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아악!”
이하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몸은 다섯 개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몸을 부식시키는 고통에 이하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여왕님!”
주변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급히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그제야 이하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탈출에 성공했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하아.”
이하나는 그제야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살았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부상 부위에서 다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어째서?’
목숨만 붙어 있다면 고통은 금세 줄어들고 회복이 시작되어야 했다.
이미 팔과 다리에 난 구멍은 회복이 시작되었고 더 이상 고통도 없었다.
그런데 배를 꿰뚫은 상처는 아니었다.
피부가 부식되고 다시 회복되는 것이 반복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올라왔다.
내장이 꼬이고 팽팽하게 당겨져서 끊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는 단순한 고통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동시에 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뱀파이어의 몸에 프로토의 능력까지 받은 그녀가 스스로 회복을 하지 못하는 상처였다.
“아악!”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상처에서 갑자기 엄청난 고통이 올라왔다.
이하나는 몸을 말며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빨리 치료해! 빨리!”
뱀파이어 퀸으로서의 여유도 잊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다.
처음에는 피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더니 이번에는 묵직한 송곳이 내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종류는 다시 바뀌었다.
상처 주변이 얼어붙기도 했고, 독이 번지며 녹이기도 했다.
수십 가지의 고통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동안, 이하나는 죽음보다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뱀파이어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치료를 하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아.”
뱀파이어 한 명이 땀으로 젖은 그녀의 몸을 망토로 덮어 주었다.
나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걸 이하나는 그제야 인지했다.
‘정상엽…….’
분노보다 공포가 더욱 컸다.
“주인님을 뵈어야겠다.”
이하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
이하나는 다시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치료를 위해 일부러 수면에 들어갔던 그녀는 엄청난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알았다.
치료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가 회복으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제는 고통의 주기였다.
주기는 불규칙했다. 때로는 2분 안에 다시 시작했고, 하루 종일 멀쩡할 때도 있었다.
배에 뚫린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사흘째 되는 밤.
이하나는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그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
프로토였다.
“주인님께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배를 움켜쥔 상태에서 이하나는 무릎을 꿇어 존경을 표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로토가 자신을 소멸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하나의 입가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통을 참으려고 꽉 악문 이빨이 부러진 것이다.
그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프로토 앞에서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프로토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시험을 감시하는 감독관 같은 표정이었다.
“왜 치료해 달라고 소리치지 않느냐?”
“전 노예입니다. 주인님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극심한 고통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만들어 내던 이하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프로토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붉은 빛이 이하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끔찍하던 고통이 사라지자 이하나는 편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하나는 바닥을 기듯이 프로토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망토와 옷을 모두 벗고 무릎을 꿇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프로토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스스로 노예에 가장 어울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프로토는 그런 이하나의 반응에 만족했다.
“몸을 추슬러라. 이번 일에 대한 벌은 그때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프로토는 절을 하는 이하나를 두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등에서 예상치 못한 현상을 보았다.
붉고 푸른 점이 척추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뼈를 타며 척추 아래로 빠르게 흘러갔다.
‘치료가 안 됐다는 건가?’
프로토는 이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의심을 지웠다.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조금 늦었지만 다시 돌아서서 이하나의 숙소를 떠났다.
정확히 1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악!”
이하나는 훨씬 끔찍한 고통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치료는 실패였다.
‘차, 차라리 죽어…….’
그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생각마저 지워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악!”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몸부림치는 것뿐이었다.
* * *
“어린 자의 이빨. 신을 고문하는 용도로 개발된 거였어.”
특이한 이름의 독이었다.
상엽은 동희의 설명을 들으며 오래전에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연금술사 제하드.
그는 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신의 힘을 가진 생명체를 연구한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대장장이 롱투스가 자신의 군대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노예 출신의 두 장인은 신들의 이기심에 대항하려다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담비 대장은 지금 어디 있어?”
상엽은 오랫동안 참아 왔던 질문을 했다.
“설악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어.”
현재 비밀 기지에는 담비들이 없었다. 본래 중국 쪽에 흩어져 지내다가 뱀파이어들이 사라지자 설악산으로 돌아간 것이다.
“담비들이 왜 설악산에 집착하는 거야?”
상엽의 질문에 동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상엽이 다시 동희에게 물었다.
“담비 대장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아?”
“응. 내 친구.”
상엽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지만 동희는 너무나 간단히 대답을 했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희는 담비 대장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난 네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게 싫어.”
“알아. 그래도 담비는 의심하지 마.”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냥 알고 싶은 거야.”
동희는 상엽을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상엽아. 그냥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묻지 말아 줄래? 너도 나한테 비밀 하나쯤은 있잖아.”
그 말을 듣자 상엽은 더 이상 질문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상엽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제는 숨길 이유도 없지만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다.
‘말해야 하는데. 이미 알고 있겠지만.’
블랙과 화이트를 모두 사용하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상엽이 암흑의 신전에 있는 동안, 루시가 모든 정보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엽이 돌아왔을 때, 최고의 효율을 보이기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
상엽은 이 비밀을 직접 말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담비가 너한테는 그런 존재인 거야?”
“응.”
담비는 분명히 특별한 존재였다.
제하드의 연금술 수첩을 동희에게 주었고,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준 것이 분명했다.
‘제하드의 현신인가?’
상엽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신의 힘을 가진 생명체를 창조했던 자야. 동희를 이용하려 한다면 분명히 위험할 수도 있어.’
그나마 상엽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신이라는 같은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까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언제든 변화가 생기거나, 혹시 함께해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꼭 말해 줘야 해. 약속할 수 있지?”
“응. 그건 약속할 수 있어.”
“알았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동희와 용소는 제하드와 롱투스처럼 서로를 도왔다. 하지만 라이벌이 아니라 친구라는 점이 달랐다.
“프로토가 치료할 수 있을까?”
“프로토 정도면 가능할 거야. 그런데 시간이 꽤 걸릴걸. 말했다시피 신들을 겨냥해서 만든 독약이라 쉽게 해독되진 않아.”
상엽은 이하나를 만나러 가기 전에 동희의 독약을 받았다.
그녀를 놓칠 거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고통을 주는 것에는 만족했다.
“그래도 놓친 게 아쉽네.”
“다시 기회가 있겠지.”
상엽은 지나간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손으로 가장 비참하게 죽일 테니까.”
“그런데 새로운 무기는 어땠어?”
상엽은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들어. 최고야.”
뱀파이어들이 겹겹이 만든 방어벽을 뚫으며 낙하할 때,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게다가 모든 스킬 발동이 강력하고 빠르게 전개되었다.
“50층 건물을 한 방에 무너트리는 느낌이야.”
“헤헤. 용소한테 말해 줘야지. 좋아하겠다.”
“너희들도 좀 쉬어. 많이 피곤할 텐데.”
“아니야. 이제 여전사들 무구 제작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블랙 해머 무구도 업그레이드할 거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부품 제작은 이미 다 끝나서 마무리만 하면 돼.”
세 명의 장인은 이미 상엽 군대의 핵심 전력이었다.
직접 싸움에 임하진 않지만 전사들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푹 쉬어.”
“우리끼리 말한 게 있어.”
“뭔데?”
“상엽이가 이 세계를 완전히 평정하면 한국을 재건하기로 했어.”
“재건?”
“응. 환상의 도시로 만들 거야. 들어 볼래?”
상엽은 동희의 기대에 찬 표정을 보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듣고 싶어. 말해 줘.”
“헤헤.”
동희가 웃음을 시작으로 입을 열려고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가 끼어들었다.
“저를 빼고 그 이야기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스트라인버그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용소도 대장간을 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들어 볼까?”
상엽은 루시와 적설을 불러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시작은 스트라인버그였다.
“주요 10개 도시에 성전이 지어질 것입니다. 신전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의 성전은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조각상, 미술품까지 역사상 유례없는 예술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근 해역에는 수중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수중 도시는 예상도 못 했는데?”
“바다가 하늘이 되는 도시입니다. 자연환경 그대로를 품은 도시지요. 그리고 서울 근교에 투명 도시가 지어질 것입니다.”
스트라인버그는 이미 도시를 완성한 것처럼 환상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더욱 상세한 설명을 하려 했지만 동희가 끼어들었다.
“한국에는 마시기만 해도 치료가 되는 강이 흐를 거야. 물은 언제나 깨끗할 거고, 그것만으로도 모두들 건강하고 튼튼해질 거야.”
동희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아프지 않는 도시.”
“맞아! 내가 원하는 거야!”
상엽은 그것이 정말 꿈의 도시라 생각했다.
마지막은 용소였다.
“한국에는 2백 개의 신의 조각상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특별한 조각상으로 모든 침략을 방어하고, 내부의 치안을 지키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신의 힘으로 지키는 도시라…….”
세 명의 장인이 한 나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어떻게 될까?
상엽은 그런 상상을 하자 꿈을 꾸는 것처럼 표정이 편안해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응!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한국을 시작으로 전부 다 그렇게 만들 거야!”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완벽한 도시가 있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치안과 방위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내가 꼭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할게.”
“응! 그때는 상엽이가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될 거야!”
악마와 천사.
상엽은 그 경계를 인지하지 못했다.
서로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주제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약속해.”
지금 상엽에게 필요한 건 이런 의지를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상엽과 이하나의 싸움은 팬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모든 지부는 팬텀으로 철수한다.
그들은 상엽과 어떤 분쟁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지부를 철수하기로 했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대한 지분을 포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호주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주인이 사라졌다.
“다음 목표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루시의 이 질문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상엽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전 세계의 판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모든 운명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상엽이었다.
“삼파전을 끝내야겠어.”
“구경꾼을 제거하시겠습니까?”
“관중이 필요한 싸움은 아니잖아.”
상엽은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