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출발 한 시간 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던 상엽에게 동희가 찾아왔다.
“완성했어.”
신을 죽이는 공식이 완성되었고, 그것은 하얀 표면에 붉은 문자가 가득 새겨진 석판으로 탄생했다.
“악마성의 기둥이 흡수할 수 있는 형태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야?”
“응. 이 공식이 절대 널 위협하지 않아야 했거든.”
“난 널 믿어.”
“그래서 이렇게 만든 거야.”
상엽은 거부하지 않고 해머를 내밀었다. 그러자 동희는 준비한 액체를 해머의 타격면에 바르고 석판을 흡수시켰다.
악마성의 기둥은 석판이 스며들자 검붉은색이 사라지고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마치 피로 이루어진 해머 같았다.
“괜찮아?”
동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상엽에게 물었다. 이에 상엽은 활짝 웃어 주었다.
“비린내가 살짝 나는 거 같아서. 이제 괜찮아졌어.”
실제로 상엽은 잠시지만 거부감을 느꼈다.
“이게 널 지켜 줄 거야.”
동희는 상엽에게 물약을 내밀었다. 투명한 병에 든 액체는 석판에 새겨진 문양과 같은 색이었다.
상엽은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물약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예방 주사라고 생각해. 넌 이 공식에 적용되지 않아.”
“이런 것까지 만들 필요는 없는데.”
“내가 불안해서 만든 거야.”
상엽은 다시 한번 동희의 능력에 감탄했다.
“네가 제하드를 뛰어넘었어. 축하해.”
“헤헤. 아직 안 끝났어.”
“연구할 게 남았어?”
“제하드가 했던 거. 이제 마지막 연구를 시작하려고.”
동희의 말에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생명 창조?”
“응. 괜찮지?”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제하드가 너 같은 신을 만났다면 행복했을 텐데.”
동희는 조금 서글픈 표정이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제하드에 깊은 애정을 느끼는 듯했다.
“빨리 돌아와.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그래, 고마워.”
동희는 상엽의 귀환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프로토를 이긴 실력자에게 신을 죽이는 공식까지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희가 나가고 상엽은 붉게 물든 해머를 다시 보았다. 예방액을 먹어서 그런지 더 이상 비린내가 느껴지진 않았다.
“준비는 완벽해.”
최강의 무기를 얻었고 성장도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긴장보다는 담담히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되었을 때, 상엽은 테니아 외곽에 건설된 차원 기둥으로 이동했다.
블랙 해머들과 테리아 그룹의 간부들, 코드 제로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상엽을 향한 감정은 제각각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같았다.
“산적 오빠! 꼭 돌아와요! 기다릴게요!”
송연지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저마다 준비한 말을 했다.
“빨리 돌아오세요!”
“전부 박살 내 버려요!”
“신 따위! 인간의 힘을 보여 주세요!”
“꼭 다시 만나요!”
“기다릴게요!”
상엽은 그들의 인사를 들으며 천천히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가 기둥의 한 발 앞에 서자 주변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상엽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 더 긴장한 표정이었다.
“준비됐나?”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심각해?”
스트라인버그의 질문에 상엽이 핀잔을 주었다.
“신들을 처단하러 가는 출정식인데 이 정도 분위기는 맞춰 줘야 예의가 아닌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상대는 신이야. 그것도 치열한 전쟁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존재들이지.”
“강한 놈이 이기겠지.”
“그 자신감은 언제 봐도 멋있어.”
스트라인버그는 상엽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상엽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자신을 배웅 나온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녀올게.”
잠시 여행을 가는 것 같은 말투였다. 상엽은 그 말을 하고는 스트라인버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동합니다.”
차원 기둥 전체가 강렬한 스파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스파크가 서로 뒤엉키며 세세하게 새겨 넣은 문양으로 스며들었다.
문양들이 푸른빛을 뿌렸고 기둥의 가장 아래에 작은 원이 생성되었다.
스트라인버그는 상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된 것이다.
상엽은 주저하지 않고 원 위로 올라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탄 기분이었다.
몸이 치솟는 기분이 끝나자 검게 물들었던 시야가 밝아졌다.
언뜻 보기에 상엽이 살던 지구와 별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폐를 시원하게 만드는 맑은 공기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조명처럼 편안한 태양이 걸려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낮은 잔디 사이에 같은 간격으로 서 있는 허리 높이의 나무에는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는 붉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넓은 초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져 있었고 그 외의 다른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륙의 외곽이에요.
성아의 말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도착했는지 의심을 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면 돼?”
성아가 있어서 상엽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일단 조사가 필요해요. 저도 이곳에 온 후로 전쟁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요.
“신들이 몇 명이나 남아 있었어?”
-100명이 되지 않았어요.
“더 줄어들었겠네.”
-아마도요.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에요.
성아가 인간계로 온 지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그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을 수도 있었다.
“어디로 가면 돼?”
-근처에 방문자들의 숙소가 있어요.
“방문자의 숙소?”
-신들의 허락을 받고 이 세계로 온 자들이 자격 심사를 받는 곳이에요. 일단 거길 통과해야 해요.
“공항 검색 같은 거네.”
상엽은 성아의 안내를 받으며 신들의 대륙을 걷기 시작했다.
방문자들의 숙소로 가는 동안, 상엽은 인간계와 다른 여러 광경을 보았다.
작은 뿔을 가진 토끼부터 무지개 잔상을 남기는 작은 벌레도 있었다.
잔디로 보이던 풀도 직접 밟아 보니 무척 억세서 발이 뜰 정도였다.
그 이질감을 뒤로하고 어렵지 않게 방문자의 숙소에 닿았다.
방문자의 숙소는 개선문 같은 형태의 하얀 석조 건물을 통과하면 나타났고 신의 대륙이라는 위용을 보이고 싶은지 100미터에 이르는 직선 길옆으로 40개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40개의 석상은 모두 다른 모습으로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신들의 모습이었다.
“이 중에 몇 명이나 살아 있을까?”
“제가 떠날 당시에 이미 절반이 소멸했어요.”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답이었다.
방문자의 기를 죽여 놓는 50미터짜리 석상 길을 지나면 쓸데없이 크게 지어 놓은 신전 형태의 건물이 나타났다.
고대 로마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지만 유지 보수가 완벽했고, 작은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한 바닥을 밟고 들어서자 재단 같은 석상에 10미터 거인이 앉아 있었다.
“지금은 방문자를 받지 않는다.”
거인은 신전 전체를 울리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상엽의 방문을 불허했다.
“진실의 신입니다. 제 권한으로 방문자의 허가를 요청합니다.”
성아가 나서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신의 동행으로 별다른 절차 없이 방문자의 숙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상엽은 거인의 축객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동요 없이 성아를 따라 움직였다.
숙소 지역을 통과하자 곧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초원이 사라지고 끝도 없이 펼쳐진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균열의 흔적도 없이 하나의 판으로 된 것 같은 대리석은 마치 바다를 보는 듯했다.
“낭비가 심하네.”
“물질의 창조는 신의 권한으로는 너무나 쉬운 일 중의 하나랍니다.”
“부자 동네라는 거지?”
“인간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신에게 황금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돌일 뿐이니까요.”
“좋아. 그건 그렇고 내가 제일 먼저 죽여야 할 놈은 어디 있는 거야?”
“일단 제 신전으로 가요.”
성아는 방문자의 숙소를 통과한 이후로는 계속해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잡으세요.”
성아가 내민 손을 잡자 상엽의 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공간을 왜곡시키며 빠르게 이동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상엽은 하늘색의 깨끗한 신전 안에 도착했다.
“편리하네.”
“당신도 곧 쓸 수 있게 될 거예요. 신으로 인정만 받으면.”
“신이 되는 절차도 있어?”
“신에게 도전해서 이기면 돼요. 물론 신이 받아 줘야 하지만.”
“강제로 죽이면?”
“다른 신들의 분노를 사게 되겠죠.”
상엽은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내 첫 번째 목표를 알 수 있을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성아는 10미터 기둥이 하늘을 받치는 형태로 되어 있는 신전의 입구로 나섰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깃털을 가진 새 한 마리가 그녀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새는 천천히 성아의 어깨로 걸어가더니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성아는 오랫동안 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상엽에게 결과를 말했다.
“서른 명의 신이 남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잠시 전쟁이 멈춘 상태예요.”
“전쟁이 멈췄다고?”
“프로토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난 뒤에요.”
상엽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나 때문이라는 거지?”
“그런 것 같아요. 그들은 당신이 신의 대륙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잘됐네. 복잡한 절차는 필요 없겠어.”
상엽이 그 말이 끝낼 때쯤이었다.
신전을 감싸던 푸른 하늘 위에 갑자기 검은 선이 그어졌다.
“누가 왔어요.”
“독특한 초인종이네.”
성아는 손을 들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거울 같은 공간이 나타나 상대의 모습을 비춘 것이다.
“지혜의 신이에요.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신 중의 한 명이죠.”
“나 때문에 온 건가?”
“방문자의 숙소를 통과했으니 모두에게 알려졌을 거예요.”
“들어오라고 해.”
상엽은 가장 먼저 찾아온 신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다.
성아가 공간을 어루만지듯 손을 내리자 거울 같은 공간에 있던 신이 나타났다.
그는 상엽과 비슷한 신장에 인위적인 웃음을 가진 외모였다. 목과 얼굴을 제외한 모든 신체는 펑퍼짐한 검은 로브에 가려져 있어서 손바닥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살이 붙지 않은 얼굴에 비해 로브가 너무 커서 그 안에 뭔가를 숨겨 두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토를 죽인 자가 자네인가?”
“그런데. 넌 누구야?”
“하하. 난 지혜의 신 칼로프라고 하네.”
“내 첫사랑 이름이 지혜였는데.”
“응? 뭐라고 했나?”
“아니. 내가 아는 지혜랑 너무 달라서.”
상엽은 상대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심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성아가 한 발 물러나서 대화에 전혀 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성아를 부하처럼 생각하는 행동이었다.
“난 신의 대륙 제사장 중의 한 명이네. 쉽게 말해서 다섯 명의 주요 신 중의 하나라는 거지. 아 참, 자네가 프로토를 죽였으니 이제 넷이군.”
그는 은근히 상엽의 업적을 치하하면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필했다.
“그래서?”
“자네에게 관심이 많아. 신의 대륙에서…….”
“긴 설명은 됐고. 의도를 말해.”
상엽은 긴 대화를 원하지 않았다.
“화끈한 사내인 것 같으니 나도 따라 주지. 서로 손을 잡는 것이 어떤가?”
“같은 편이 되자고?”
“그렇다네.”
“신도 꽤 치사하네. 인간의 도전에 분노하면서 당장 싸움을 걸 줄 알았더니.”
상엽은 그의 제안을 비난하며 결론을 말했다.
“내 수하가 된다면 받아 줄게.”
“지금 뭐라고 했나?”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그럼 살려 줄 테니까.”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상엽의 진심을 알게 된 칼로프는 그런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재미있는 인간이라더니. 역시 흥미로워.”
칼로프는 슬쩍 성아를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펑퍼짐한 로브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붉은 송곳니를 가진 독사들이었다.
빠른 속도로 튀어나온 30마리의 뱀은 순식간에 상엽의 급소를 물어뜯었다.
“쉽게 만들어 줘서 고마워.”
상엽은 다가오는 독사를 보며 물러서지 않았다.
‘기습에는 기습으로.’
예상하지 못한 기습은 가장 위험한 공격이다. 그러나 상엽은 이런 기습을 예상했다.
툭. 툭. 툭.
방패를 세워 다가오는 독사들을 순식간에 튕겨 낸 상엽은 칼로프의 지척에서 해머를 꺼냈다.
칼로프의 표정에서 웃음이 지워진 것도 그때였다. 그는 재빨리 몸을 물리며 상엽이 휘두르는 해머를 피했다.
츳!
겨우 해머의 모서리가 칼로프의 어깨를 스치는 것으로 공격이 끝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노한 표정으로 다시 반격을 하려던 칼로프가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렇게 거짓말처럼 소멸해 버렸다.
놀란 것은 소멸한 칼로프뿐만이 아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성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신, 그 공식을 완성한 건가요?”
성아는 대번에 상엽의 해머에 떠오른 문양을 알아봤다.
“걱정 마. 너한테 쓸 일은 없을 테니까.”
상엽의 대답에 성아는 몸을 떨었다.
“자, 이제 신들을 처단하러 가 볼까?”
신의 대륙에 들어온 지 불과 1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