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팬텀 시티는 혼란에 빠졌다.
도시의 절반이 상엽과 페러독의 싸움으로 사라졌고, 그나마 몸을 숨기던 잔당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벌어진 습격으로 인해 주요 인물들이 모두 죽었고, 팬텀의 미래라고 불리던 자들도 모두 소멸했다.
이것은 팬텀뿐만 아니라 블랙 유저의 종말을 의미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블랙 유저들은 바로 모습을 감추며 숨어 지냈고 팬텀에 소속되어 있던 자들은 끈질긴 추격 끝에 소멸을 면치 못했다.
잔당 소탕에서 가장 큰 공헌을 세운 이는 적설이었다.
그녀는 작은 정보로도 끝까지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냈고 어김없이 제거했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소탕 작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갓코인의 한 축이 무너졌음을 알았다.
-블랙 유저의 종말.
남은 것은 뱀파이어와 힘을 합친 화이트 유저들뿐이었다.
그들은 팬텀이 습격을 받는 사이에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호주로 돌아갔다.
이로써 표면적으로 호주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갓코인 집단이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존재하는 집단은 단 하나.
코드 제로뿐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상엽은 전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프로토만 잡으면 여긴 전부 내 거야.”
세계를 장악하는 건 프로토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상엽은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는데.”
상엽은 성아를 불렀다.
“모든 신은 죽은 사람을 마음대로 살릴 수 있어?”
“그렇지 않아요. 특정 신의 힘이 있어야 해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신들은 모두 특정 분야가 있었고, 블랙 신만 봐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없었다.
이에 상엽은 질문을 바꿨다.
“절대신이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요.”
절대신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적으로만 판단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목표가 되었다.
“내가 절대신이 되어야겠어.”
그 말에 성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거기까지 갈 생각인가요?”
“가야지. 이런 신들에게 내가 사는 세상을 맡기고 싶지 않아졌거든.”
“신으로서 죄책감이 드네요. 인간에게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신이라니.”
“그러니까 가졌을 때, 잘했어야지.”
“민란이라는 건가요?”
“비슷해.”
페러독을 잡은 그는 이미 인간 최강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슬슬 프로토가 움직일 텐데.”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든 당장은 프로토를 잡아야 했다.
‘직접 호주로 가야 하나?’
상엽은 2급 신을 완성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다만 여전히 본거지로 들어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보다 인내심이 강한 놈이야.’
상엽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갓코인 전쟁은 끝났으니까.’
그는 여전히 이렇게 믿었다.
보름이 지났다.
프로토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상엽은 호주로 직접 가는 방향을 여전히 고민했다.
모든 힘을 건 전면전이었다.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블랙 유저들이 다시 뭉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숨어 지내던 블랙 유저들이 다시 단체를 만든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발표였다.
“미친놈들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 내용을 확인한 상엽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만득이 아저씨?”
블랙 울프.
검은 늑대라는 이름의 블랙 길드는 열 명으로 구성된 소수 정예로 출발했다.
아직까지 인원이 많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그 면면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김만득을 시작으로 그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 있던 고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이 모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목적이었다.
-블랙 해머를 처단한다.
검은 늑대들은 노골적으로 상엽을 노렸다.
‘만득이 아저씨가?’
상엽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엽의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인은 김만득이었다.
상엽은 주저 없이 전화를 받았다.
“정말 만득이 아저씨예요?”
-그렇다.
상대의 목소리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제가 들은 소식이 진짜인가요?”
-그렇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유를 묻고 싶은데요.”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말하세요.”
-정말 화이트 유저였나?
상엽은 심장이 뜨끔한 기분이었다.
김만득은 화이트 유저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의미였다.
-왜 대답이 없지?
“대답이 애매해서요. 전 블랙 유저예요. 하지만 화이트 유저이기도 하죠.”
-둘 다 사용한다는 뜻인가?
“맞아요.”
상엽은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가 알고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날 속였지?
“살기 위해서요. 하지만 아저씨와의 친분은 진심이었어요. 그건 아저씨도 아실 텐데요.”
-하지만 용서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화이트 유저는 사라져야 하니까.
블랙 유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김만득은 화이트 유저 전체를 말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상의 여지는 없는 거죠?”
-그렇다.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할게요.”
상엽도 더 이상 배려를 바라지 않았다.
“아저씨와 아저씨 가족들은 제가 꼭 살려 드릴게요. 아저씨를 제 손으로 죽인 후에요.”
-그럴 필요 없다.
“무슨 뜻인가요?”
-내 가족은 이미 살아났으니.
그 말을 듣자 상엽은 뭔가를 깨달았다.
‘프로토가 개입했구나.’
블랙 유저는 에레나의 생명초가 아니면 사람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한 명이 아니라면…….’
신전을 찾았다고 해도 한 명이 한계였다. 결국 신이 개입했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돌이킬 수 없겠구나.’
가족의 생명까지 담보로 했다면 김만득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족은 건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약속은 유효해요. 아저씨는 제가 죽이겠지만 반드시 살려 드릴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해요.”
-기대하지.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망할.”
상엽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준비해.”
복잡한 생각이 들기 전에 결정을 내렸다.
‘이게 마지막 방법일 거야.’
검은 늑대들을 처리하면 균형은 완전히 깨진다. 그렇게 되면 프로토도 더 이상 갓코인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검은 늑대들을 죽이러 간다.”
이것이 상엽의 결론이었다.
상엽은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유저끼리의 싸움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토는 반대였다.
어떻게든 이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이었다.
이에 첫 번째 방법은 검은 늑대들을 숨기는 일이었다.
검은 늑대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호주와 멀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섬나라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의 하늘 위에 먹구름이 드리워서 모든 정보를 차단하면서 호주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화이트와 블랙을 모두 끌어안고 그 안에서 경쟁을 시키겠다?”
상엽은 지금 상황이 꽤 아이러니하다고 여겼다.
적이 되어야 할 두 집단이 전부 프로토의 관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꼭두각시가 돼 버렸어.”
이미 갓코인 유저들의 자유 경쟁은 끝났다. 프로토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알아서 붕괴될 거야. 마지막 한 방만 준비해.”
상엽은 오히려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가졌다.
블랙과 화이트.
서로가 섞일 수 없는 그들이 같은 하늘을 모시게 되었다.
마치 그들의 미래를 상징하듯 우중충한 먹구름 아래에 몸을 숨긴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호주.
서로 땅은 다르지만 먹구름 아래에서 상엽을 피해 있던 그들은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토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은 먹구름을 벗어날 수도 없었고, 언젠가 명령을 내리면 다시 블랙과 화이트로 나뉘어서 싸울 것이다.
-자유 의지가 박탈당했다.
그들은 이미 인형이 되었음을 알았다.
프로토는 이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인간은 본래부터 인형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형으로 생각했던 인간들은 생각이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항의로 시작됐다.
프로토를 직접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하나뿐이었다. 그것이 프로토에게 전달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결국 탈출 시도가 일어났다.
자존심이 강한 화이트 유저 몇 명이 호주를 떠나 버린 것이다.
화가 난 프로토는 이하나를 보내서 그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폭력으로 진정이 될 줄 알았지만 그 반대였다.
대규모 탈출이 시작되었고 프로토는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전부 처리하면 갓코인 전쟁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호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김만득을 필두로 블랙 울프 전원이 인도네시아를 탈출했다.
처음 시작했던 10명은 물론, 새롭게 합류한 40명이 함께였다.
-노예로 살지는 않는다.
김만득은 그 말을 남기고 인도네시아를 떠났다.
블랙과 화이트를 모두 품었던 과오는 결국 프로토의 제어 불가로 이어졌다.
“자, 이제 일이 재미있게 됐어.”
모든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상엽은 행동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검은 늑대들만 잡으면 돼.”
현재 상황에서 위협이 될 존재는 검은 늑대뿐이었다.
화이트 유저들은 호주를 떠나면서 이미 일반인들 틈으로 숨어들었다.
완벽한 은신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전면적인 전쟁은 포기했다는 의사 표시였다.
길드는 해체되었고 더 이상 세력을 만들지도 않았다. 이것은 상엽의 목표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상엽이 소멸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이 화이트 유저들의 판단이었다. 당장은 정상엽과 프로토,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이다.
상엽과 프로토도 그런 화이트 유저를 색출할 생각은 없었기에 꽤나 훌륭한 결정이었다.
결국 뱀파이어를 떠난 화이트 유저들이 숨어 버리면서 남은 집단은 검은 늑대들이 유일했다.
어차피 그들만 무너져도 갓코인 시스템은 붕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검은 늑대들은 자신의 행보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상엽을 유혹하듯이 무너진 테니아 시티로 향했다.
상엽을 부르는 것이다.
“준비해. 응해 줘야지.”
상엽은 그들의 도전을 거절하지 않았다.
갓코인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다.
한때는 테니아 시티의 식량을 책임지던 광활한 식량 단지에 50명의 블랙 유저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반대편에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정상엽과 블랙 해머들이었다.
적설과 아마존 전사, 송연지, 사공강까지 합류한 전체 병력이었다.
‘그들만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야.’
상엽은 반드시 지원 병력이 올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모든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서로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섰다.
정상엽과 김만득이었다.
서로의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 그렇게 다섯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김만득은 여전히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인상에 눈빛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상엽은 이를 보며 공포보다는 연민을 느꼈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그의 인생을 이해하기에 그 눈빛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흔들리기에는 상엽 자신도 힘든 삶을 살았다.
“아저씨를 이렇게 만나고 싶진 않았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약속은 지킬게요. 아저씨가 절 구해 준 적이 있으니, 저도 한 번은 살려 드릴게요. 대신 당장은 아니에요.”
“난 그런 능력이 없으니 약속은 못 하겠군.”
잡초가 무성한 초원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말하지 않았던 것은 미안해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사과할게요.”
“사과는 받아 주지. 그동안 너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보상이다.”
“서로 마음은 편해졌네요.”
그들은 대화를 했지만 목적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할 뿐이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기대하지.”
그렇게 인사를 끝낸 둘은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마치 스포츠를 하듯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동시에 시작을 알렸다.
“하얀 벌레는 모두 죽여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블랙 울프들이 먼저 움직였다.
이를 본 상엽은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말했다.
“전멸시켜.”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렇게 갓코인의 운명이 걸린 한판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