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세계를 정복한다.
상엽은 지금까지의 복잡한 정세를 정리하기로 했다.
국가, 연합, 갓랭킹.
이 모든 것이 정세를 변화시키고 혼란과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제 적당한 건 없어.’
지금까지 상엽은 상대를 인정했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으면 굳이 먼저 가서 싸움을 걸지 않았다.
‘정복하지 않으면 내 사람이 다쳐.’
이걸 깨달은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대가이기도 했다.
‘두 번 다시 테니아처럼 되진 않을 거야.’
테니아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런데 복구할 방법조차 없었다.
설사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복구를 한다고 해도 가장 먼저 목표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모든 적을 섬멸하는 것.
망한 나라의 국왕은 그렇게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화이트 연합 뉴벨.
뱀파이어들이 실권을 장악했지만 실력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화이트 유저가 버틸 수 있었던 상징적인 인물이 있었다.
독일 베를린.
현재 화이트 유저 중에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하트만이 있는 곳이었다.
길드 슈렌트.
길드장 하트만.
부길드장 엘렌.
상엽과 인연을 맺었던 곳이었고 지금까지 서로 칼을 겨눈 적이 없었다.
뱀파이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유럽에서 자리를 잡은 유일한 화이트 길드이기도 했고, 팬텀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다.
“저, 정상엽!”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슈렌트 본부는 난리가 났다. 느닷없이 본부의 입구에 나타난 정상엽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정상엽 앞에 나타난 인물은 엘렌이었다.
“오랜만이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상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차가운 표정에 엘렌은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때는 프러포즈를 했던 사이잖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테니아가 그렇게 되기 전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 말에 엘렌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테니아와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상엽은 엘렌을 주시했다. 그 압박에 엘렌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건 뱀파이어들이 한 짓이야.”
“맞아. 그리고 너희들은 같은 팀이지.”
“그건!”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독일에 뱀파이어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지만 이것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뱀파이어가 합류하는 걸 그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걸 따지러 온 거야?”
엘렌이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따지러 온 게 아니야. 전부 죽이러 왔지.”
상엽의 몸에서 수십 줄기의 촉수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촉수는 곧장 엘렌의 몸을 꿰뚫을 기세로 뻗어 나갔다.
챙!
엘렌은 다급히 방어벽을 펼치며 물러섰고, 그녀가 떠난 자리에 다른 이가 나타났다.
“정상엽, 진정하지.”
길드장 하트만이었다.
“이 일을 대화로 마무리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상엽은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는 슈렌트 길드를 향해 유일한 기회를 주었다.
“항복하고 내 밑으로 들어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하트만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심이야.”
상엽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힘을 가졌다고 함부로 쓰겠다는 거군.”
하트만은 상엽을 비난했다. 이에 상엽이 말했다.
“내가 없을 때는 너희들이 그렇게 했지.”
“우린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알아. 이해해.”
상엽은 그의 비난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나도 같은 선택을 하는 거야. 너희들이 사라져야 남은 테니아 국민들과 내가 안전하거든.”
뉴벨이 테니아를 무너트렸다.
이 사실에서 슈렌트도 결국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너희들과 관계가 있어서 기회를 주는 거야.”
상엽은 마지막으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한다.”
촤랏!
상엽의 검은 기운이 하트만을 공격했다. 실제로 심장과 목을 찌르기 위한 공격이었다.
하트만은 양손을 교차하며 공격을 막아 냈다.
-신의 힘을 가졌어요.
하트만도 이미 신의 상점에 진입했다.
“잘됐네. 얻을 게 많겠어.”
상엽은 이미 그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쾅!
상엽의 해머가 바닥을 찍었다.
화염 파도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을 단숨에 밀어냈다.
‘꽤 실력자들이네.’
50명에 이르는 인원이 화염 파도를 버텨 냈다.
슈렌트 길드는 독일을 완전히 복구한 이후로 전 세계의 변종들을 처리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그 힘이 드디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엽! 그만둬!”
엘렌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하지만 상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쾅!
하트만은 결국 특유의 무기인 봉을 꺼내 들었다.
봉이 회전하면서 만들어 낸 투명한 방패가 상엽의 해머를 막았다.
실드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 충격이 하트만에게 닿지는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하트만이 반격에 나섰다.
그가 내지른 봉은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상엽을 덮쳤다.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상엽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쿵! 쿵! 쿵!
큰 충격이었지만 이를 몸으로 받아 내며 돌진하자 하트만은 크게 당황했다.
세 명의 철갑 신이 만들어 낸 방어벽은 하트만의 강력한 공격을 아무 상처도 없이 막아 냈다.
상엽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처럼 오직 돌진할 뿐이었다.
쾅!
상엽의 해머가 하트만의 실드를 다시 한번 깨트렸다. 그리고 첫 공격과 달리 상엽은 곧바로 스트라이크를 시도했다.
방어벽이 깨짐과 동시에 돌진하는 상엽을 보며 하트만은 옆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엽은 팔각 대시로 방향을 바꾸며 다시 한번 해머를 휘둘렀다.
콰쾅!
더욱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트만은 봉을 나눠 쥔 양손을 교차하며 상엽의 해머를 막았다.
하트만의 몸으로 충격이 전달되었지만 완전히 뚫어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잠시라도 공격이 멈춘 틈을 타서 길드원들이 공격을 시도했다.
강력한 공격들이 상엽을 향해 폭사되었다.
‘신의 힘을 가진 자가 꽤 많아.’
하트만과 엘렌.
그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만큼 슈렌트 길드에 실력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무리하지 말자.’
자신감이 있었지만 상엽은 객기를 부리지 않았다.
다가오는 스킬들을 몸을 띄워 피하고 팔각 대시로 방향을 바꾸며 친위대를 소환했다.
20단계로 강화된 친위대는 50명에 돌격대장 5명이 더해져 55명의 군대가 되었다.
친위대는 소환과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전투를 시작했다.
최종 강화가 된 친위대는 강력한 전사들이 합류하면서 시너지가 나기 시작했다.
최종 20단계에 소환된 전사는 대장 역할까지 하며 전투를 이끌었다.
츠팟!
친위대의 공격을 확인하던 상엽을 향해 엄청난 속도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챙!
상엽은 피하기는 늦었다고 판단하며 아르마딜로의 방어벽으로 이를 막아 냈다. 하지만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공중을 가른 다섯 개의 단검이 어지러운 궤도를 그리며 살아 있는 것처럼 상엽을 공격했다.
상엽이 해머를 들어 올리며 단검을 하늘로 쳐 냈지만 잠시 후에 번개처럼 다시 떨어져 내렸다.
다섯 개의 위협적인 단검은 엘렌이 만들어 낸 스킬이었다.
-신의 스킬 댄싱 대거.
그녀가 자랑하는 공격이었다.
상엽이 단검의 공격으로 인해 수세를 취하자 하트만도 협공에 나섰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트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상엽과 이런 싸움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물러설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런데 엘렌은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했다.
“정상엽! 지금이라도 멈춰!”
그 외침이 들린 순간, 상엽은 빠르게 해머를 휘둘렀다.
그녀가 말을 하느라 단검의 속도가 미세하게 느려진 것이다.
챙!
해머에 맞은 단검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엘렌을 향해 날아갔다.
츳!
그리고 단검은 엘렌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금발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것을 본 엘렌은 그제야 이 싸움의 실체를 알았다.
“죽일 거야!”
“늦었어.”
촤랏!
상엽은 공중에서 다시 한번 도약했다. 단검이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랐지만 그 짧은 시간 차가 문제였다.
콰쾅!
자신을 따라오는 단검을 향해 상엽은 충격파를 날렸다. 단검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꽂혔고 더 이상 상엽을 괴롭히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상엽의 머리 위로 누군가 나타났다.
하트만이었다.
상엽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등을 압박하는 파동을 느꼈다. 이에 상엽은 땅을 향해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스트라이크로 등 뒤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쿵!
그리고 땅을 밟으며 다시 튀어 올랐다. 하트만도 이번에는 예상을 했는지 나눠 쥔 봉의 끝에 칼날을 만들며 연속 공격에 나섰다.
‘처리한다.’
상엽은 그의 반격을 기회로 삼았다. 자신의 피부를 믿고 파괴전차로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렌이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상엽의 주변으로 얇은 빛이 폭사되었다.
‘실?’
수백 줄기의 빛은 상엽에게 직접 닿지 않았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줄들이 남아 있었다.
상엽은 무모하게 덤비기보다 화염으로 실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러자 엘렌이 만들어 낸 줄에 또 하나의 스킬이 더해졌다.
상엽의 주변 공기들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수포 같은 녹색 구슬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스킬 독성 숲.
“성아, 처리해.”
상엽의 지시에 성아가 곧바로 나타나 공기로 만들어진 독구슬을 제거했다.
그리고 공기를 움직여 실을 흔들어 놓았다.
그 틈에 상엽은 실이 만든 감옥을 벗어났다.
‘파괴전차.’
상대의 합격을 간단히 피해 낸 상엽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정면 대결을 좋아하는 하트만도 파괴전차를 보자 감히 맞서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상엽의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어쩔 수 없이 하트만은 반격을 포기하고 최대한 안전한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세 번에 걸친 돌진을 피했을 때, 그의 눈에 작은 틈이 보였다.
방향을 선회하는 그 순간을 본 것이다.
이를 모르는지 상엽은 네 번째 돌진을 시작했다. 하트만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막아야 한다.’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면 방법이 없었다.
‘엘렌.’
‘알았어요.’
그들은 스킬을 통해 속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둘은 기회를 공유했고 예정대로 하트만이 상엽의 돌진을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돌진을 흘려 냈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파괴전차를 감싸던 망자의 손길이 뻗어 나와 상처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상처였고, 하트만은 예정된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의 발아래 있던 공기들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의 파동.
상엽은 파괴전차를 쓰면서도 절망의 파동을 만들었다.
엄청난 범위의 원이 만들어졌고 파괴적인 상승 기류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트만은 모든 힘을 다해 이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제야 하트만은 성아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늦었다.’
그의 발아래 피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방어 스킬이 있지만 이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몸으로 은빛 자루가 날아왔다.
물건을 담는 모양의 은빛 자루는 순식간에 하트만을 집어삼키더니 사라져 버렸다.
쿠릉!
절망의 파동이 결국 구름까지 집어삼켰다.
공중에서 폭발한 파괴적인 스킬에 한순간 공기가 사라진 진공 상태가 형성되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하트만은 엘렌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엘렌이 던진 은빛 자루가 그를 구한 것이다.
은빛 자루가 집어삼킨 그는 엘렌의 곁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목숨을 지켰다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돌진을 멈춘 상엽이 그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엘렌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누구와 만나더라도 하트만과 함께라면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믿음이 지금은 의문이 되었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야. 죽고 사는 싸움이지.”
하트만은 흔들리는 엘렌의 마음을 잡아 주었다.
“죽여야 돼. 우리가 죽이지 못하면 길드원들도 전부 죽어.”
하트만의 말에 엘렌은 상엽을 다시 보았다.
전투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이었다.
‘정말 전부 죽일 거야.’
엘렌은 자연스럽게 최악의 결과를 떠올렸다.
“악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 단어를 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