
실제로 그녀가 있었다.
환영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녀가 숲에서 동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울어?”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다가와 동희의 품에 안겼다.
“왜 그래?”
동희는 뜻밖의 상황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성아는 그저 울기만 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을 하지 못했고 천천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동희의 품 안에서 성아는 안정을 찾아갔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성아는 그 말만 했다.
“잠시만 옆에 있게 해 주세요.”
동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같은 시간.
상엽은 남은 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선전 포고를 했다.
-날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제거하겠다.
그는 자신에게 칼을 겨눴던 자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절대신이 되고 처리해도 돼.’
어차피 그들을 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절대신이 되고 나면 바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죽을 때까지 적이야.’
적에게는 정직할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 이것이 상엽의 방식이었다.
상엽에게 이미 백기를 든 다섯 신을 제외하고 남은 스무 명의 신 중에 다섯 명이 반응을 보였다.
아직까지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던 다섯 명이었다. 이미 칼을 겨눴던 자들은 단 한 명도 돌아서지 않았다.
“의외네. 몇 명은 돌아설 줄 알았더니.”
“저도 그 부분이 의심스럽습니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데…….”
오히려 몇몇 신이 합류까지 한 상황이었다. 이로써 그들 세력도 열다섯 명이 되었다.
“전투 준비해. 바로 전면전이야.”
상엽은 신뿐만 아니라 수하가 되기 원했던 이레라핌의 전사들도 받아들였다.
그 숫자만 무려 3만 명에 달했다.
상엽은 당장 이 싸움을 끝내고 싶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쳇. 신이라는 놈들이 치사하네. 대륙 안에는 있는 거야?”
“알 수 없습니다. 절대신만이 모든 신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은 다양한 차원을 오갈 수 있었고, 지금 상엽의 권능을 통해서도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이곳을 점령했던 방법을 기억하십니까?”
“표식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표식을 통해 점령을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맞다. 땅따먹기였지.”
신의 대륙이라는 시험 무대였다. 신전을 버리고 떠나면 강제 점령이 가능했다.
“다만 강제 점령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 그 녀석들이 반드시 반격을 하러 오겠네.”
“어쩌면 그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강제 점령을 하면 기존의 점령자가 알 수 있게 된다. 눈 뜨고 가만히 영지를 내어 줄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하나씩 점령한다.”
“그 전에 합류한 자들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네가 예전에 했던 거?”
“그렇습니다. 이미 거울의 대지는 제가 관리자일 뿐, 실제로 힘의 주인은 군주님이십니다.”
“알았어. 바로 준비해.”
상엽은 시간을 끌지 않고 충성 맹세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그 절대신이라는 거, 내가 처음이지?”
상엽은 돌아서는 라니르의 등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라니르는 특유의 웃음을 보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신도 군주님만큼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는 누가 제일 가까웠는데?”
“데빌이었습니다.”
“데빌?”
“네. 악마의 신이었습니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200명의 신과 싸웠습니다.”
대륙의 점령 비율은 상엽이 높았지만 제거한 신의 숫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200명의 신이 연합해서 겨우 물리쳤습니다.”
“너도 있었어?”
“네, 그렇습니다. 데빌이 절대신이 되었다면 모든 세상이 불행해졌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신이 각자의 영역에서 평화롭게 지낼 때였다. 데빌만이 유일한 침략자였던 것이다.
반면 상엽은 이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전쟁에 합류했다.
“알았어.”
“그리고 군주님.”
이왕 대화가 시작된 김에 라니르는 참았던 말을 했다.
“진실의 천칭, 이젠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섰다.
상엽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신들의 기밀.’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았다.
“까짓것 모르는 거보다는 아는 게 좋지.”
이미 성아와의 신뢰가 깨진 상엽은 진실의 천칭을 소환했다.
* * *
늦은 밤.
드디어 성아의 울음이 그쳤다.
동희는 그녀에게 따뜻한 음료를 건넸고 성아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컵을 소중히 감싸 쥐며 입술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동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노력할게.”
동희의 눈빛은 따뜻했다. 이를 본 성아는 동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시작했다.
“정상엽이 절 버렸어요.”
“상엽이가?”
“라니르라는 신을 만났거든요. 그녀는 모든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관능의 신이에요.”
“상엽이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널 버릴 사람은 아니잖아.”
“그 사람의 뜻이 아니에요. 라니르의 뜻이지.”
“상엽이가 그 여자한테 속아서 널 버렸다는 거야?”
“아니요.”
성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절 싫어하고 있어요. 모든 진실을 말했지만 믿지 않았고 저를 신들의 대륙에서 추방했어요.”
“상엽이가?”
“전 전부를 줬어요. 그는 지금 진실의 신이에요.”
“진실의 신은 너잖아.”
“제가 후계자로 그를 선정했어요. 절대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거든요.”
“그럼 너는?”
“이제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내일까지예요. 마지막 힘을 모아서 소멸한 신체를 되돌린 거니까요.”
“소멸이라니?”
“전 이미 그에게 죽었어요. 남은 건 영혼뿐이었고 그 상태로 추방당했죠.”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보는 동희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전 이제 끝이에요. 신을 포기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되네요.”
“혹시 방법은 없어?”
“있어요. 하지만 불가능해요.”
“방법이 뭔데?”
동희의 질문에 성아의 눈에 희망이 비쳤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불가능해요.”
“말해 봐.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래도 제 최후가 당신 덕분에 외롭진 않겠네요.”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그러니까 말해 주지 않을래?”
동희의 배려에 결국 성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봉인 된 몸이 있어요. 그 몸을 부활시키면 전 살아날 수 있어요.”
“그 몸이 어디 있는데?”
“신의 제단 아래에 있어요. 그런데 제단을 녹이려면 오로라의 정수가 필요해요.”
“오로라의 정수?”
“혹시 알고 있나요?”
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들 수 있어.”
그 말에 성아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저, 정말인가요?”
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내가 도와주면…….”
“제 모든 걸 드릴게요.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무엇이든 하겠어요.”
“무엇이든?”
“네. 하지만 정말 도와주실 건가요?”
“잠깐만. 시간이 좀 필요해.”
동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연구실을 잠시 나섰다.
성아에겐 긴 시간이었다.
한참 바람을 쐬던 동희는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성아 앞에 섰다. 그러더니 대뜸 결론을 말했다.
“약속해. 내가 널 살려주면 넌 내 거야. 몸도 영혼도 전부 내 거.”
“물론이에요.”
성아는 눈물을 흘리며 동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까워진 귀에 속삭였다.
“저도 그걸 원해요. 제가 살아나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의 것이 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동희는 성아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와 눈빛을 마주치더니 입을 맞췄다.
둘은 긴 시간 동안 닿은 입을 떼지 않았다. 동희의 손은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살결을 더듬었고, 성아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동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때까지도 성아의 시선은 동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동희는 성아를 침대에 눕히고는 곁에 앉아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아는 이를 보며 결정타를 날렸다.
“안아 주세요.”
청초한 표정에 젖은 눈동자에는 오롯이 동희만이 담겨 있었다.
이에 동희가 웃으며 화답했다.
“헤헤, 최고급 재료다.”
그 말 한마디로 성아의 표정이 변했다.
“그, 그게 무슨…….”
성아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몸이…….’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노력하지 마.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며 동희는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그곳에 성아를 마비시키는 독이 있었던 것이다.
“첫 키스라서 기대했는데 그냥 살이 닿는 것뿐이잖아. 실망했어. 악수랑 뭐가 다르다고 이걸 하는 걸까?”
“왜 이래요?”
“연금술사 제하드. 이름 기억하지?”
동희는 움직이지 못하는 성아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절대 신을 믿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고.”
그는 수건으로 입을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상엽이가 진짜 그랬다고 해도 상관없어. 상엽이가 그랬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상엽에 대한 동희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