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달무리가 진 밤이었다.
상엽은 기능을 멈춘 하수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유쾌하진 않네.’
추종자가 그를 대신해 지상을 살피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의 강남은 여기저기서 고성과 비명이 가득했다.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강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힘 싸움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상엽은 직접 나서고 싶은 많은 장면들을 보았지만 냉정을 유지하며 참고 있었다.
-주인님, 나타났습니다.
약속대로 뱀파이어 로드가 강남에 나타났다.
로드는 곧바로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는 두 명을 각각의 손에 잡더니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로드는 추종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내버려 둔 채로 잡아 온 사내의 목덜미를 물었다.
사내는 금세 밀랍 인형처럼 말라 버렸고 다른 한 명은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뱀파이어 로드는 멈추지 않고 다른 한 명의 피까지 빨아들였다.
나름대로 강남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힘 싸움을 하던 두 사내도 뱀파이어 로드 앞에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내를 처리한 뱀파이어 로드는 곧바로 몸을 숨겼다. 그러다 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인간 사냥에 나섰다.
그때였다.
달을 살짝 가린 구름을 뚫고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유령아, 물러서.’
상대를 확인한 상엽은 곧바로 추종자의 위치를 옮겼다.
‘이하나.’
기다리던 뱀파이어 퀸이 도착했다.
이하나는 막 인간 사냥을 끝낸 뱀파이어 로드의 뒤에 내려섰다.
“어머. 배가 많이 고팠나 봐.”
뱀파이어 로드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붉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때는 뱀파이어 로드였는데. 조금 안타깝기도 하네.”
“네년의 권력이 영원할 줄 아느냐?”
“너보단 오래 해 먹을 거 같은데?”
이하나는 여유를 부리며 말을 계속했다.
“아주 오랫동안 적당한 곳에서 많은 걸 누리며 살 거야. 그러다 더 높은 곳으로 갈 기회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잡는 거지. 너도 그렇게 살았잖아. 그것도 오늘까지겠지만.”
“네년의 뜻대로 될 줄 아느냐?”
“지금은 내 파도가 높은 시기야. 넌 그 파도에 휩쓸리는 거고.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
이하나는 이미 뱀파이어 로드의 죽음을 확신한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넌 더럽고 비참하게 살다 죽었을 것이다.”
“날 추천한 걸로 동정을 얻으려면 그만둬. 그건 네가 해 준 게 아니라 내가 얻어 낸 거야.”
“내 가랑이 사이에서 애원하던 년이…….”
“그렇게 말하기 부끄럽지 않아? 이성을 잃을 정도로 좋아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한 달 동안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줬잖아. 아직도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해. 평생 네 옆에만 있으면 전부를 준다면서?”
그 둘에겐 특별한 과거가 있었다.
이하나의 세뇌를 풀어 준 것은 프로토가 아닌 뱀파이어 로드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뱀파이어 로드와 함께 지내면서 이하나 역시 뱀파이어가 됐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선물을 주지. 그러니 평생 내 옆에 있어라.
이하나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유혹한 것은 프로토가 아니라 뱀파이어 로드가 먼저였다.
한 달 동안 이하나에게 푹 빠진 뱀파이어 로드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절 무시해요. 프로토 님을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럼 더욱 당신에게 충성할게요.
결국 뱀파이어 로드는 이하나를 호주로 데려갔고 프로토를 만났다.
그 후로 이하나의 목표는 뱀파이어 로드가 아닌 프로토가 되었고 결국에는 뱀파이어 퀸이 되었다.
-제가 뱀파이어 로드의 여자였던 것이 부끄러워요. 그 과거를 지우고 싶어요. 그럼 프로토 님께 제 현재와 미래를 전부 드릴 수 있을 텐데.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요.
처음 프로토는 놀이 정도로 여기고 이하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이하나는 훌륭히 뱀파이어 로드를 밀어내고 더욱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때부터 프로토는 이하나를 주목했고 결국 현재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만들어 줬던 쾌락만 생각해. 그것만으로도 네 인생은 의미가 있을 테니까.”
“너 따위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곧 될 거야.”
이하나는 자랑하듯이 자신의 목표를 말했다.
“여신.”
“웃기는군.”
뱀파이어 로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이하나가 나타났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상엽이 이쯤에서 등장해야 했다.
그런데 상엽은 마치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자, 이 정도면 그동안 우리 사이에 대한 보상은 충분했잖아. 이제 끝낼 시간이야. 이별의 시간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니까.”
“네년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말 많은 남자들이 대부분 힘을 못 쓰더라고.”
이하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상엽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로드가 죽으면 나선다.’
그는 뱀파이어 로드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거짓말을 했군요.
“문제 있어?”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통쾌해요.
“진실의 신이 그런 말을 해도 돼?”
-당신한테 배우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살려 둔 것도 많은 인내가 필요했어.”
성아는 더 이상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더 강해졌어.’
둘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상엽은 이하나의 능력에 대해 솔직히 감탄하고 있었다.
이하나는 빠르고 정교했다. 단순히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성향을 전투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상대의 생각을 간파한 듯이 움직였고, 단 한 번의 공격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공격이 시도되면 어김없이 적중했다.
마치 전투 능력이 뛰어난 암살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오래 못 버티겠어.’
상엽은 싸움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걸 알았다.
이미 뱀파이어 로드 몸 곳곳에 구멍이 뚫려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하나는 특이한 형태의 채찍을 사용했는데 필요에 따라 날이 선 창으로 변했다. 여기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뱀파이어 로드의 회복을 막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채찍은 뱀처럼 집요하게 로드를 압박했고 결국 치명타를 날렸다.
우둑!
대나무처럼 휘어지던 채찍의 끝이 갑자기 날카롭게 서며 뱀처럼 궤도를 바꿔 로드의 발목을 뚫었다.
그 한 방으로 뱀파이어의 발목이 부러져 버렸고, 급히 박쥐로 변해 달아나려 했지만 채찍에서 튀어나온 가시들이 날개를 꺾어 버렸다.
쿵!
결국 뱀파이어 로드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하늘로 솟구친 채찍의 끝이 다섯 갈래로 나뉘더니 뱀파이어 로드의 사지를 찍어 눌렀다.
푹!
양 허벅지와 팔뚝, 그리고 명치에 채찍이 말뚝처럼 파고들었다.
채집을 당한 곤충처럼 바닥에 고정된 뱀파이어 로드를 향해 이하나는 여유로운 구두 소리를 들려주며 다가갔다.
또각. 또각.
그 소리가 뱀파이어 로드에겐 사신의 웃음처럼 들렸다.
“정상엽!”
결국 뱀파이어 로드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 이름에 이하나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접근하는 것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창피하지도 않아? 그래도 명색이 뱀파이어 로드가 인간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려고 하는 게.”
“정상엽!”
뱀파이어 로드는 다시 한번 상엽의 이름을 외쳤다.
그 표정의 간절함을 보며 이하나는 단순히 자신을 속이기 위한 외침이 아닌 것을 알았다.
‘설마?’
이하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그들이 서 있던 바닥 아래에서 엄청난 기운이 상승했다.
콰쾅!
땅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며 발생한 충격파는 이하나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로드를 집어삼켰다.
그 한 방으로 뱀파이어 로드는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고 이하나는 겨우 충격파의 범위를 벗어났지만 중심이 흔들려 속도가 느려지고 말았다.
그 짧은 틈을 노리고 파괴적인 기운이 그녀를 덮쳤다.
‘정상엽!’
이하나는 상대를 확인할 틈도 없이 바닥을 차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전부를 걸어서 빠져나가야 돼.’
그녀는 상엽의 등장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저항을 포기했다. 오직 모든 것을 걸어서 단번에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프로토를 통해 더욱 강해졌지만 상엽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녀에겐 공포였다.
촤라랏!
그녀는 결국 상징과도 같은 망토를 벗어 던졌다. 망토는 자신을 향해 상승하던 기운과 충돌하면서 단번에 찢어져 버렸다.
‘더 강해졌어.’
망토가 찢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하나의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망토를 희생한 덕분에 잠시지만 충격파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빨리 내려와!”
결국 이하나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다급한 명령에 하늘에서 백 마리의 박쥐가 나타났다.
그녀는 뱀파이어 로드를 잡기 위해 100명의 수하를 데리고 왔다. 이것은 뱀파이어 로드를 혼자 처리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로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보여 주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탈출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100마리의 박쥐는 일제히 뱀파이어로 변하며 상엽을 덮쳤다.
“죽여! 빨리!”
항상 여유롭던 이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악에 받쳐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그 명령에 뱀파이어들은 일제히 강력한 스킬들을 퍼부었다. 하지만 상엽은 유령 걸음으로 이를 흘려 내고 곧장 이하나를 추격했다.
망토를 벗은 이하나는 주요 신체를 가죽 소재의 옷으로 겨우 가린 모습이었다.
힘을 쓰면서 나타난 화려한 문신이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했지만 지금은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물 안의 물고기 같았다.
100명의 수하도 그녀의 공포심을 지워 주진 못했다.
“어디 가려고?”
그녀가 먼저 하늘로 뛰어올랐지만 뒤따르는 상엽의 속도가 빨랐다.
상엽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르며 검붉은색의 해머를 휘둘렀다.
그 짧은 순간에 이하나는 몸을 죄어 오는 무거운 기운을 느꼈다.
‘주인님!’
결국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힘을 발휘했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더니 상엽의 해머에 맞섰다.
쾅!
빠르게 휘두른 한 방이었다. 그런데 그 한 방으로 문신은 유리 조각처럼 깨졌고, 이하나는 충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쳇.”
하지만 프로토의 문신은 이하나에게 닿는 충격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상엽은 공격이 실패한 것을 인지하며 고스트 실드를 머리 위에 만들며 몸을 뒤집었다.
쿵!
그는 고스트 실드를 발로 차며 이하나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쏜살처럼 떨어지는 상엽의 기운은 공기를 파괴하며 재앙을 선사하는 운석 같은 느낌이었다.
“막아! 전부 내 앞을 막으라고!”
이하나는 수하들에게 죽음을 명령했다.
뱀파이어들은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스무 겹의 방어벽을 만들었다.
쾅! 쾅! 쾅! 쾅!
상엽은 방어벽을 모두 깨트리며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기세였지만 뱀파이어들이 모든 힘을 발휘한 탓에 속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안 보이는 곳으로 가야 돼.’
이하나는 바닥에 닿으며 중심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을 깨트리며 하수구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잊고 하수구를 달리기 시작했다.
‘추종자!’
추종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하나는 자신의 어깨를 스스로 쥐어뜯었다.
매끈한 하얀 살결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흩날리기 시작했고 이것은 뒤따르는 추종자를 막는 결계가 되었다.
추종자의 접근을 막은 이하나는 더욱 속도를 높이며 속옷 같은 상체의 가죽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가죽 옷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호주로 돌아가는 이동마법진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하수구 전체를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상엽이 땅을 뚫고 하수구로 들어온 것이다.
“빨리!”
3초면 발동이 완료된다. 그런데 그 3초가 이하나에겐 3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제발!’
그녀는 간절히 그렇게 외쳤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마법진이 완전히 빛으로 흩어지며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됐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접근한 다섯 개의 검은 기운이 그녀의 곁에 나타났다.
푹!
악마의 기운은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