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상엽은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하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영웅 놀이는 관심 없다는 거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화려한 금으로 장식이 된 의자에 몸을 기댄 이하나는 여유가 넘쳤다.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짧은 핫팬츠 아래로 두 명의 사내들이 개처럼 이하나의 발등을 핥고 있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늘지가 않네.”
이하나의 말에 두 사내가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든 그들은 50대 초반의 중년이었다.
“난 너희들한테 이것보다 수백 배 잘해 준 것 같은데 말이야.”
두 사내는 노예처럼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이하나의 발을 핥고 있지만 한국이 무너지기 전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국회 의원들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 줬는지?”
전직 국회 의원 두 명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하나는 일부러 다리를 꼬는 와중에 국회 의원 한 명의 뺨을 걷어찼다.
높은 하이힐 뒷굽이 스치고 지나간 국회 의원의 피부는 칼로 베인 것처럼 깊은 상처가 남았다.
“어머. 미안해서 어쩌나?”
이하나는 말과 달리 뾰족한 구두로 사내의 상처 부위를 찔렀다.
“기억하지? 예전에 네가 내 팔을 묶고 입으로만 옷을 전부 벗기라고 했잖아. 그래서 겨우 벗겼더니 상이라면서 뭘 줬더라?”
이하나의 질문에 사내는 몸을 떨었다. 얼굴에 남은 상처의 아픔은 공포로 인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 얼굴에 오줌을 쌌지.”
퍽!
이하나의 구두가 사내의 뒤통수에 박혔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 앞으로 쓰러졌다.
“네가 좋아하던 거잖아. 가랑이 사이에 있는 뒤통수를 때리는 거.”
사내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미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다른 사내는 그 모습을 보자 시선을 돌리며 몸을 떨었다.
“너하고도 꽤 추억이 많은데.”
“죄, 죄송합니다.”
“죄송? 아, 맞다. 넌 그 말을 좋아했지? 엉덩이를 눈물이 날 때까지 때려 놓고, 나한테 무릎 꿇고 잘못했다며 빌라고 했지?”
사내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서 말이야.”
이하나는 독기에 찬 예쁜 눈으로 사내를 보며 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울면서 빌어 줬잖아. 갑자기 웃으라고 하면 웃고, 짖으라고 하면 개소리도 내면서.”
사내의 떨림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하나가 진짜 질문을 했다.
“왜 한 번도 용서해 주지 않은 거야? 한 번쯤은 용서해 주면서 부드럽게 해 줄 수도 있었잖아. 어차피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텐데.”
사내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대답이 실망스럽네.”
이하나는 사내의 이마 위에 검지를 세웠다. 그러자 검지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뻗어 나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내 뒤에서 허리를 흔들어 댈 때마다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그건…….”
“세상의 모든 욕을 전부 배웠어. 네 덕분이야. 이건 감사하게 생각해.”
검지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붉은 기운으로 사내를 묶어 놓은 이하나는 음미하듯 천천히 손톱으로 사내의 얼굴을 세로로 갈랐다.
“치워.”
이하나의 한 마디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뱀파이어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빠르게 두 명의 시체를 치우고 다시 이하나 앞에 섰다.
“프로토 님은 뭐래?”
“대답이 없으십니다.”
“알아서 하라는 거네.”
이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하이힐 아래로 사내들이 흘린 피가 묻었지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야겠어. 준비해.”
“전부 포기하시는 겁니까?”
“지금 정상엽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부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걱정 마.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까.”
바닥에 고여 있던 사내들의 피가 이하나의 구두를 타고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핏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더러운 맛이네. 그 녀석들 인생이 더러워서 그런가?”
이하나는 입맛을 다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좀 맛있는 피가 필요해. 이것만 완성되면 정상엽도 내 노예가 될 테니까.”
그녀는 오른손의 주먹을 폈다. 그러자 수만 개의 실타래가 엉킨 것 같은 붉은 구슬이 떠올랐다.
실타래를 이룬 실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지만 완벽한 구체 밖을 벗어나진 않았다.
“정상엽이 어떤 맛일지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
혓바닥으로 입술을 쓸어 낸 그녀는 야릇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부관을 보았다.
“자, 이제 떠나 볼까?”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갈 곳이야 많지. 내가 한국에 있으며 참 많은 남자를 만족시켜 줬거든.”
그동안 이하나는 상엽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정·재계에 힘을 가진 사람치고 이하나를 만나지 않은 자가 드믈 정도였다.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자를 상대하는 그녀를 보며 많은 이들이 속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하나를 만났던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방식으로 만족시킨다.
어떤 취향도 그녀는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남자를 사로잡는 아주 쉬운 방법이었다.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들이 이하나를 원했다. 1년이 지나자 그녀와 약속을 잡으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녀는 특이했다.
신분도 특이했지만 원하는 것도 없었다.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자 그녀를 찾는 이는 더욱 많아졌다.
그때부터였다.
상황이 역전됐다.
둘만 있을 때는 이하나가 노예였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남자는 모든 것을 해 줘야 했다.
남자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다른 여자로는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았고, 이하나만큼 예쁘면서 함께 즐겨 주는 여자는 없었다.
결국 이하나는 어느 순간부터 권력자 위에 군림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예 중에는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상엽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정상엽한테 인사 정도는 해 주고 가야지. 그래도 고향을 떠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이하나는 의자에 망토를 걸쳤다. 그러자 또 한 명의 부관이 나타났다.
“사공강 데려와.”
잠시 후에 집무실 문이 열리고 사공강이 들어섰다.
“잠시 나가 있어. 마지막 인사는 좀 오붓하게 하고 싶으니까.”
이하나는 부관들을 물렸다. 그러자 사공강은 매서운 눈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널 꼭 맛보고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
“그분은 어디 계시지?”
“또 그 질문이야? 내 몸 중에 어디가 민감한지는 궁금하지 않아?”
“닥쳐라.”
“그럼 안 되지. 내 혀를 좋아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사공강은 몸을 떨었다. 그때, 이하나가 해보라는 듯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기회를 줄게. 이건 마루나에게도 기회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공강이 움직였다.
‘지금 죽여야 한다.’
사공강은 이하나를 믿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이하나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이 그때였다.
쾅!
사공강의 강력한 한 방에 집무실 집기들이 모두 부서지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호호.”
방 안이 엉망이 되었지만 이하나는 멀쩡했다.
“내가 만만해 보였어?”
이하나의 망토는 사공강의 일격을 완벽히 막아 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멍해 있는 사공강 앞으로 갔다.
이미 시작된 싸움이라 사공강은 신의 힘을 빌려 검을 꺼냈다. 하지만 이를 휘두르기도 전에 이하나가 손을 뻗었다.
툭.
이하나는 사공강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사공강은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설픈 신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꺼져.”
이하나의 손톱이 사공강의 팔을 파고들었다. 순간 사공강의 몸이 급격히 떨리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사공강에 빙의되었던 신의 힘은 사라졌다.
‘이렇게 강하다니…….’
이하나의 진짜 실력을 몰랐던 사공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더 저항해. 이렇게 물러나면 매력이 떨어지잖아. 약한 남자는 별로거든.”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사공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노예로 만드는 건 재미가 없단 말이야. 너만큼은 그냥 인간인 채로 데리고 놀고 싶었는데.”
사공강은 그녀의 눈빛에서 끝없는 어둠을 보았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멋진 남자의 기사도를 위하여.”
그녀는 사공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사공강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사공강의 눈빛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변종 새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상엽은 지옥마의 속도를 높여 끝까지 변종 새를 추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가오는 파동을 느끼며 방향을 틀었다.
쾅!
운석처럼 떨어진 파동은 바닥에 꽂히며 주변 건물을 무너트렸다.
아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건물이었다.
상엽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을 공격한 인물을 보았다.
“또 너야?”
사공강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요.
사공강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성아였다. 그리고 추종자가 사실을 확인했다.
-세뇌를 당한 상태입니다.
사공강은 이성을 잃은 상태로 나타났다. 상엽은 마음이 아팠지만 이번에도 감정을 눌렀다.
그때, 갑자기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소장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마루나…….”
마루나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상엽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 제발요!”
마루나는 다가올 힘이 부족하자 목소리를 높였다. 사공강도 마루나를 보더니 뭔가 혼란스러운 듯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상엽은 일단 그들의 변화를 기다렸다.
“제발. 제발요…….”
마루나는 필사적으로 다가오더니 결국 상엽 앞에 섰다.
“소장님, 제발요. 그 사람은…….”
마루나는 결국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상엽은 자연스럽게 쓰러지는 그녀를 붙잡았다.
“미안해.”
상엽은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소장님…….”
마루나의 팔은 완전히 부러져 반대로 꺾여 있었다. 그리고 부러진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붉은 핏빛으로 물든 칼이었다.
마루나는 쓰러지는 순간에 상엽을 향해 칼을 뻗었다.
“미안해요, 소장님.”
“사과는 받아 줄게. 그럼 편하게 가.”
“죄송해요. 정말…….”
상엽은 중심이 내려가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툭.
그녀는 명치에 단검이 꽂힌 채로 쓰러졌다. 그리고 빛으로 흩어지더니 상엽에게 흡수되었다.
“조금 서럽네. 일부러 나한테 죽다니.”
상엽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상엽을 향해 다가오며 외칠 때, 일부러 손을 보여 주었다.
그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이미 뱀파이어로 변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상엽은 이를 알기에 피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기에 상엽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기분이 참 더럽네.”
상엽은 괴로워하는 사공강을 보았다. 그런데 사공강은 마루나가 사라지자 상엽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너도 같은 선택을 한 거야?”
상엽은 번개처럼 다가오는 사공강을 보았다.
“운명이 참 가혹하네.”
쾅!
상엽은 물러서지 않고 다가오는 사공강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해머의 충격을 버티지 못한 사공강은 달려올 때보다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그런데 성아가 뜻밖의 말을 했다.
-완전히 지배당한 상태가 아니에요.
“무슨 뜻이야?”
-뱀파이어에게 세뇌만 된 상태예요. 그래서 괴로워했던 거예요.
상엽은 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사공강을 보았다.
“기회가 많지는 않을 거야.”
끼릿!
상엽은 그를 해머로 쳐 내지 않고 해머의 손잡이로 뻗어 오는 칼을 막았다.
“신이라면서? 그럼 능력을 보여 줘야지. 겨우 뱀파이어 따위에게 당하고도 네가 신이야?”
그 말을 하는 순간 사공강의 표정이 구겨졌다.
“사공강은 아직 저항하는데. 신이라는 놈은 포기한 거야? 신이 인간보다 못한 꼴을 너무 많이 보는데.”
“크아아!”
사공강은 결국 머리를 붙잡더니 뒤로 물러났다.
“오래는 못 기다려.”
상엽은 해머를 내리고 잠시 사공강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