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아이리가 나타났다.
일본에서 사라졌던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일본 도톤보리 거리를 걸었다.
이 사실은 당연히 상엽에게 보고가 되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상엽은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아이리 앞에 섰다.
아이리는 상엽을 보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상엽은 그런 아이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그때였다.
아이리의 주변이 갑자기 빛에 휩싸이더니 공간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호호.”
아이리와 상엽이 사라진 자리로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여인이 나타났다.
“역시 로맨틱해.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 주다니.”
나타난 여인은 이하나였다.
“그래도 연인들끼리 보내 줬으니까 외롭진 않을 거야. 예쁜 곳이니까 행복하게 살아.”
프로토에게서 얻은 특별한 유산을 이용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하는 일회용 유산이었다. 상엽을 직접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하나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주인님께 사랑받겠는데.”
프로토도 상엽의 존재는 골치였기에 이런 작전을 흔쾌히 허락했다.
“드디어 소화가 좀 되겠네. 신선한 피를 좀 마셔야겠어.”
이하나는 주변에서 눈치를 보며 숨어 있는 인간을 찾아 나섰다.
정상엽이 사라졌다.
동시에 코드 제로도 모든 활동을 멈췄다.
그 후로 열흘간, 전 세계의 갓코인 유저들은 숨을 죽였다.
블랙 해머도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고, 각 국가들에 대한 간섭도 사라졌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팬텀이 다시 재건되었다. 그리고 상엽에게 세뇌를 당했던 화이트 해머의 두 명이 뱀파이어 진영에 합류했다.
이하나가 세뇌를 풀어 준 것이다. 그녀가 그 정도로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뉴벨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호주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그들은 다시 아시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동시에 팬텀도 다시 복귀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자리에서 세력 복구에 열을 쏟았다.
상엽이 한바탕 휘젓고 간 탓에 상위권과 중상위권 유저들이 대거 소멸한 탓에 하위권 유저들에게 큰 기회가 생겼다.
당장 그들은 세력을 통제할 인원이 대규모로 필요했기에 대대적인 신규 유저 모집에 나섰다.
본래는 4단계 유저 이상만 받던 뉴벨이 2단계로 조건을 대폭 완화했고 팬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조용히 눈치를 보며 살던 유저들이 큰 세력에 합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가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뉴벨과 팬텀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고 중국을 중심으로 남과 북을 나눠서 가졌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팬텀의 영역이 되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까지는 뉴벨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장을 위해 대대적인 변종 소탕에 나섰다.
-3년의 휴전.
뉴벨과 팬텀은 이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3년 후의 큰 충돌을 위해 각 세력은 성장에 목표를 두었고 덕분에 전 세계의 변종들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오직 성장에만 목적을 두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엽의 비밀 기지를 찾아라.
이것은 그들이 복귀한 이후로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세력이 안정기에 접어드는 6개월이 되도록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사 규모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팬텀과 뉴벨이 구역을 나눠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7개월 만에 드디어 힌트를 찾았다.
변종 사냥을 시작한 미국에서였다.
팬텀의 스카우트 한 명이 미국 남부에서 사냥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워낙 미세한 흔적이라 스카우트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기습한다.
팬텀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시작했다. 흔적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변종 사냥과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열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팬텀에서 서열 3위에 올라 있는 가네루는 엄성된 20명과 변종 사냥을 하고 있었다.
집중적으로 육성을 하는 20명은 우수한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네루 자신도 4단계 신의 상점에 들어선 상태였다.
“휴식!”
전 세계에 사냥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변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국 사냥은 더욱 중요했다.
‘사냥터가 사라지면 결국 서로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2년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응?”
한창 다음 사냥 코스를 정리하던 가네루는 아직 밟지 않은 땅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저건 뭐지?”
눈에 힘을 주자 스킬이 발동되며 먼 거리의 물체가 정확히 보였다.
‘유물 보관함?’
누군가 소멸되고 떨어진 것처럼 풀숲 사이에 놓여 있었다.
‘누가? 여기서…….’
구역을 나눠서 사냥하고 있기에 팬텀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벨 역시 아니었다.
‘설마?’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다.
“블랙 해머!”
그 외침에 휴식을 취하던 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가네루는 자신의 생각이 섣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확인한다.’
그는 스카우트를 시켜서 주변을 정밀히 수색했다.
“다른 유저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가네루는 떨어진 유물 보관함을 주웠다.
보관함에는 단 하나의 유물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본 가네루의 표정이 변했다.
-토르킨의 유물 조각.
이것은 자신을 따르던 수하가 가장 아끼던 조각이었다.
“정상엽에게 죽었는데…….”
그 말을 하던 가네루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촉을 느꼈다.
“정상엽?”
정상엽에게 넘어간 유물 조각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은 것이다.
“잠깐, 정상엽은 이곳에 없다. 그렇다면 블랙 해머가…….”
결론이 처음으로 돌아왔고, 그는 이 사실을 재빨리 본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본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때, 부관 역할을 하고 있는 스카우트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다른 조가 모두 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습격?”
“블랙 해머가 나타났습니다.”
“각하께 알려라! 우리는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합류한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꽤 쓸 만한 씨앗이네.”
다섯 명의 미녀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주요 부위만 교묘하게 가린 화려한 불꽃 모양의 갑옷을 입은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화살과 투박한 창, 단검을 나눠 쥔 채로 가네루를 향해 다가왔다.
‘아마존의 여전사들.’
가네루는 그녀들을 알아봤지만 조금 놀랐을 뿐, 당황하진 않았다.
“결국 나타난 건가? 나름대로 작전을 쓴 모양이지만 어설프군.”
“멍청한 씨앗이네.”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말도 많은 씨앗이야. 그냥 죽이자. 흥미가 떨어졌어.”
다섯 여전사는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첫 공격이 시작되자 가네루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첫 공격만으로도 그는 팔과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합격이 시작되자 제대로 된 반격조차 시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협공을 하는 여인은 네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이미 수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하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전혀 달랐다.
다섯 명의 여전사는 개개인이 엄청난 실력자였고 협공이 시작되자 가네루를 압도했다.
‘막아야…….’
가네루에겐 기회가 없었다.
수하들을 단숨에 처리하던 단검 여인이 전투에 합류하자 곧바로 위기에 몰렸다.
그때부터였다.
가네루는 자신이 사냥을 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들은 집요하게 몰이사냥을 시작했고, 가네루는 가진 힘을 모두 폭발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른 자들도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푹!
위기를 절망으로 바꾸는 한 방이 터졌다.
화살이 그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웬만한 공격을 모두 막아 내던 그의 피부는 투박한 화살에 깨끗이 관통을 당했다.
쿵.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단검 여인이 빠르게 등 뒤로 접근해 목에 칼을 댔다.
“각하께서 반드시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각하? 팬텀 대장?”
말하길 좋아하는 여인이 이미 싸움을 포기한 사내 앞에서 웃음을 보였다.
“지금 너희 대장도 많이 바쁠걸?”
“각하께 대항할 자는 없다.”
“대장을 많이 믿나 보네. 그런데 어쩌지?”
여인은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우리도 대장이 있거든. 지금쯤 대장끼리 신나게 싸우고 있을 거야.”
“대장끼리…….”
“정상엽. 우리의 씨앗, 아니 우리의 자랑.”
촤랏!
단검 여인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사내의 목을 그었다.
같은 시간.
콰쾅!
팬텀의 지도부 건물이 폭발로 터져 나갔다.
새로운 팬텀을 의미하며 검은색으로 지은 30층 건물은 완공 한 달 만에 하늘에서 떨어진 뭔가로 인해 가루로 부서졌다.
내부에 있던 대부분이 그 충격으로 소멸했고, 빛으로 흩어져 누군가에게 흡수되었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검은 말을 탄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상엽!”
폭발 순간에 건물을 벗어났던 사내 한 명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페러독, 이제 끝낼 시간이야.”
“어떻게 다시 나타난 거지?”
페러독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에서 상엽에게 물었다.
“애초에 사라진 적이 없어.”
“설마…….”
“슬픈 이야기는 그만하지. 나도 마음에 드는 작전은 아니었으니까.”
도톤보리에서 아이리와 함께 사라진 것은 상엽이 아니라 비서진 중의 한 명이었다.
상엽의 모습으로 변해서 상대를 속인 것이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전부 의심해야 합니다.
루시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이리가 나타난 것이다.
-이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상엽은 루시의 말에 따랐다.
비서진 한 명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이리와 요원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지자 루시는 빠르게 다음 작전을 구상했다.
그것이 상엽이 진짜 사라진 것처럼 꾸미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숨어 있던 자들이 전부 나타났고, 7개월 동안 블랙 해머가 급성장을 이뤘다.
동희의 프로젝트와 신급 무기가 전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엽은 페러독과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렸어.”
상엽은 지옥마에서 뛰어내리며 페러독을 향해 검은 기파를 뿜었다.
페러독은 수십 가지 궤도로 뻗어 오는 검은 줄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며 거리를 벌렸다.
“미리 말해 두는데 수하들은 오지 않을 거야.”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건가?”
“알면 이제 끝을 봐야지.”
“그러지. 차라리 잘됐군.”
페러독은 검을 꺼냈다. 흑빛 검신이 어두운 밤에 어울리는 무기였다.
“이날을 기다렸다.”
상엽에게 팬텀이 무너진 이후로 페러독은 수천 번이나 자신을 질책했다.
팬텀은 회복이 되었지만 금이 간 자존심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나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이날을 위해 끝도 없이 훈련했고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네놈이 운이 나빴다.”
사흘 전, 페러독은 드디어 4단계 신을 완성했다.
그의 몸에는 네 명의 신의 힘이 있는 것이다.
“지랄한다.”
상엽은 그의 자신감을 무시하고 해머를 휘둘렀다. 길게 휘두른 해머에 검은 폭풍이 몰아쳤다.
이에 페러독은 검을 세웠다가 바닥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 그러자 검은 회오리가 형성되어 그의 몸을 가렸다.
하늘까지 치솟은 회오리는 다가오는 폭풍과 충돌하며 굉음을 만들었다.
찢어지는 공기가 칼날처럼 터져 나갔고 그 속에서 두 번째 충돌이 이루어졌다.
파괴의 일격.
왕의 검.
두 스킬이 공중에서 다시 격돌했다.
그 충격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폭발을 만들었다.
핵미사일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파가 주변의 건물들을 쓸어버렸고 모든 것을 가루로 흩어 버렸다.
그 와중에 다시 세 번째 충돌이 이루어졌다.
절망의 파동.
승천검.
하늘을 누르며 떨어지는 것 같은 파괴의 공간을 상승하는 검기가 찢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기운이 모두 소멸해 버렸다.
그 충격으로 화려하던 팬텀의 수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시 전체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힘이었다.
신과 신의 격돌.
그들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