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7살의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암흑의 신전에 들어갔다.
신전에서 빠져나온 상엽은 제일 먼저 시간을 체크했다.
아공간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조 배터리를 이용하자 금세 시간이 보였다.
“17개월이라니…….”
1년 5개월이 지났다.
“망할 악마 새끼 때문에.”
상엽은 곧바로 루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제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루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로 연락이 닿지 않자 상엽은 가능한 모든 이에게 기억을 전달했다.
그러자 곧바로 몇 명이 연락을 해 왔다.
동희와 송연지였다.
-시카고로 와.
그 말뿐이었다.
‘왜 테니아 시티가 아니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상엽은 일단 상점 소환권이 있는 시카고로 이동했다.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상엽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시카고의 그레이 상점인 말롯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마치 큰 잘못을 숨기는 친구 같은 모습이었다.
“이쪽입니다.”
상엽은 사무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사하르.’
그 말을 듣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무실을 나서자 사하르가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항상 당당하던 그 표정이 어둡게 보였다.
“일단 여길 벗어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이야?”
“그레이 상점들은 프로토의 감시자들입니다.”
“뭐?”
상엽은 반사적으로 아직 닫히지 않은 사무실 문 안의 말롯을 보았다.
“일단 가자.”
상엽은 사하르과 함께 시카고 밖으로 나왔다.
시카고는 언뜻 보기에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사하르는 말롯이 보이지 않자 충격적인 말을 했다.
“모두 스트라인버그의 지하실에 숨어 있습니다.”
“숨다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엽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가면서 이야기해.”
지옥마 위에 상엽과 사하르가 함께 올랐다. 그리고 남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을 하는 동안, 상엽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상엽이 사라진 직후, 변종 새들이 한국과 테니아를 덮쳤다.
하지만 미리 방어를 한 덕분에 테니아는 피해를 입은 와중에도 변종 새들을 막아 냈다.
한국 역시 팬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변종 새에 이어서 뱀파이어들이 출현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전 세계적으로 출몰한 뱀파이어들은 변이 인간을 이끌며 빠르게 영역을 넓혔고, 이 과정에서도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정상엽과 관련된 모든 이를 전염시킨다.
뱀파이어뿐만이 아니었다.
팬텀에 의해 급격히 세력이 약해지던 화이트 연합이 뱀파이어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테니아를 습격했다.
루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으로 상엽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하나로 모았다.
송연지가 합류했고 흑점도 팬텀이 아닌 테니아를 선택했다.
블랙 해머의 활약으로 처음에는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공격에 결국 테니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루시 님께서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하르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며 말했다.
“대장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고 숨어 있으라고.”
그게 루시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루시는?”
“죽었습니다.”
루시는 정예 병력을 숨기고 마지막 전투를 홀로 참여했다. 이는 단순히 자존심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이 루시 님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끼가 된 것이다.
-코드 원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때까지 힘을 모아.
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 전투를 끝으로 테니아는 뱀파이어들에게 점령당했고, 블랙 해머는 추격이 불가능한 스트라인버그의 지하실에 머물렀다.
“망할…….”
상엽은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감정을 꾹 눌렀다.
도착한 곳은 아마존이었다.
넓은 아마존 밀림의 깊은 호수 아래가 그들의 은신처였다.
은신처로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상엽 앞으로 달려왔다.
“오빠, 걱정 많이 했어요.”
송연지와 동희, 그리고 적설까지 한자리에 있었다.
그와 기억 전달로 연결된 이들이었다. 단 한 명만 대답한 것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광신이 형은?”
“지배당했어.”
그나마 감정 조절에 능숙한 적설이 결과를 알렸다.
“흑점은 뱀파이어에게 지배당했어. 테니아 시티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완전히 무너졌고, 테니아 시티는 뱀파이어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네가 돌아올 걸 노리고 인질로 잡아 놓은 거야.”
테니아 전체가 상엽을 상대로는 훌륭한 인질이었다. 거기에 흑점의 인물들까지 있었다.
“모두 고생했어.”
블랙 해머의 인원도 100명으로 줄어들었다. 긴 전투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온 것이다.
아무리 저택 못지않게 훌륭한 지하실이라고 해도 그들은 다섯 달이 넘도록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쌓인 감정들이 상엽을 향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물도 있었고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원망은 크지 않았다.
상엽이 어떻게 실종이 되었는지 대부분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그런데도 상엽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그러자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자가 나타났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블랙 해머의 대원들이었다.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서 있지만 복받친 감정을 모두 참아 낼 수는 없었다.
상엽은 자신의 감정을 지우고 잠시 그들에게 시간을 주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우선이었다.
송연지와 동희, 스트라인버그와 용소.
100명의 블랙 해머와 다섯 명의 여전사들.
지하실에 머무는 인원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코드 제로와 테리아 그룹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 그런데 그 위치를 우리도 몰라.”
테리아 그룹 자체의 매뉴얼에 따라 몸을 숨긴 것이다.
“오빠,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당연히 복수해야지.”
“나도 같이할게요.”
“미안해. 나 때문에.”
“원래 적은 많아요.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상엽은 그녀가 말하는 약속이 뭔지 기억하지 못했다.
“설마 잊은 거예요?”
“그럴 리가.”
“유령 추종자 스톱.”
송연지는 추종자가 상엽의 기억을 더듬으려 한다는 걸 예상했다.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다음에 다시 만나면 제가 오빠를 지켜 주겠다고요.”
상엽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고 말았다.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마워.”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너희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 그 전에 나한테 잠시만 시간을 줄래?”
그들은 프로토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상엽도 이 부분을 아직 성아와 상의하지 못했다.
성아는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상엽과 함께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수호신으로 있을게요.
상엽이 이를 허락하면서 힘을 모두 되찾았지만 예전처럼 곁에 있었다.
상엽은 잠시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작은 방의 의자에 앉은 상엽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운명이 참 가혹하네.”
그의 손에는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무지개를 담은 꽃 모양의 수정이었다. 수정은 살아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여러 빛을 발산했다.
에레나의 생명초.
누나를 살릴 수 있는 유산이었다.
상엽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추종자와 성아는 그의 생각을 읽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긴 고민이 끝나자 상엽의 손에 있던 생명초가 빛으로 부서졌다.
그 빛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한 여인이 상엽 앞에 나타났다.
상엽은 여인을 보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많은 감정이 묻어 있는 웃음이었다.
이를 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코드 원. 어째서 저를......”
상엽이 살린 여인은 루시였다.
“너도 울 줄 아는 거야?”
“죄송합니다.”
“네가 없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루시는 대답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상엽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루시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 신이 돼서 누나를 살릴 거니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하지만…….”
루시는 눈물을 흘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 능력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내가 원한 건 네 능력이 아니야. 바로 이거지.”
상엽은 루시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건 멀쩡하잖아.”
루시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고, 결국 상엽은 그녀를 안아 주었다.
“이제 시작이야. 마음 단단히 먹어.”
루시는 이를 악물며 울음을 참았다.
“코드 제로에 연결해서 최대한 네 힘을 찾아.”
자세한 명령은 할 필요가 없었다. 루시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은 죽지 마. 다음에는 안 살려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곧 회의가 시작돼. 다시 살았으니까 5분만 쉬고 나와.”
상엽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왔다.
루시의 부활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갓코인 유저가 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회의장에 등장한 루시는 모든 이들의 환영을 받았고, 상엽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내가 신이 되면 날 위해 죽은 사람과 너희들이 원하는 사람을 모두 살릴 거야. 약속해.”
그렇게 말하며 상엽은 송연지와 적설을 보았다.
“너희들도 선택해.”
정식으로 같은 편이 되라는 말이었다.
“좋아요. 오빠가 신이 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나도 좋아.”
그들 모두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자, 그럼 우리가 복수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 줄게.”
상엽은 그때부터 자신이 암흑의 신전으로 들어가게 된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했다.
절대신이자 중재의 신 프로토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유일신을 위한 신들의 전쟁도 언급되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모든 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인간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네요.”
송연지의 말에 상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토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돼. 그리고 의도도 파악해야 하고.”
프로토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인간들을 전멸시키지 않았다.
“갓코인이 나타난 것도 전부 프로토의 짓이야.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나도 아직 몰라.”
상엽은 그렇게 말하며 성아를 불렀다.
성아를 처음 본 몇 명은 그녀의 엄청난 미모와 분위기에 놀라워했지만 심각한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중재의 신은 신들의 분쟁을 조정하는 유일한 신이에요. 그래서 오랫동안 신들의 존경을 받았고 절대신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신들의 율법을 어긴 자는 다른 신들이 힘을 합쳐 심판관에게 넘긴다.
이런 심판관 역할을 하던 자가 파이어스였다. 상엽이 들고 있는 해머의 주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들의 율법은 특정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웠다.
“신이니까요. 그래서 율법에 어긋나지 않지만 분쟁들이 생기곤 해요. 보통은 직접 해결을 하지만 문제가 심각해지면 중재의 신이 나서게 되죠.”
이런 역사가 오래되자 중재의 신은 절대신이 된 것이다.
“신들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신들이 소멸했어요. 하지만 신들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어요. 제가 지금 인간에서 다시 신이 된 것처럼요. 프로토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갓코인을 만든 것 같아요.”
신들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기회를 프로토는 갓코인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주었다.
“두 가지를 이용했어요. 신들의 부활과 후계자 선정. 지금 갓코인은 신들이 다른 존재를 시험하는 방식과 동일해요. 후계자를 뽑는 시험인 거죠. 방법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본질은 같아요. 시련을 주고 이를 극복한 자를 후계자로 선정한 다음 자신은 신으로서의 일생을 끝내는 거죠.”
성아는 자신이 직접 조사한 부분과 예상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제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갓코인과 일반적인 후계자 선정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어요. 누구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한 명이 여러 사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성아가 가장 주목하는 게 이 부분이었다.
“신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후계자를 선정할 수 있어요. 프로토가 소멸한 신의 동의를 얻었다면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왜 이런 방법을 썼는지를 계속 생각했어요.”
“그게 목적이라는 거지?”
“그렇다고 생각해요. 프로토는 한 사람이 여러 신의 힘을 가지길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끝없이 경쟁하게 만들죠. 그 경쟁을 통해 후보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한 사람이 많은 신의 힘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갓코인의 경쟁 시스템이 성아를 통해 밝혀졌다.
“그다음은?”
“확실하게는 몰라요.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봤어요.”
상엽은 아마도 그 최악의 상황이 프로토의 목적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 프로토의 노예가 된 뱀파이어들. 본래는 그들도 인간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자들이었어요.”
“그렇다면 인간을…….”
송연지가 반사적으로 그 끝을 생각하다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은 성아의 입을 통해 완성되었다.
“인간 노예. 여러 신의 힘을 가진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게 프로토의 목적이라 생각해요. 그 정도의 힘이라면 신들의 전쟁에서 홀로 승리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유일신이 되는 거네.”
“맞아요.”
성아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회의장에는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