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싸움은 정면충돌로 시작되었다.
상엽은 이 부분에서는 자신감이 있었다.
김만득은 어차피 자신이 상대해야 했고, 아홉 명의 은거 고수들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40명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블랙 해머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역시.’
이런 전력의 차이를 알면서도 블랙 울프가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하늘에서 엄청난 박쥐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하나를 필두로 한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정세는 오히려 상엽이 불리한 듯이 보였다.
‘할 만해.’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던 바였다.
지금 프로토에겐 상엽을 죽이는 것이 우선이었고, 어쩌면 직접 나설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때는 모든 것을 걸고 프로토를 상대할 작정이었다.
‘프로토는 없어.’
여전히 프로토는 상엽을 제거한 후에 갓코인의 본래 목적을 실행하려 했다.
‘집착이 심하네. 이미 망가졌는데.’
상엽은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한 대로 전투에 나섰다.
‘사하르.’
사하르를 포함한 열 명의 전사들이 상엽의 자리를 대신했다.
김만득을 상대하는 것이다.
반면 상엽은 뱀파이어들이 쏟아지는 하늘로 솟구쳤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 미리 전략을 세워 놓았고 사하르와 정예들이 핵심 역할을 맡았다.
-김만득을 봉쇄해. 내가 뱀파이어들을 처리할 때까지만.
이것이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상엽은 박쥐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구름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파괴의 일격이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해 펼쳐졌고, 이 한 방으로 미처 뱀파이어로 변신도 하지 못한 박쥐 50마리가 소멸되었다.
‘속도전이야.’
상엽은 뱀파이어들을 모두 처리하고 회생을 쓸 생각까지 했다.
이를 위해 힘을 처음부터 쏟아부었다.
-신의 스킬, 절망의 파동
-신의 스킬, 데스 서클
두 스킬이 하늘에 지옥도를 펼쳐 놓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상엽은 파괴전차로 쏟아지는 뱀파이어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뱀파이어들을 이끌고 왔던 이하나는 상엽이 펼쳐 놓은 스킬의 그물에 자신의 살길을 찾기도 바빴다.
“이게 무슨…….”
천 명의 뱀파이어는 마지막 병력이었다.
프로토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병력이었고, 이번 전투에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정상엽을 제거한다면 널 신으로 만들어 주마.
그러면서 강력한 힘을 다시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이하나는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새로 영입된 천 명의 뱀파이어가 기존의 전사들처럼 강력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지는 힘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출발하기 직전만 해도 이하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이제 프로토를 버려도 되겠는데?
그런데 정상엽이 펼친 스킬들의 향연에 이미 300명의 뱀파이어가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스킬은 끝이 아니었다.
700명의 뱀파이어들은 공중에서 폭발하는 폭죽 같았다.
그런데 끝도 없이 펼쳐지던 스킬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이하나는 그제야 제대로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300명이 넘는 뱀파이어들이 이미 소멸했고, 그 원흉을 태운 지옥마는 여전히 하늘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이하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엽의 공격이 멈췄다는 것이 불안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공격과 철수, 그리고 방어.
무수한 선택지 중에 무엇을 명령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짧은 고민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음을 알았다.
광전사의 의지.
힘을 압축하는 광전사 특유의 스킬이 오랜만에 펼쳐졌다.
과도한 힘이 소모되고 준비 시간이 있어서 치열한 전투에서는 쓰지 않던 스킬이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이 당황하는 그 시간 동안 상엽은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신의 스킬, 지옥의 축제
3번을 압축한 지옥의 축제가 펼쳐졌다.
지옥마에서 뛰어오른 상엽의 몸에서 수백 개의 검은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마수들은 아직 제대로 진형도 갖추지 못한 뱀파이어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지옥의 축제였다.
파괴와 소멸, 비명이 가득했다.
상엽이 뿜어낸 절망의 기운들은 잔인하고 집요하게 뱀파이어들을 유린했다.
하늘을 수백 마리의 거대한 구렁이가 가득 메운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고, 구렁이의 머리는 어김없이 뱀파이어의 몸을 꿰뚫었다.
“어떻게…….”
이하나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믿었던 수하들은 상엽이 뿜어낸 기운을 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소멸했다.
살아남은 것은 이하나 그녀뿐이었다. 가장 먼저 내려온 덕분에 그나마 거리가 멀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쿵!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검은 마수가 그녀의 몸을 때린 것이다. 그나마 이하나의 강력한 망토가 충격을 막아 주었다.
푸스스.
망토는 이하나를 살렸지만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인해 회색 재로 흩어졌다.
그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도망가야 돼.’
나타날 때의 기세와 자신감은 30초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이길 수 없는 상대야.’
그녀는 이렇게 느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주를 결심하자 상엽과 눈이 마주쳤다.
이하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를 그냥 둘 상엽이 아니었다.
“인연이 쓸데없이 너무 길었어.”
등까지 보이며 도주하는 이하나의 곁에서 상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악!”
이하나는 마지막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공격을 시도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의 기운이 상엽을 덮친 것이다.
“아…….”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알았다. 상엽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받아 냈다.
그런데도 상엽은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툭.
결국 상엽이 그녀의 목을 잡았다.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점은 아쉽네.”
“제, 제발…….”
이하나는 죽음 앞에서 목숨을 구걸했다.
“뭐, 뭐든지 다 할게. 시키는 건, 뭐든지…….”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작은 희망이라도 잡아 보려 몸부림을 쳤다.
“나, 날 봐. 난 이런 가치가 있어.”
그녀의 몸부림에 몸을 감싸던 아슬아슬한 옷이 벗겨졌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이지만 그녀의 나체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를 본 상엽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징그럽네. 내가 비위가 꽤 좋은 편인데 말이야.”
푹!
이하나의 동공이 커졌다.
상엽의 손이 그녀의 명치 부근을 관통하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끄윽.”
이하나는 뭔가 다시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상엽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이제 꺼져.”
팍!
이하나의 심장이 상엽의 손아귀에서 터져 버렸다.
이하나는 죽기 직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상엽을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재로 흩어졌다.
나름대로 사연이 많은 인생을 살다가 소멸했지만 상엽은 그에 대한 어떤 연민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피가 묻은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전장을 확인했다.
‘다행이야.’
김만득은 강했다. 그를 상대하는 10명의 블랙 해머들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소멸하지 않았다.
상엽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러서.”
뱀파이어들을 정리한 상엽이 직접 전장에 합류했다.
쾅!
상엽의 기습적인 합류에 김만득이 양손을 교차하며 해머를 막았다.
그의 앞에 검은빛의 방패가 생성되며 강력한 일격을 막아 냈지만 5미터나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부상자들은 물러서.”
상엽은 지금까지 버텨 준 사하르와 수하들을 전장에서 이탈시키고 자신이 직접 김만득을 상대했다.
그런데 김만득은 상엽이 나타났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
김만득은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엽은 그의 독기 어린 눈빛에 숨겨 둔 한 수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힘으로 누르면 돼.’
그럼에도 상엽은 주저 없이 선공에 나섰다.
김만득이 반격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이미 김만득을 제외한 전장의 상황은 블랙 해머의 압승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홉 명의 고수 중에 살아남은 건 세 명뿐이었고, 뒤늦게 합류한 자들은 이미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수적으로 우세에 있는 블랙 해머들은 숨 쉴 틈도 없이 남은 세 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길어 봐야 1분.
그 안에 싸움이 끝날 듯했다. 그리고 이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상엽과 김만득이 전투를 펼치는 사이, 끝까지 버티던 3명이 소멸했다.
그런데 이를 확인한 김만득은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툭.
갑자기 그의 몸이 잔상 하나를 남기고 100미터 뒤로 쏜살처럼 물러났다.
쾅!
잔상은 상엽에 의해 제거가 되었지만 본체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그런데 그가 물러난 100미터의 거리에 검은 줄이 진하게 남았다.
그곳에서 연기처럼 피어난 검은 빛은 종이에 스며드는 물감처럼 땅의 색깔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뭐야?”
소멸했던 49명의 검은 늑대들이 다시 나타났다.
다만 그 모습은 괴이하게 변해 있었다.
좀비처럼 피부는 반쯤 녹아내렸고 서 있는 모습도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신의 스킬, 데스 나이트
죽음의 기사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전사들이 되었다.
‘뱀파이어를 믿은 게 아니었구나.’
죽음의 신전에서 얻은 능력이었다. 그리고 김만득은 이를 믿고 블랙 해머와의 싸움을 결정했다.
‘빨리 끝내야 돼.’
죽음의 기사로 부활한 한 명이 적설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적설 역시 반격으로 인해 옆구리에 긴 상처가 남았다.
스스스.
데스 나이트는 소멸했다. 하지만 3초도 되지 않아 같은 모습으로 부활했다.
-김만득을 죽여야 해요.
성아가 해야 할 일을 말했다.
“그럴 거야.”
상엽은 유령 친위대를 소환하며 전장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거리가 멀어진 김만득을 쫓았다.
그러자 김만득의 하체가 검은 연기로 부서지더니 바람처럼 자리를 옮겼다.
상엽이 이를 뒤쫓자 김만득은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이런!’
다급하게 뛰어오르던 상엽은 김만득의 사라진 허리 아래로 비처럼 쏟아지는 검은 액체를 보았다.
‘제길.’
어쩔 수 없이 팔각 대시를 통해 이동 경로를 바꾸자 김만득과의 거리를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김만득의 이동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었다. 상엽을 끌어들여서 반격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상엽은 멈출 수가 없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이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이 살아나고 있다.’
검은 땅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블랙 울프뿐만 아니라 뱀파이어까지 부활하기 시작했다.
‘천 명이 있었어.’
그들이 모두 데스 나이트로 부활한다면 블랙 해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잡아야 돼.’
문제는 김만득의 속도였다.
바람처럼 움직이는 김만득을 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의 부활 속도가 빨라질 때였다.
이미 300명에 이르는 뱀파이어들이 부활해서 전장에 합류하려 했다.
그때였다.
여전히 빠르게 이동하는 김만득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산적 오빠만 있는 게 아니라고.”
김만득의 이동 방향으로 수십 개의 화살이 파란빛을 남기며 쏟아졌다.
김만득이 방향을 틀어 피하려고 할 때, 화살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사방으로 거미줄 같은 빛을 뿌렸다.
“좋았어.”
김만득의 이동 경로가 바뀌었다. 상엽은 이를 보며 광전사의 의지로 스킬을 빠르게 압축했다.
그리고 김만득이 어쩔 수 없이 상엽이 있는 곳으로 다가올 때, 준비했던 스킬을 펼쳤다.
통곡.
귀곡성과 함께 김만득과 상엽을 가두는 벽이 형성되었다.
김만득은 이를 힘으로 뚫으려 했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바로 이동을 멈췄다.
“어울리는 전장이 됐군.”
“시간이 없어서 잡담은 못 받아 드리겠어요.”
“얼마든지.”
김만득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당당함을 보이며 상엽의 정면에 섰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기대하지.”
그의 눈빛은 처음 금산에서 상엽을 보던 때와 같았다.
“그때랑은 달라요.”
“증명해라.”
“지금부터 하려고요.”
상엽이 해머를 움켜쥐며 김만득을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