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신의 권능은 정확히 말해서 신의 대륙보다는 다른 차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창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종말을 선사할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모든 일들은 소위 말하는 기술자가 있어야 했다. 그냥 손만 휘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기술자는 신일 수도 있었고, 신의 대륙과 신의 도시에 있는 또 다른 주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조건도 절대신이 되면 극복할 수 있었다.
기술자조차도 창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신.
이것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가진 존재였다.
상엽은 이 싸움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힘 차이는 더 명확해질 거야.’
이를 위해 상엽은 다음 목표를 찾아갔다.
“뭐야?”
상대 영역을 침범하고 신전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분노의 신이 왜 이렇게 치사해?”
상대가 신전을 비우고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
“도망간 거 같아요.”
“그러게. 신이 이렇게 치사해도 돼?”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어요.”
“쳇.”
상엽은 불꽃 같은 문양으로 지어진 신전을 보았다.
“분노의 신이니까 인내심은 별로겠지?”
“참지 못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잘됐네.”
상엽은 해머를 꺼내고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파괴의 일격으로 신전을 내려쳤다.
콰콰쾅!
단 한 방에 신전이 장난감 건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라니르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방으로 신전이 무너지자 라니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지 들어가.”
“죄송해요.”
“자, 이쯤 해 뒀으면 열이 받을 텐데.”
“조심하세요. 간사하다고 소문난 신이니까요.”
“걱정 마. 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법이니까. 인간이든, 신이든.”
상엽은 여유롭게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상엽도 지식 전달을 통해 분노의 신 야파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만으로도 사생결단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야파는 행동을 예상하기 쉬운 자였다.
“그냥 무서워서 숨은 것 같진 않고.”
상엽이 여러 가지 예상을 할 때, 라니르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급히 차원문을 만들었다.
“가시죠.”
“왜?”
“열 명 이상의 신들이 동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상엽은 그제야 야파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함정이었다는 거지?”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은 야파의 영역이라 우리의 이동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알았어.”
상엽은 붙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신중하기로 했다.
‘마법을 쓰는 놈들만 잔뜩 몰려왔겠지.’
열 명의 신이라면 상엽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신의 힘이 만만하지는 않아.’
개인 전투라면 모두를 이길 수 있지만, 전략적으로 마법만 뿌린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가자.”
상엽은 라니르가 만든 차원문을 통해 자신이 점령한 땅으로 되돌아왔다.
상엽은 생각에 잠겼다.
“날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아냈어.”
“그런 것 같아요.”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긴 해. 그런데 난 그 확률이 아주 낮다고 판단했거든.”
“협력 말인가요?”
“맞아. 소수라면 몰라도 그렇게 대규모 협력은 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어.”
“저도 그 점이 이상합니다.”
라니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었고, 절대신에 대한 욕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무리 상엽이 강하다고 해도 집단이 되어 움직일 자들은 아니었다.
“군주님께서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저렇게 원래 그런 것처럼 한 팀이 된다는 건 이상해.”
“어떤 생각이십니까?”
“보통 이런 경우에는 주동자가 있어. 그리고 모두를 설득했을 거야.”
상엽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라니르.”
“네, 군주님.”
“넌 지금부터 날 따라다니지 말고 주동자가 누군지 알아내도록 해. 그 녀석만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연합은 와해될 테니까.”
아직 스물다섯 명의 신이 남았다.
상엽은 이 싸움이 위험한 외나무다리로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상보다 저항이 거세겠어.’
상엽은 그 생각을 하며 계획을 수정했다.
‘언제나 함께 다닐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닐 테니까.’
지금까지 상엽은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가장 세력이 강한 자부터 처리한 것이다.
‘계속 그럴 필요 없지.’
이제 그런 패턴을 버리기로 했다.
“기습을 시작해 볼까?”
그는 익숙한 단어를 떠올렸다.
“오함마 암살자가 간다.”
상엽은 계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암살의 기본은 정찰이다. 그리고 확실한 기회에 단번에 끝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정보가 필요했고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대비해야 했다.
‘찾기만 해.’
상엽의 암살은 달랐다.
찾으면 그냥 정면으로 달려가서 부숴 버리는 것이다.
말이 암살이지 기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쾅!
신전에서 여유롭게 현재 상황을 관망하던 복수의 신은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알람이 채 끝나기 전에 상엽을 만났다. 그리고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소멸하고 말았다.
“암살 성공.”
상엽은 한 명으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신을 기습했다.
그렇게 암살은 여섯 번이나 시도되었다.
“쳇, 튀었네.”
다섯 번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여섯 번째는 상대가 이미 신전을 떠난 후였다.
“스무 명 남았어.”
상엽은 남은 숫자를 떠올리며 암살을 마무리했다.
상엽의 행동 패턴이 달라지자 상대는 더 이상 신전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상엽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확실히 구분되었다.
“다섯 명이 군주님을 모시겠다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당연히 하위 신들은 자신이 잡을 줄을 선택해야 했다.
스무 명 중에서 다섯 명은 상엽을 택했다.
“어떤 자들이야?”
“희망의 신, 순백의 신, 눈물의 신 세 명은 믿을 수 있습니다. 다만 조롱의 신과 거짓의 신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속이는 걸 즐기는 신들입니다. 어떤 신도 그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럼 일단 받아 주고 전쟁에서는 제외해. 감시자를 붙여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면 돼.”
“알겠습니다.”
상엽은 루시에게 그랬듯이 웬만한 일은 라니르가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이제 상대방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해.”
상엽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같은 시간.
성아는 진실의 신전을 벗어나 깊은 동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에 열 개의 보석을 늘어놓자 홀로그램처럼 각각의 형체가 떠올랐다.
그들은 열 명의 신이었다.
늘어트린 보석에서 나타난 신의 환영들은 실존하는 자들이었고 영상 통화처럼 직접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다섯 명의 신이 정상엽의 편에 섰어요. 아직 진영을 결정하지 않은 자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성아의 말에 신들은 다양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 불꽃 피부에 검은 눈동자만 보이는 분노의 신이 성아를 재촉했다.
“이대로라면 그자를 막을 수 없다!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이제 시도할 때가 되었어요. 예상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성아의 말에 각자의 말을 하던 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제가 직접 나서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를 죽일 수 있는 한 방을 준비하세요.”
성아는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계획의 성공을 확신했다.
상엽이 머무는 신전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진실의 신전에 있던 새는 곧장 상엽의 어깨에 앉았다. 그러더니 성아의 말을 전했다.
-꼭 할 말이 있어요. 직접 만나고 싶어요.
자세한 이유는 없었다.
“알았다고 해.”
상엽은 성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상엽은 진실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숲을 걸었다.
인간계에서 보지 못하는 수많은 식물들이 보였고, 주변을 가리는 높은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부 환경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상엽이지만 확연히 느낄 만큼 좋은 공기들이 폐를 시원하게 씻어 내는 느낌이었다.
좀 더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외부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진 나무들이 주변을 가렸다.
“여기예요.”
성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임에도 나무에 부딪쳐 방향을 알 수 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어디야?”
“여기예요.”
여전히 목소리가 들렸지만 성아는 보이지 않았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당신을 만날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야?”
“그들에게 당했어요. 전 지금 영혼만 남은 상태예요.”
잠시 후에 추종자처럼 몸이 투명해진 성아가 나타났다. 그런데 몸이 워낙 흐릿하고 물결처럼 흔들려서 표정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뚜렷한 것은 목소리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에게 대항하는 신들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아는 당신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아냈어요. 죄송해요.”
상엽은 마음이 아팠다.
인간인 성아의 상태로는 신의 힘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제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절대신이 되어 주세요.”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
“인간 시간으로 열흘이에요.”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다.
“알았어. 더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기다려.”
“그런데 불안한 점이 있어요.”
“뭔데?”
“그들이 당신 친구들에 대한 정보를 가져갔어요. 인간계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상엽의 표정이 구겨졌다.
“동희를 노리는 거겠지?”
“그럴 거예요.”
신들이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신을 죽이는 공식.
이것은 상엽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히려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신들이 사용한다면 더욱 위협적일 수 있었다.
‘성아의 기억을 읽었다면 전부를 알게 될 텐데.’
성아의 기억에는 블랙 해머의 은신처도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그에겐 차원문을 열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그러면 성아가 소멸할 거야.’
복잡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알았어. 내가 결정할게.”
상엽은 일단 성아와 헤어져서 가까운 진실의 신전으로 돌아갔다.
진실의 신전으로 여러 마리의 새가 몰려들었다.
“전부 알아내.”
지시를 받은 추종자는 새들이 가진 정보를 모두 종합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결과를 상엽에게 알렸다.
-신입이 신전을 벗어난 것은 총 세 번입니다.
상엽이 알아내고자 한 것은 성아의 행동이었다.
“역시 거짓말이었나?”
지금 성아는 진실의 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진실의 신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나?”
상엽은 이 부분마저 의심이 들었다.
“유령아, 나와 봐.”
그는 추종자를 눈앞에 불렀다.
“나 사실 여자야.”
-주인님?
“뭐야? 거짓말 되잖아. 난 라면이 싫어. 이것 봐, 거짓말도 되는데?”
-실험하신 겁니까?
진실의 신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신념에 따라 하지 않을 뿐이었다.
“성아가 나한테 했던 말을 전부 의심해야 한다는 거네.”
상엽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슨 의도일까?”
처음에는 이걸 의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원하는 게 뭐지?”
성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자 라니르가 생각났다.
“라니르.”
상엽의 부름에 공간이 왜곡되더니 라니르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군주님.”
그녀는 진실의 신전임을 보더니 살짝 웃음을 보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했다.
“늦기 전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정해. 이제 네 말을 들어 봐야겠어.”
“여긴 여전히 성아의 눈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내 신전인데 성아의 눈이 남아 있다고?”
“지금 우리의 대화도 전부 엿듣고 있을 것입니다.”
상엽은 이유를 묻기보다 이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제 신전이 가장 안전합니다.”
결국 그들은 라니르의 신전으로 이동했다.
라니르는 자신의 신전에 도착하자 뜸을 들이지 않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갓코인을 처음 설계한 것이 성아예요.”
상엽은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신들의 후계자 선정 시스템. 성아가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설계했던 게 갓코인이었어요. 하지만 모든 신이 반대했고 프로토에 의해 봉인이 되었고요.”
“그걸 프로토가 활용한 건가?”
“맞아요. 그래서 진실의 신이 화가 많이 났죠.”
상엽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내가 성아한테 놀아난 건가?”
“한 가지 더 말해 드릴까요? 최근에 알아낸 정보예요. 우리 쪽에 합류한 다섯 신 중의 한 명이 알고 있더라고요.”
“뭘 알고 있었는데?”
라니르는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성아는 100명의 우수한 전사들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군주님도 그중의 한 명이었고요.”
“쳇, 재수 없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엽은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성아를 만난 숲 주변에 열 명의 신이 있었어요.”
“뭐?”
“함정이었죠. 물론 제가 군주님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서 작전이 취소되긴 했지만.”
상엽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