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세상에서 한 공간이 사라진 듯했다.
하늘에서 시작된 충격파는 넓은 하늘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고 이로 인한 후폭풍이 형성되었다.
구름이 밀려나고 바람은 태풍보다 강렬했다.
그 모든 힘이 집중된 곳에서 형성된 빛은 지구에 또 하나의 태양을 떨어트린 것처럼 모든 것을 감춰 버렸다.
그렇게 밝게 빛나는 태양도 다행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사라졌다.
종말 같은 울림을 만들어 낸 한 번의 충격.
그 중심에는 소멸한 해머와 금이 간 방어벽이 있었다.
‘못 뚫었어.’
방어벽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결국에는 버텨 냈다.
반면 프로토의 일격은 이미 상엽의 몸에 닿아 있었다.
“크아!”
상엽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지금껏 전투를 하면서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상엽은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피부가 모두 검게 타오르는 중에도 방패를 꺼냈다.
은빛 방패는 프로토의 지팡이와 상엽을 연결하는 전류의 흐름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방패를 쥐고 있는 상엽의 힘이 떨어짐에 따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다.’
상엽의 생각은 짧았다. 이제는 많은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파괴전차.’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상엽은 방패를 세우고 금이 간 방어벽을 향해 돌진했다.
‘마지막 기회야.’
지금 깨트리지 못하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상엽은 가능한 모든 힘을 짜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방어벽과 상엽이 충돌을 앞뒀다. 이번에는 상엽이 직접 돌격한 것이라 방패가 있다 해도 어마어마한 충격이 돌아올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확실히 깨트리는 것뿐이었다.
“이놈!”
프로토는 분노한 괴성을 지르면서 다가오는 상엽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거대한 손바닥이 보였음에도 상엽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욱 높였다.
‘팔각 대시.’
손바닥의 경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상엽은 드디어 방어벽에 닿았다.
‘제발!’
전투에서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났을 때, 상엽은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쩌저적!
방어벽이 깨진 것이다.
프로토의 단단하던 방어벽이 드디어 깨졌다. 게다가 상엽을 붙잡으려는 행동으로 인해 동작에 큰 틈이 생겼다.
‘지금 간다.’
상엽은 파괴전차의 방향을 프로토의 머리로 틀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얼굴을 보며 상엽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프로토의 눈이 이글거리더니 접근한 상엽을 향해 넓게 퍼지는 부채꼴의 빛을 뿌렸다.
그런데 상엽은 빛이 채 닿기도 전에 투명한 상태로 변했다.
유령 걸음.
파괴전차는 진짜 공격이 아니었다.
속도를 이용해 거대한 머리를 통과한 상엽은 프로토의 뒷목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스킬을 펼쳤다.
-신의 스킬, 지옥의 축제
상엽이 가진 가장 강력한 한 방이 펼쳐졌다.
사방으로 뻗은 악마의 마수는 프로토의 본체를 직접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피부를 뚫어 내진 못했지만 몇몇 마수는 피부에 깊숙이 박히는 성과를 얻었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장에 변화가 생겼다.
고통.
프로토는 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고통은 프로토를 분노하게 했고 상엽을 향한 거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상엽에겐 기회가 되었다.
쾅! 쾅!
거대한 몸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많은 약점이 노출되었다.
그때부터 상엽은 프로토의 몸에 바짝 달라붙으며 해머를 휘둘렀다.
첫 공격 성공을 시작으로 열 번, 스무 번까지 타격이 이어졌다.
프로토는 고통이 쌓일수록 분노하기 시작했고, 결국 몸 안에 있던 힘을 분출해 상엽을 밀어내려 했다.
‘밀려나면 끝이다.’
상엽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해머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을 느꼈다. 피부는 재생이 느려질 만큼 벗겨진 상태였고, 지나치게 흘린 피로 인해 현기증도 있었다.
‘버텨야 돼.’
고스트 체인.
상엽은 프로토의 허리에 고스트 체인을 감았다.
“으으!”
상엽은 몸을 찢을 것처럼 분산되는 힘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고통의 시간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프로토는 분노한 만큼 길게 힘을 쏟아 냈다.
그런데 상엽은 어느 순간, 프로토의 피부가 약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었다.
고스트 체인이 프로토의 허리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시.’
챙!
고스트 체인에서 가시가 솟았다. 그러자 체인 주변으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신의 피.
‘1분 남았어.’
상엽에게 주어진 시간은 1분이었다.
여전히 분출되는 기운은 강했지만 상엽은 지금이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 필요한 시점임을 알았다.
힘을 분출하느라 프로토의 피부가 약해진 것이다.
‘해야 돼.’
지금 그는 모든 방어 스킬을 동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의 축제를 펼치려면 방어 스킬을 거두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결국 상엽은 방어 스킬을 풀었다. 순간, 엄청난 압박이 상엽의 몸을 덮쳤다.
피부와 근육, 뼈가 그대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상엽은 본능적으로 스킬을 펼쳤다.
신의 스킬 지옥의 축제.
그 결과를 볼 틈도 없이 상엽의 몸은 고스트 체인을 벗어나 바닷물이 들어찬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뜨거운 액체가 그의 몸을 덮쳤다.
‘피.’
프로토의 피였다.
프로토의 허리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것이다. 하지만 상엽은 이를 보고도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의지가 행동으로 발현되지가 않았다.
‘지금 가면 이길 수 있어.’
프로토의 모든 행동이 멈춰 있었고 구멍 난 허리로 빛으로 이루어진 푸른색의 뼈가 보였다.
‘한 방이면 돼.’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그는 전기를 가득 품고 있는 바닷물 위에 있었다.
‘끝.’
이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추락이 멈췄다.
-포기하지 말아요.
성아였다.
그녀가 공기의 압력을 조절해 상엽의 추락을 막아 주었다.
-다음 기회를 노려요. 당신은 충분히 훌륭했어요.
지옥마가 주인의 상태를 눈치채고 재빨리 다가왔다. 그리고 가시 같은 털을 움직여 상엽을 등에 태웠다.
히잉!
다급한 울음소리를 토해 낸 지옥마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전장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옥아, 그쪽이 아니야.”
상엽은 지옥마의 탈출을 막았다.
“저쪽이야.”
상엽은 손을 들어 프로토를 가리켰다. 그런데 지옥마는 명령을 듣지 않고 망설였다.
“빨리!”
결국 상엽이 소리쳤다. 이에 지옥마는 놀라서 프로토를 향해 뛰었다.
-무모해요.
성아가 말렸지만 상엽은 멈추지 않았다.
‘안 도와줄 거면 구경이나 해.’
그 순간, 프로토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다가오는 상엽을 보며 지팡이를 뻗었다.
타이밍이 워낙 절묘해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프로토의 지팡이 앞에 뭔가가 나타났다.
-당신의 의지를 존경해요.
성아였다.
그녀가 직접 프로토의 지팡이 앞에서 방어벽을 만들었다.
프로토의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전기를 성아는 스스로 모두 빨아들였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덕분에 상엽은 본래의 계획대로 프로토의 허리에 닿았다.
‘마지막 기회.’
상엽은 떨리는 두 손으로 해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지옥마의 속도가 최고에 달한 순간,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그의 몸이 지옥마를 벗어나 프로토의 허리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실패하면 죽는다.’
상엽은 눈앞을 가득 메운 빛의 기둥을 보았다.
인간에겐 척추였고, 신에겐 힘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상엽에겐 거대한 건물을 이루는 기둥으로 보였다.
‘철거 시작.’
상엽은 빛의 기둥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그런데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으아아!”
상엽은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괴성이 최고에 달했을 때,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다.
우우웅!
악마성의 기둥이 상엽의 힘을 모두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바람을 가르며 척추를 향했다.
“죽어!”
콰콰쾅!
모든 것을 건 한 방이 드디어 프로토의 척추에 꽂혔다.
상엽은 손끝을 통해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철거 성공.’
기둥은 무너졌다. 그 느낌을 끝으로 상엽은 정신을 잃었다.
* * *
긴 꿈을 꾸었다.
악몽과 추억이 뒤섞인 꿈이었다.
그리운 누나를 보았고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원한도 보였다.
그 꿈속에서도 상엽은 당당했다.
자기 사람을 안아 주었고, 죽였던 자들을 다시 한번 죽였다.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죽였지만 너무나 사랑한 사람들.
강청, 마루나, 김만득.
그 외에도 지켜 주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테니아의 시민들.
‘죽은 건가?’
삶의 모든 것이 펼쳐진 것을 깨달았을 때, 상엽은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상엽은 눈을 떴다.
“상엽아!”
“코드 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았구나.’
꿈은 거기까지였다.
상엽은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는 금세 회복이 되었고 감격과 걱정으로 뒤섞인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산적 오빠!”
눈물을 터트리는 송연지부터 길게 한숨을 쉬는 적설도 보였다.
상엽에게 먹인 약병을 든 채로 웃고 있는 동희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표정의 루시도 있었다.
그 뒤로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박광신이 있었고, 무표정이지만 물기로 젖은 사하르도 있었다.
모두 상엽에겐 소중한 사람이었다.
“상엽아, 이제 괜찮을 거야.”
동희가 상엽을 치료한 것이다.
“프로토는?”
상엽은 그 질문을 하며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제발 원하는 대답을 듣길 원했다.
“죽었어. 네가 해낸 거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프로토는 힘든 상대였다.
마음이 가벼워진 상엽은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해.”
동희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자 잠깐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 감각은 곧 사라졌다.
싸우러 갈 때처럼 멀쩡해진 상엽은 그제야 시간을 물었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던 거야?”
상엽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동희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한 시간쯤?”
“응? 그렇게 짧아?”
“네가 누군지를 생각해.”
상엽은 그 말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에이씨. 며칠 만에 깨어나야 있어 보이는데.”
허탈해진 상엽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미안. 내가 깨웠어. 몸이 다 회복된 거 같아서.”
“고마워.”
“이제 다 회복됐으니까 밥 먹자. 내가 특별히 준비했어.”
“그것 때문에 깨운 거야?”
“응. 보양식이야. 몸에 좋아.”
“혀도 몸이…….”
상엽은 뭔가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좋아! 다 같이 먹자!”
“헤헤. 알았어! 얼른 준비할게!”
동희는 신이 나서 소리쳤고 다른 이들은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그냥 죽는 게 나았을지도…….”
적설이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상엽이 말했다.
“내 제삿밥도 동희가 차렸을걸?”
그 말에 모두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프로토가 소멸했다. 이 부분은 성아를 통해 한 번 더 확인됐다.
갓코인 시스템은 사라졌고 블랙과 화이트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이제 다 내 거야.”
상엽은 그렇게 말했다. 장난 같은 말이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테니아 재건과 함께 테리아 그룹이 다시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단체가 생겼다.
국제관리기구 코드 제로.
코드 제로는 전 세계를 관리하는 기구가 되었다.
어느 국가도 상엽에게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고 코드 제로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나마 국가의 영토와 이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정상엽은 신이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했다.
-이 세계는 정상엽의 것이다.
이 역시 자연스러운 보상이었다.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은 상엽은 어두운 방의 책상에서 스탠드 하나만 켠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아무도 없어.’
프로토와 싸울 때도 이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행여나 실수를 할까 봐 몇 번이나 주변을 다시 살폈다.
‘유령아.’
-안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상엽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에 두 개의 나무 막대가 걸렸다.
“드디어…….”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연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동희의 보양식에 빠져 있던 세상의 지배자는 그렇게 몰래 라면을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