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253화 (251/300)

# 253

“정신 차려.”

상엽의 차가운 명령에 사공강은 눈을 떴다.

멍한 정신이 또렷해지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엽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네가 이겨 낸 거야. 내가 원하는 만큼 쉽게 이겨 내진 못했지만.”

상엽은 쓰러져 있는 사공강을 일으켰다.

그런데 상엽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빛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성아.”

성아가 빠르게 사공강의 등 뒤에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진실을 보세요. 지금 당신의 생각은 전부 거짓입니다.”

성아가 만들어 낸 기운이 사공강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사공강의 눈빛도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세뇌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어.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내가 말하는 곳으로 가.”

“마루나 사장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였어. 내 손으로.”

“그런…….”

“마루나가 그걸 원했어. 자세한 건 네 정신부터 차리고 들어.”

상엽은 사공강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세뇌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 있었다.

“동희에게 가.”

“마루나…….”

“그만.”

상엽은 사공강의 집착을 이해했지만 동의하진 않았다.

“아프고 힘든 건 모두 마찬가지야. 너만 힘들다고 착각하지 마. 화를 내려면 부족한 널 탓해. 나한테 힘이 있다고 모두를 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사공강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발산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인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확실하게 고쳐. 그래야 나랑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분명히 말하는데 안 고쳐지면 죽이라고 지시할 거야.”

사공강과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한국은 다시 안전해졌다. 하지만 복구를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진 상태였다.

그리고 뱀파이어와 변종 새가 물러났다고 영원한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깝지만 테니아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프로토를 잡아야 돼.’

프로토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테니아와 한국의 뱀파이어를 몰아낸 상엽은 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호주에서 빼내야 돼.’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현재 상엽의 힘으로도 프로토를 이기는 건 무리였다.

천 번을 싸우고 단 한 번을 이겼던 탄야보다 더 강한 존재가 프로토였다.

그런 프로토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호주에서 싸우는 건 무모한 결정이었다.

‘프로토가 여유를 부리는 동안 더 성장해야 돼.’

상엽은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이 시스템은 결국 파괴될 거야. 당장은 아니지만.’

프로토는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갓코인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뱀파이어를 통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할 만큼 시스템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패가 분명한 상황이 되면 가차 없이 시스템을 포기할 것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성장하자.’

상엽은 이미 시스템에 대한 미련을 버렸지만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버릴 이유는 없었다.

‘이 시스템은 결국 내가 파괴할 거야.’

상엽은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블랙 상점 도지연.

그녀의 병원은 멀쩡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직까지 운영되는 병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매혹적인 웃음으로 상엽을 맞이했다.

“많이 기다렸는데.”

도지연은 하얀 가운 안에 지나칠 정도로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 스타킹의 밴드가 드러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소파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무료 상담을 해 준다던 게 기억나서.”

“흥미롭군요.”

상엽은 도지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프로토에 관해서.”

상엽이 주제를 던지자 도지연의 표정이 굳었다.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

“좀 직접적이라서요.”

“그건 네 전문 아니야?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거.”

“이 주제는 아니네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어요.”

“무료 상담이 그렇지.”

상엽은 미련이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도지연도 함께 일어섰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해요.”

도지연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엽을 설득했다.

“순응해요. 그럼 당신은 원하는 걸 전부 얻을 수 있어요.”

“원하는 거?”

“당신의 누나. 그리고 안전한 세상. 그 세상을 지배하는 건 당신이겠죠.”

달콤한 유혹이었다.

“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네.”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상점은 없어요.”

도지연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상점끼리 정보 공유는 규칙 위반이 아니라는 거지?”

“맞아요. 다른 유저에겐 절대 발설하지 않아요.”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

상엽은 차가운 눈빛으로 도지연을 보며 물었다.

“상점을 죽이면 어떻게 되지?”

“그건…….”

상엽은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들은 걸로 할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만 가 볼게. 상담 고마워.”

“잠깐!”

상엽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지만 도지연은 아니었다.

“상점을 죽이면 더 이상 상점을 이용할 수 없게 돼.”

그녀는 이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상엽이 정말 상점을 죽일 것 같았다.

“신의 상점도 해당되는 거야?”

“물론이야.”

도지연이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상엽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황하지 마. 매력이 없어지잖아.”

상엽은 도지연의 뒷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이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이 억울하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상엽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는 도지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든 선택할 순간이 되면 잠깐이라도 고민해 봐.”

상엽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는 거야. 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도지연은 평소와 달리 흔들리는 눈빛으로 상엽을 보았다. 고민하는 흔적이 선명히 나타났지만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잊지 마. 단 한 번 선택의 기회가 있을 테니까.”

상엽은 도지연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병원을 나섰다.

홀로 남은 도지연은 상엽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선택이라…….”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도 그런 게 있었던가?”

도지연의 표정에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 * *

사흘 동안 중국과 일본에 있는 변종 새들을 정리한 상엽은 철갑 화이트 신의 상점을 찾아갔다.

100억 코인이 모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둘 다 해야 돼.’

블랙 신의 상점에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었다. 결국 두 상점 모두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 특이하군.”

사막의 유랑자 루소는 상엽의 선택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를 본 상엽은 굳이 그와 말싸움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상엽은 이번에도 극단적인 방어를 선택했다.

철갑 비늘의 신, 소투.

도마뱀 인간의 형태였고 강력한 피부 갑옷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스킬이 있었다.

-신의 스킬 꼬리 자르기.

-신의 스킬 꼬리 회복.

하나로 연결된 두 가지의 스킬은 잘린 신체를 단숨에 복구하는 스킬이었다.

스스로 신체를 자르고 도망을 간 뒤에 바로 회복을 하는 능력이었다.

철갑 비늘 역시 아르마딜로의 방어벽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다음은 블랙 상점.’

2급 신을 완성하려면 500억 코인이 필요했다.

‘이제 좀 멀게 느껴지는데.’

2급 신만 완성하면 1급 신의 상점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상점에 대한 의문은 모두 풀리는 것이다.

‘결국 못 갈 가능성이 크지만.’

새로운 상점은 언제나 기대가 되는 요소였다. 하지만 이미 상엽은 이 부분에 집착하지 않았다.

‘프로토가 그냥 두지 않겠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상점이었다. 상엽은 더 이상 코인 수집을 목표로 움직이지 않았다.

* * *

상엽은 테니아 시티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전을 거듭하던 신흥 도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곳곳이 깨졌지만 복구가 되지 않은 도로와 건물들이 예전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는 존재하지 않았고, 식량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고성이 들렸다.

뱀파이어와 변종 새가 물러나고, 변이 인간까지 사라졌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았다.

‘제길.’

악마가 되기로 했던 상엽도 빈민가가 되어 버린 테니아 시티를 보자 심장이 쓰라렸다.

나라를 잃은 국왕.

지금 상엽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한숨으로 표현했다.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고 폭발할 것 같은 열기는 이를 악물며 참았다.

‘복수한다.’

상엽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반드시 복구한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상엽은 아직도 테니아 시티를 포기하지 않았다.

베이징 특수 치안대 사령부.

화이트 길드 연합 뉴벨의 총본부로 불리기도 했다.

본래는 뱀파이어들에 의해 블랙 유저의 접근을 막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이 상엽의 습격 이후로 모두 떠나면서 뉴벨의 연합장인 백림정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상엽에게 세뇌를 당한 백림정은 베이징의 정세가 바뀔 만한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한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정리해서 코드 제로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 양이 워낙 방대했고, 코드 제로에서 요구하는 자료가 있어서 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내부의 반발도 있었지만 백림정은 힘으로 이를 제압했다.

그동안 합리적이고 따뜻하게 길드를 이끌던 백림정은 세뇌가 된 이후로는 내부에도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불만이 극에 달한 바람에 탈출하는 길드원까지 생겼지만 백림정의 성향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길드를 떠나는 자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제거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고 조언도 듣지 않았다.

오직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살인마가 된 것이다.

지금도 백림정은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인님.”

그에게 주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는 상엽뿐이었다.

블랙 유저는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진 특수 치안대 사령부에서 상엽은 가장 상석에 앉은 채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뉴벨의 연합장인 백림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여섯 명의 화이트 길드장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상엽에게 세뇌를 당한 상태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상엽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뉴벨의 모든 길드장을 불러라.

상엽은 이렇게 명령을 내렸고 백림정에 의해 소식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에 응한 건 지금의 다섯 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들의 길드장이 상엽의 손에 죽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리에 참석한 다섯 명도 길드장이 죽는 바람에 새롭게 길드장이 된 자들이었다.

“시간이 됐어.”

시계는 7시 10분을 가리켰다.

“10분이면 충분하겠지.”

약속 시간은 7시였고 상엽은 10분 동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백림정.”

“네, 주인님.”

“참석하지 않은 길드에 대한 정보는 전부 가져와.”

“알겠습니다.”

상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백림은 베이징, 트레지칼은 천진. 그리고 여기 참석한 나머지 다섯 길드에게 중국에 대한 모든 권한을 분배해.”

상엽의 말에 불안한 표정을 하던 자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뉴벨은 없어. 지금부터 화이트 해머. 너희들은 이렇게 불릴 거야. 물론 탈퇴하고 싶은 놈들은 그렇게 해. 선택은 자유니까.”

블랙 해머에 이은 화이트 해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주 달랐다.

“지금부터 전쟁을 시작할 거야. 내 편이 아니면 내 적이 되는 거야. 아주 쉽지.”

상엽은 갓코인 전쟁의 판도를 바꿀 생각이었다.

“겁나는 놈은 빠져. 너희들이 지금까지 했던 전쟁과는 다를 테니까.”

상엽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세뇌가 된 노예마저도 숨을 죽였다.

“이 전쟁은 정복 전쟁이야.”

상엽은 이 세계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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