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282화 (280/300)

# 282

“받아 주십시오.”

5천 명의 병사를 이끄는 수장이 상엽을 찾아왔다.

신의 대륙에서 가장 웅장한 파구스의 신전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연신 젓가락을 움직이던 상엽은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온 사내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필요 없어.”

상엽은 세력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처리하고 나면 절대신이 될 거야. 흩어진 군대도 당연히 내 것이 되고.’

굳이 세력을 만들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1위부터 3위까지를 처리하면서 비공식적이지만 그가 차지한 세력은 절반을 넘어섰다.

‘스물일곱 남았어.’

서른 명의 신 중에 세 명이 죽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는 놈들은 살려 주고, 나머지는 전부 처리한다.’

상엽은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자, 다 먹었으니까 가자.”

추종자가 빠르게 설거지를 했고 상엽은 그릇들을 아공간에 던져 놓은 후에 차원문을 열었다.

신들이 이동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에서는 이동이 자유로웠다. 다만 다른 신의 영역은 경계선까지만 갈 수 있었다.

신이 되면서 상엽은 신의 대륙에 대한 지리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고, 언제든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제 대비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알아. 얼마나 잘 대비했는지 보자고.”

상엽은 이미 다음 목표를 결정한 상태였다.

대륙 북쪽에 거울의 대지가 있고 거길 점령하고 있는 자였다.

본래 세력 서열은 4위였지만 상엽으로 인해 현재는 1위가 되었다.

“강한 놈부터 차례대로.”

상엽은 이처럼 심플한 방식으로 계획을 세웠다.

전투에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뭐야? 아직 안 갔어?”

5천 명의 수장은 여전히 상엽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엽은 그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서야 관심을 가졌다.

그는 날개가 달린 인간의 외모였다. 오래된 철제 갑옷을 입고 핏자국이 묻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넌 종족이 뭐야? 난 인간 출신인데.”

“이레라핌이라는 종족 출신입니다.”

-주인님, 이레라핌은 신들이 노동력을 위해 창조한 종족입니다. 신의 대륙에만 존재하며 뛰어난 몇 명은 천사의 직책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신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든 종족이었다.

-그들은 충성심이 강하여 주인이 죽기 전에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다른 주인을 찾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현실에 있는 강아지들을 생각하면 그런 성향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원래 누구를 모셨어?”

“파구스 님이셨습니다.”

세력 1위를 자랑하던 파구스가 죽자 대부분의 병사들은 흩어져 버렸다.

그들은 다양한 선택과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레라핌은 한자리에 모여 다음 주인을 기다렸다.

‘세력이 큰 게 유리하다는 걸 아는 거지.’

5천 명의 뛰어난 병사라면 마다할 신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런 부분은 이레라핌의 수장도 잘 알고 있었기에 허락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강한 주인을 모신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본능이었다.

“지금은 필요 없어. 나중에 필요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상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앞을 막을 거면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와.”

상엽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차원문을 열었다.

도착한 곳은 거울의 대지가 펼쳐지는 경계선이었다.

라니르라는 이름의 여신은 관능의 신이라고 불렸다.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네.”

상엽은 묘한 기대를 가지며 걸음을 옮겼다.

상대 신의 영역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은 침범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상엽은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진짜 거울이네.’

바닥은 상엽의 몸을 비췄다.

흙 대신 거울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정돈된 나무들과 낮게 자란 풀도 모두 거울이었다. 이런 구조물들은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일 만큼 날카로웠다.

‘미끄럽네.’

거울은 얼음처럼 마찰력이 적어서 가볍게 걷기는 불편했다.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깨지는 거 아니야?’

지난 경험이 이런 공포를 심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의 숲이 나타났다.

30미터까지 솟은 거울 나무가 즐비했고 거울 잔디도 무릎을 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의 가운데는 풀이 자라지 않는 길이 있었다.

상엽은 굳이 거울을 깨트리지 않고 길을 통해 멀리 보이는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거울의 신전은 관능의 신 라니르의 거울상이 하늘 높이 치솟은 형태였다.

천장이 높은 2층 건물 위에 200미터에 이르는 거울상이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거울의 영역 어디서든 거울상을 볼 수가 있었다.

상엽은 나뭇가지와 바닥, 잔디에서 깨진 듯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길을 걸었다.

산책을 하듯 여유 있는 걸음이었다.

그렇게 숲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길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오우.”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속이 모두 비치는 얇은 천으로 주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정갈하게 내려온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니르입니다.

여신 라니르는 완벽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성아도 인간을 넘어서는 미인이지만 라니르는 매력적인 눈빛과 도발적인 표정이 감정을 흔들어 놓는 힘이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거울 조각과 상엽을 빤히 쳐다보는 깊은 눈빛에 상엽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좋은 눈빛이네.”

“어서 와요.”

“내가 왜 왔는지는 알 텐데.”

“절 죽이러 온 건가요?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라니르가 살짝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천이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훌륭한 유혹이긴 한데 소용은 없을 거야.”

“제 유혹에 다른 의도가 없다면요?”

그녀의 목소리는 귀를 간질이는 매력이 있었다.

“날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상엽의 제안에 라니르는 웃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상엽에게 걸어와서 다섯 걸음 앞에 멈췄다.

그녀는 잠시 상엽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상엽은 그녀의 행동에 잠시 놀랐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상엽이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뒤통수에 해머를 내려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라니르는 기회를 주려는 듯이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뿐만 아니라 곧게 편 허리 앞쪽으로 적나라하게 몸매가 드러났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빛과 묘하게 드러난 몸매는 숨이 막히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너무 훌륭한데.”

“당신을 군주로 모시고 싶어요.”

“군주?”

“노예를 강요하시면 목숨 걸고 싸워 드릴게요.”

나름대로 지킬 수 있는 선은 확실히 그었다.

부하가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예는 아니었다.

“신이 군주를 모시기도 하나?”

“절대신이라면 가능하죠. 대신 전 두 번째 자리를 잡아야겠어요.”

“어쩌지? 두 번째 자리는 예약이 되어 있는데.”

“성아를 말하는 건가요?”

라니르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를 믿나요?”

그 말을 하며 라니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위협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조금 뒤로 물러났다.

“믿어, 전우거든.”

“진실의 신이라…….”

라니르의 표정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진실의 신이 되기 훨씬 전부터 전 이곳에 있었어요. 그녀가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 어떻게 권력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죠.”

“비난은 그만둬. 지금 누굴 믿을지 선택하라면 성아를 택할 테니까.”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라니르는 확실히 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절대신의 자리는 절대 노리지 않겠어요. 하지만 두 번째 자리는 경쟁할 수 있게 해 줘요.”

“자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결국 당신은 절 믿을 수밖에 없어요.”

“왜지?”

“당신은 진실의 신이 되었으니까요.”

상엽이 지금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라니르의 말은 전부 진실이었고 상엽은 이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진실의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건 인정해. 그렇다고 그게 성아를 이긴다는 뜻은 아니야.”

“그녀의 거짓을 당신은 곧 볼 수 있게 될 거예요.”

상엽으로서는 뜻밖의 말이었다. 그런데 라니르는 자신에 차 있었다.

“객관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결국 절 선택하게 될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건 이거 하나뿐이에요.”

“객관적인 시선? 내가 잘하는 건 아닌데. 아주 주관적인 놈이라서.”

“그럼 이건 어때요?”

라니르는 상엽을 보며 마지막 조건을 제시하는 협상꾼처럼 말했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심만 무시하지 말아요.”

그녀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상엽은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뭔가 알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라니르는 훌륭한 단어 선택을 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분명히 있어.’

최근 상엽이 성아와 지나치게 가까운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좋아. 그건 됐고, 이제 네 조건을 생각할 차례야.”

“네. 당신 결정에 달렸어요.”

라니르는 다시 처음 보았던 도발적인 표정으로 상엽 앞에 섰다.

관능의 신이라는 타이틀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고 본능이 들끓었다.

그런데 상엽은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예상보다 조금 빠르긴 하네.’

모든 신을 죽일 수도 있지만 굴복시키는 것도 계획의 하나였다.

언젠가 누군가를 수하로 받아들이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을 죽인 뒤에 무릎을 꿇는 신이 생길 거라 생각했지만 라니르의 대처가 빨랐다.

“좋아, 받아 줄게.”

상엽은 결국 라니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라니르는 선물 상자의 리본을 풀듯이 몸에 걸치고 있던 천을 천천히 풀어냈다.

스르르.

“노예가 되진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제가 당신을 원해요.”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데.”

“당신의 공식적인 판단에 영향을 주진 않을 거예요. 이건 아주 사적인 영역이죠.”

“사적인 거 좋아해.”

“저도 아주 좋아하죠.”

라니르는 천천히 상엽을 향해 걸어오더니 다시 무릎을 꿇었다.

“관능의 신 라니르는 신의 언약에 따라 진실의 신을 군주로 모십니다.”

“받아들인다.”

상엽의 대답에 라니르가 웃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어느새 동공에 서로가 비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이제 사적 영역이에요.”

“공사 구분이 확실하네.”

“아직 만족하지 마세요.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말이 끝났을 때, 라니르의 입은 상엽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비치는 거울의 숲에서 진한 사적 영역을 탐험했다.

“후우.”

상엽은 정말 지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라니르도 땀에 젖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서로를 탐닉하는 데 집중했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엄청난 만족감과 피로가 함께 몰려왔다.

“진짜를 만난 기분이야.”

그나마 상엽은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라니르는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할 힘도 없는지 상엽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 지금 제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어요.”

“관능의 신에게 인정받은 건가?”

“최고예요. 당신이 이런 남자인 걸 알았다면, 인간 세계에 있을 때 잡으러 갈 걸 그랬어요.”

“그럼 내가 노예가 됐겠네.”

“당신은 누구의 노예가 될 남자가 아니잖아요.”

상엽은 라니르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날 남자라고 부르네.”

“전 인간을 동경하거든요.”

“그건 의외네.”

“전 영적인 존재였어요. 인간을 경험해 보지 못했죠. 그래서 항상 인간을 동경했어요.”

“여긴 다른 많은 존재가 있을 텐데.”

라니르는 거친 숨이 진정되자 더 많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간은 특이해요. 한 사람 안에 악마와 천사가 동시에 들어 있잖아요. 그리고 언젠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죠.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요?”

상엽이 고개를 저었다. 이에 라니르는 시험 답안을 풀어 주는 선생님처럼 말했다.

“어느 한쪽을 완벽히 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언제든 악마가 되고, 때로는 천사가 되죠. 그건 아주 완벽해요. 신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인간은 변덕이 심하다. 그런데 라니르는 이 점을 좋아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존재. 그건 가능성이죠.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상엽은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인정이 되었다.

“그럼 이건 어때? 인간의 노력과 의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해는 지금부터 해야지.”

상엽은 겨우 숨이 진정된 라니르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떨어진 조각이 다시 붙는 것처럼 정확히 품에 안겼다.

“인간은 정말 대단하군요.”

“진짜는 지금부터야. 이번에는 내가 증명해 볼게.”

상엽은 조금 더 깊은 사적 영역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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