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266화 (264/300)

# 266

모두가 사라진 전장.

흔적도 없이 소멸한 탓에 시체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런 곳으로 다리를 절뚝이는 왜소한 소년 한 명이 걸어왔다.

“시끄러워. 울지 마.”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린 소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두 번째 기회를 줄게.”

소년은 품 안에 있던 나뭇가지를 꺼내 바닥에 꽂았다.

“망자의 나무, 여기 거름이 많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 크기의 나뭇가지가 갑자기 아름드리나무로 커지더니 핏물이 맺힌 것 같은 열매를 달았다.

“저 열매를 먹으면 두 번째 기회가 생길 거야. 대신 나랑 계약하는 거지. 망자의 계약이 뭔지는 알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열매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휴. 독한 마음만 남아서. 그래. 실컷 먹어.”

소년은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서 주먹밥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너도 먹을래?”

소년 앞에 뒤가 어렴풋이 보일 만큼 투명한 붉은 몸을 가진 유령이 나타났다.

-정상엽!

“알았어. 죽이게 해 줄게. 그러니까 시끄럽게 굴지 마. 짜증 나니까.”

소년은 유령의 분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너 때문에 수하들이 100명이나 죽었는데 미안한 감정은 없는 거야?”

-정상엽에게 복수하겠다!

“그래. 말이 안 통하는 놈이네.”

소년은 주먹밥을 다시 곱게 싸서 안주머니에 챙겨 놓고 형형색색의 보석이 박힌 나뭇가지를 꺼냈다.

이를 본 붉은 유령이 분노를 멈추고 몸을 떨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알았어?”

소년은 나뭇가지로 바닥을 내려쳤다. 그 순간, 100명의 리더였던 붉은 영혼이 물방울처럼 터져 버렸다.

“시끄러운 놈은 딱 질색이야.”

완전한 영혼의 소멸이었다.

똑같이 리더를 따라 계약을 했던 다른 영혼들은 그 장면을 보자 더 이상 분노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소년은 다시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정상엽~ 정상엽~

망자의 분노는 어찌하리.

망자야. 불쌍한 인생아.

복수의 끝이 행복하리라 믿진 않겠지?

울지 마오. 망자여.

슬퍼 마오. 망자여.

그 길을 내가 가리.

그대들의 길을 내가 안내하리.

망자여. 망자여.

날 따라 웃어 주오.

망자여. 망자여.

마지막 웃음을 즐겨 보오.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는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때, 소년의 바지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바닥에 놓고 스피커폰을 누르자 곧바로 거친 음성이 들렸다.

-데스! 빨리 돌아와!

“밥 먹고 갈게요.”

-누가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매사에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우. 시끄러.”

데스라 불린 소년은 전화기를 꺼 버렸다.

“콜렉터에도 시끄러운 사람이 너무 많아.”

전화를 건 이는 콜렉터의 대장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거짓말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소년은 주먹밥을 모두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본 가서 만화가 유령 찾아야 하는데. 완결도 안 내고 죽어 버리다니. 너무 무책임하잖아.”

데스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엉덩이를 털고 그 자리를 떠났다.

다시 한번 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을 때, 한 여인이 나타났다.

“위험한 꼬마네.”

나타난 여인은 송연지였다. 그녀는 데스가 머물렀던 자리를 지켜보았다.

망자의 나무는 마지막 열매가 사라지는 순간 금세 시들어서 말라비틀어진 풀 모양이 되어 버렸지만 바닥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오빠에게 알려야겠어. 콜렉터의 비밀 무기가 많아.”

송연지는 그동안에도 꾸준히 콜렉터에 대한 정보를 루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낸 그녀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에이. 놓쳐 버렸다.”

땅속에서 갑자기 다섯 명의 유령이 나타나 송연지를 잡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사라졌던 소년이 어슬렁거리며 다시 나타났다.

송연지는 이미 100미터 밖으로 움직여 소년을 지켜봤다.

“따라가 봤자 못 잡겠지?”

데스는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더니 몸을 돌렸다.

* * *

상엽은 비밀 기지에서 루시를 통해 팬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복구를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팬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납치를 당했다.

남은 것은 굳이 추격하지 않은 하위 유저들뿐이었다.

“나한테 잔뜩 독이 올라 있겠지?”

“그럴 것입니다.”

“그럼 더 확실하게 놀려 줘야지.”

“준비하겠습니다.”

상엽은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루시는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벌써 적응한 거야? 나름대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꽤 독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데.”

“적응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훌륭히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다시 살아나더니 아부가 많이 늘었어. 그러지 마. 예전의 루시가 좋으니까.”

“예전에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표현 방식이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만.”

상엽은 더 이상 그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팬텀을 끝장내야 돼.”

“알고 있습니다. 일단 주변 인물부터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겠습니다.”

루시는 상엽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팬텀만 정리되면 테니아 재건을 시작할 거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상엽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비참하게 살고 있는 테니아의 국민들이 있었다.

“식량은 암암리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게 식량만 공급하는 상황이었다. 그 이상은 다시 목표가 될 수 있어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팬텀이 무너지면 프로토도 가만히 있지 못할 거야. 갓코인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테니까.”

갓코인 시스템은 블랙과 화이트가 균형 있게 경쟁하는 것을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상엽이 독보적으로 올라가 버리면 프로토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프로토가 상황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야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루시는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페러독은 회의실에 홀로 앉아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시라도 현재의 스트레스를 잊고자 했지만 그에게 알코올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재미없군.”

페러독은 길게 한숨을 뱉어 봤지만 답답한 속은 조금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팬텀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지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풍족함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지금 상황은 꽤나 낯선 느낌이었다.

“정상엽…….”

그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당장은 팬텀을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겠지.’

주요 인물들이 잡혀갔고 팬텀에 대한 정보가 넘어갔다. 반면 그들은 당장 위성 사진 한 장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러시아에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그들에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팬텀을 포기하고 정상엽을 노리던지, 팬텀에 머물며 정상엽의 다양한 작전에 대항하던지.

어느 것도 유쾌하진 않았다.

“그를 죽여야 끝난다.”

“맞아.”

혼잣말에 누군가 대답을 했다.

페러독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누군가 접근했음을 알고는 무기를 꺼냈다.

매끈한 칼은 검신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진정해.”

긴 회의 탁자의 끝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뱀파이어 퀸.”

“나도 한잔 줄래?”

예전 같으면 바로 공격을 했겠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페러독은 글라스에 독주를 가득 따라서 이하나에게 던졌다.

이하나는 이를 받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글라스를 떼는 순간, 물줄기 하나가 입가로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대부분 남성들의 시선이 그 물줄기를 따라 자극적인 상상을 하게 되지만 지금 페러독은 아니었다.

“예전엔 맛있었는데. 피 맛을 알고 나니 이건 별로네.”

“무슨 일이지?”

“정말 몰라서 물어?”

“질문은 내가 했다.”

“성격이 별로네. 한 식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좀 친절해지는 게 어때?”

페러독의 표정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죽여 주지.”

그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초승달 형태의 기파가 이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이하나는 여유 있게 바닥을 밀며 자리를 옮겼다. 의자에 앉은 그대로 공격을 피해 낸 이하나는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았다.

“많이 흥분했네. 나는 다른 흥분이 좋은데.”

“닥쳐라!”

“참는 건 한 번만이야. 정상엽을 죽여야지.”

상엽의 이름이 페러독의 행동을 막았다.

“나는 거친 남자가 좋지만 지금은 아니야.”

“연합을 제안하는 건가?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이하나는 대답 대신 망토를 벗었다.

주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가죽옷 사이에 검게 물든 피부들이 보였다.

“이게 지워지지 않아. 그리고 가끔씩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선사하지.”

“정상엽이 한 짓인가?”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젠 줄 알아?”

이하나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거울을 볼 때야. 감히 내 몸을 망쳐 놨잖아.”

곳곳의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고 해도 이하나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하나는 치료가 되지 않는 피부가 끔찍하게 싫었다.

“후우. 내가 좀 흥분했네. 내가 좀 뜨거운 여자라서 그래. 기회가 되면 경험시켜 줄게.”

“그건 거절하지.”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 그다음에는 애원하지.”

이하나의 표정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위험한 여자다.’

페러독은 이하나와 대화를 하면서 평정심을 되찾았다. 본능적인 경계였다.

“서로 원하는 걸 얻자고. 모든 게 만족되면 기념 파티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어. 물론 내가 주관하고 우리 둘만 즐기는 파티지.”

“방법이 있나?”

“방법은 간단해. 정상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3년 동안 화이트 유저를 건드리지 않으면 돼.”

페러독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3년간의 평화 협정.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 대신 널 모든 걸 정상엽을 만나기 전으로 되돌릴 수 있지.”

묘한 협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 * *

루시는 묘한 보고를 받았다.

팬텀의 정예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팬텀을 완전히 버렸다. 거기다가 코드 제로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았다.

‘싸움을 포기하진 않을 텐데.’

루시는 많은 작전을 준비했지만 상대가 사라졌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생각하자. 이유 없는 행동은 없어. 갑자기 사라질 상황은 아니니까.”

그녀는 주요 정보들을 인쇄해서 넓은 책상 안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화이트보드에 직접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상엽이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상엽은 언제나 그녀의 이런 과정이 끝난 후에 보고를 받기만 했다.

“아무리 봐도 변수는 외부인과의 접촉뿐이야.”

현재 상황에서 외부인은 프로토와 콜렉터 길드뿐이었다.

“콜렉터가 여기서 나설 이유는 없어.”

다양한 상황이 있지만 지금은 콜렉터가 나서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지금 나설 것이라면 지금까지 숨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프로토와 접촉이 있었다는 건데.”

루시는 빠르게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송연지 연결해.”

그녀는 일단 콜렉터를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송연지와 대화를 했다.

-콜렉터는 아니에요.

이제 그녀는 오직 프로토의 움직임에만 주시했다.

‘코드 원을 만나고 지금까지 조용했는데.’

루시는 프로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균형을 원해. 팬텀이 사라지는 건 원치 않을 거야.’

이를 확인하기 위해 팬텀 내부에 있는 정보원과 대화를 시도했다.

“주요 인물들의 동선만 파악해.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루시는 또 하나의 화이트보드에 인물들의 동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페러독이 회의실에 홀로 있었고, 다른 이들이 급히 모였어. 어떤 이유로 인해서 급하게 행동한 거야.”

이제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만약 뱀파이어가 움직였다면…….”

루시는 세계 지도를 펼쳤다. 그곳에는 그레이 상점들의 위치가 파악되어 있었다.

“팬텀의 그레이 상점은 사라졌고, 가장 가까운 곳이 여기.”

루시는 그 지역의 위성 사진과 CCTV를 확인했다. 호주 주변은 이미 완벽한 감시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젯밤 1시에서 2시 사이만 집중적으로 살펴.”

이동 거리와 속도를 감안해서 범위를 좁히자 30분 후에 연락이 왔다.

“역시.”

감시 카메라 한 곳에 박쥐 형상이 잡혔다.

“그들이 거래를 했어.”

그 결론은 곧 상엽에게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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