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싸울 필요 없어!”
송연지는 다급하게 블랙 해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싸움의 끝은 블랙 해머와 데스 나이트가 아니었다. 상엽이 김만득을 잡으면 모두 끝날 일이었다.
송연지와 적설, 사공강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블랙 해머들도 정면충돌보다는 물러서는 방법을 택했다.
친위대들이 이미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덕분에 블랙 해머의 후퇴가 가능했다.
‘너무 많아졌어.’
당장 작전은 성공했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뱀파이어 500명이 전장에 합류했다.
그중의 300명은 통곡의 벽을 감싸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앞을 막는 벽을 뚫으려 했고, 통곡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벽이 뚫리고 김만득이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면 전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흐를 것이다.
‘산적 오빠 말고는 전부 죽을 거야.’
후퇴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정면 대결은 무리인 상황이 되었다.
싸움의 승패는 결국 통곡의 벽 안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이 정도라면 실망인데.”
김만득은 도주를 하지 않고도 훌륭한 실력을 보였다.
상엽이 맞서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끝내야 돼.’
이 싸움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도주를 한다면 모두를 안전하게 대피시킬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쩌적!
둘이 치열하게 공방전을 주고받을 때, 통곡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당연히 상엽에게 압박이 되었다. 그리고 김만득은 보란 듯이 전투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벽이 뚫리길 바라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함정.’
상엽은 김만득이 자신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뭔가가 있어.’
통곡의 벽에서 전투를 하면서 상엽은 결국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김만득이 자신을 끌어들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받아 줘야지.’
상엽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김만득이 원하는 대로 앞으로 튀어 나간 것이다.
그렇게 둘의 눈동자에 서로가 비칠 만큼 가까워졌을 때였다.
펑!
김만득의 몸이 갑자기 연기로 흩어지더니 상엽을 집어삼켰다.
-신의 스킬, 죽음의 기운
상대를 완전히 감싸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스킬이었다.
오직 죽음의 신전에서만 얻을 수 있었고, 신의 전쟁에서도 가장 경계하던 기술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상엽은 검은 기운에 완전히 잠식되었다.
상엽의 피부가 빠르게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눈동자에서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상엽은 모든 방어 수단을 동원했지만 죽음의 기운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김만득은 집요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킬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였다.
-신의 스킬, 꼬리 자르기
상엽은 피부 전체를 버리고 그 자리를 탈출했다.
피부를 모두 잃은 기괴한 모습이 된 채로 목숨을 건진 상엽은 곧바로 또 하나의 스킬을 펼쳤다.
‘회생.’
김만득이 반응할 틈도 없이 상엽의 몸이 완전히 재생되었다.
화르르!
상엽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 김만득을 향해 화염의 정수를 담아 한 방을 날렸다.
쾅!
통곡의 벽 안이 전부 화염에 휩싸였다.
쾅! 쾅!
상엽은 연기로 흩어진 김만득을 태워 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화염의 기운을 쏟아부었다.
우우웅!
통곡의 벽 안이 화염으로 가득차고 과도하게 공기를 주입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화염 파도.’
상엽은 통곡의 벽이 터지는 것을 무시하고 오히려 더욱 많은 화염의 기운을 만들었다.
그렇게 화염이 한계치까지 차오르자 김만득이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화염으로 인해 몸이 타 버린 그는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피부 곳곳이 벗겨지면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아직 아니다.’
김만득은 화염 속에서 상엽이 뛰어오는 것을 보며 마지막 스킬을 펼쳤다.
죽음의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얻은 스킬이었다.
-신의 스킬, 데스 스피어
죽음의 신이 애용하던 무기이자 스킬이었다.
한순간, 김만득의 몸이 길게 늘어지며 10미터 길이의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그리고 뛰어오는 상엽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엄청난 기세에 상엽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끝낸다.’
상엽은 돌진 속도를 오히려 높였다. 그리고 해머를 버리고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신의 스킬, 시라드라의 방패
은빛 방패가 돌진하는 상엽의 전방에 나타났다. 몸을 모두 감쌀 만큼 거대한 방패였다.
그리고 창과 방패가 충돌했다.
콰쾅!
통곡의 벽이 깨지고 거기서 퍼져 나온 화염이 해일처럼 주변을 집어삼켰다.
악마의 위협 같은 굉음을 뿜으며 튀어 나간 화염은 한순간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다가 거짓말처럼 침묵을 선사했다.
그 침묵의 근원은 한 지점에 있었다.
검은 창과 은빛 방패의 충돌.
그곳은 태초의 탄생 같은 하얀 빛이 생성되어 있었다.
충돌로 만들어진 빛은 기괴하기보다 신성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하더니 소음이 발생했다.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겼어.”
송연지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금이 간 것은 검은 창이었다.
은빛 방패에 닿아 있던 창끝이 균열을 보였고 이는 곧 전체로 전염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완전한 파괴였다.
챙!
검은 창이 압력을 이기지 못한 유리잔처럼 깨져 버렸다.
“후우.”
상엽은 한순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은빛 방패는 훌륭히 버텨 냈다.
“큭!”
창이 깨지고 만신창이가 된 김만득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된 김만득은 뼈가 모두 부러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강인하던 눈빛에는 힘이 빠졌고 냉정하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모든 것을 건 도박에서 실패한 자의 모습이었다. 상엽은 그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약속은 지킬게요.”
쾅!
상엽은 괴로워하는 김만득의 심장에 해머를 꽂았다.
스스스.
김만득이 죽으면서 데스 나이트도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검은 재로 흩어졌고 전장은 외로운 느낌의 정적만이 남았다.
“후우.”
상엽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몸이 아니라 감정을 달래는 한숨이었다.
“이제 하나 남았어.”
김만득과 이하나를 처리했다.
이것으로 블랙 유저의 중심은 완전히 무너졌고, 뱀파이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화이트 유저와 프로토뿐이었다.
화이트 유저가 감히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결국 적은 한 명뿐이었다.
“프로토. 네 계획은 실패했어.”
갓코인 시스템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 * *
블랙과 화이트.
이들의 전쟁은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승자는 그 중간에 있는 상엽이었다.
김만득이 죽는 순간, 모든 갓코인 상점은 사라졌다.
상엽이 더 이상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프로토의 결정이었다.
‘내가 죽으면 다시 시작하겠지.’
사람들은 이미 특별함을 맛봤다. 그래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갓코인 전쟁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고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혼자 갈게.”
상엽은 그렇게 말했다.
뱀파이어까지 모두 처리된 상황이라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모든 싸움을 이긴 승자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시험 같은 느낌이었다.
“오빠, 꼭 돌아와요.”
“선물로 화끈한 걸 준비할게.”
“이거 가지고 가. 필요할 거야.”
응원밖에 할 수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동희는 단 한 병의 음료를 건넸다.
자줏빛의 긴 막대 같은 유리병 안에서 수백 개의 하얀 알갱이가 떠다니는 모습이었다.
“내 마지막 작품이야.”
“걱정 마.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응. 내가 말실수를 했어. 맛있는 거 해 놓고 기다릴 테니까 빨리 돌아와.”
상엽은 마지막으로 사하르 앞에 섰다.
“기다리겠습니다.”
뭔가 특별한 말을 하려던 상엽은 그 말을 듣고 그만두기로 했다.
“다녀올게.”
잠시 마트에 라면을 사러 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 상엽은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 있던 먹구름이 걷혔다.
지상을 장악하던 수많은 괴수들이 사라졌고, 오직 한 사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명의 흔적이 사라진 땅.
그곳에 홀로 서 있는 이는 프로토였다.
히잉!
상엽을 태운 지옥마는 긴 울음소리를 내며 하강을 시작했지만 프로토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서 그만큼 깽판을 쳤으면 미안한 표정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상엽은 프로토 앞으로 뛰어내렸다.
겨우 열 걸음 거리였다.
“갓코인이 아니었다면 넌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게 더 행복했을 수도 있어.”
“행복이라고 했나? 크크. 욕심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행복은 잠시 동안의 즐거움일 뿐이지. 진정한 행복을 인간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따위 시선으로 인간을 보니까 네 끝이 이런 거야.”
“넌 결국 신에 저항한 많은 인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에 이름 하나를 남기겠지. 아주 비참한 이름으로.”
프로토는 여유로웠다. 그 여유가 상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대화는 좋은 사람이랑 해야지. 너랑 대화는 별로 재미가 없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뭔지 모르지만 거절할게. 무기나 꺼내.”
상엽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해머를 꺼냈다.
악마성의 기둥은 이 전투의 중요성을 아는지 곧바로 어두운 기움을 뿜어냈다.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승리를 빨리 맛보고 싶을 뿐이야.”
“넌 이제부터 진짜 신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거참, 말 많네.”
쾅!
상엽은 듣기 싫다는 듯이 해머를 휘둘러 기파를 날렸다.
프로토는 맹렬한 기파를 보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방어막도 만들지 않고 몸으로 기파를 견뎌 냈다.
프로토에게 기파는 그저 조금 강한 바람일 뿐이었다.
머리카락과 하얀 옷이 등 뒤에서 나풀거리다 기파가 사라지자 제자리로 돌아왔다.
‘힘든 싸움이 되겠어.’
지금껏 누구도 상엽이 만들어 낸 기파를 이렇게 견뎌 내지 못했다.
“이제 대화가 하고 싶어졌나?”
“그러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상엽은 해머를 어깨에 걸치고 왼 주먹을 내밀었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을 하늘을 향하도록 폈다.
“엿 먹어, 개새끼야.”
그 말에 프로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인간이 단어를 잘 만들어 내거든. 그중의 최고가 바로 욕이야.”
“무엄하구나!”
“무엄은 지랄.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게 될 거야. 욕만 있는 게 아니거든.”
상엽은 그 말을 끝내며 프로토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힘을 집중시키며 강하게 해머를 휘둘렀다.
쾅!
프로토는 이번에도 신의 자존심을 보여 주고 싶은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큭!’
상엽은 해머가 멈추고 튀어나오는 반탄력에 근육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그의 해머는 프로토의 몸에 닿으면서 멈춰 버렸고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상대는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넌 용서의 기회를 잃었다.”
프로토는 분노한 표정으로 상엽을 노려보았다. 이에 상엽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저씨, 피 나요.”
상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로토의 볼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렀다.
“신도 피는 빨간색이네.”
“죽여 주마!”
“닥쳐.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상엽은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번개를 피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쾅!
그가 있던 자리는 번개가 떨어지면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구멍이 생겼다.
‘후우.’
상엽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숨을 내쉬며 프로토를 노려보았다.
친위대를 소환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이 싸움은 혼자의 힘으로 해야 했다.
치칙!
이번에는 프로토도 더 이상 상엽을 기다리지 않았다.
맑은 하늘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형성되었고 곧장 상엽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다시 한번 자리를 피한 상엽은 한 발을 물러났다가 곧장 프로토를 향해 뛰었다.
‘개싸움으로 간다.’
스킬의 강력함으로 프로토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상엽은 접근전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