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그 외에는 어떤 소리도 없는 공간이었다.
“으…….”
상엽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갓코인을 획득하고 나서 이토록 일어나는 것이 괴로운 적은 없었다.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온몸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블랙 상점의 강화가 없었더라면 다시 정신을 잃었거나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큭!”
상엽은 이를 악물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유령아.”
보통 상엽이 기억을 더듬으면 추종자가 도와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유령아.”
상엽은 좀 더 큰 목소리로 추종자를 불렀다. 하지만 추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아.”
이번에는 성아를 불렀다. 하지만 역시 기다리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옥아.”
지옥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멸했지.’
친위대와 지옥마는 소멸했다. 그들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야 소환이 가능했다.
그런데 상엽은 친위대와 지옥마가 몸속에 있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죽은 건가?”
하지만 선명한 아픔은 그것이 아님을 알렸다.
상엽은 일단 주변을 살폈다.
그가 쓰러진 곳은 동굴 안이었다. 입구를 막아 놓은 것 같은 벽에는 악마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자연 동굴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상엽은 입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은 것이다.
“큭.”
다시 고통이 올라오자 상엽은 문양이 그려진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아공간을 열었다.
“안 돼…….”
아공간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회복도 지나치게 느렸다.
새살이 돋아나긴 했지만 여전히 근육 전체가 드러난 곳이 많았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였다.
상엽은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제야 멍하던 정신에서 지난 시간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절대신 프로토와의 만남부터 지옥마가 돌진하던 순간을 인지한 것이다.
“암흑의 신전.”
결국 그는 지옥마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암흑의 신전으로 들어왔다.
“망할.”
화가 치밀었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프로토 앞에서 무기력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치열하게 성장했고, 다른 유저들을 압도했지만 최고 실력의 신에게는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빨리 가야 돼.”
분노에 이어 의무감과 걱정이 뒤따랐다.
“그 개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프로토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토는 그럴 힘이 있었다.
“성아가 있다면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움직이자. 움직여야 돼.”
상엽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허리에서 강한 충격이 올라오며 그의 몸을 무너트렸다.
“망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에겐 더 많은 휴식이 필요했다.
겨우 5미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햇빛이 없어서 며칠이 지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눈을 감으면 잠이 들었고 다시 정신을 차려도 움직일 상태가 되지 못했다.
‘회복하자. 그게 먼저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상엽은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알아냈다.
‘스킬이 하나도 없어.’
그가 가진 어떤 힘도 이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최소한의 신체 능력뿐이었다.
이것은 무기력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상엽의 투지까지 꺾진 못했다.
‘신전이야. 통과하면 돼.’
상엽은 냉정해지기로 했다. 서두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 나가면 프로토를 이길 수도 없어.’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엽은 회복을 기다렸다.
‘이럴 시간이 있는 것도 행운이야.’
회복이 되기 전에 괴수라도 나타났다면 상엽은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상엽은 급한 마음을 미뤄 두고 현실에 집중했다.
새로 돋은 살이 자리를 잡았고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불규칙한 수면 시간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상엽은 드디어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동굴을 살폈다.
제일 먼저 그가 오랫동안 기대고 있던 벽의 문양이 다시 보였다.
벽에 그려진 악마의 얼굴은 분노를 표현하는 듯했다.
내부로 이어지는 자연 동굴은 불규칙하게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덕분에 바닥은 축축한 흙으로 되어 있었다.
“암흑의 신전이라는 거지?”
상엽은 평소보다 많은 긴장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에겐 어떤 무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머도 없다니…….”
무기가 소환이 되지 않았다.
애용하는 무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한 허전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몸의 균형이 무너진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럼에도 상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을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다. 시간을 더 끌어 봐야 없는 스킬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동굴이 꺾이는 부분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희미하지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상엽은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꺾이는 빛 앞에 섰다.
동굴이 끝나고 나타난 곳은 엄청난 크기의 광장이었다.
빛은 광장 중앙에 세워진 악마의 석상에서 시작됐다.
악마가 손을 들어 떠받치는 푸른 수정구에서 시작된 빛이었다.
석상 외에 다른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넓이는 야구장 수십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컸다.
그리고 상엽이 들어서는 곳의 반대쪽에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 그런데 이 길은 또 자연 동굴의 형태였다.
상엽은 광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보냈지만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가자.’
결정을 내린 상엽은 드디어 흙이 아닌 대리석을 밟았다.
우웅!
방금 지나온 동굴의 입구에 검은 장막이 내려왔다. 그리고 반대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고 가는 길이 모두 막혔지만 상엽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겪어야 될 일이야.’
상엽은 천천히 석상이 있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가 석상 앞에 도착할 때까지 주변의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석상 앞에 서자 수정구의 빛이 상엽에게 모였다.
-낄낄낄! 정말 인간이 여길 왔다는 거야?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쇳소리에 상엽은 이를 악물었다. 실제로 상엽의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성대 수술이라도 좀 하던가.”
-낄낄낄! 제법 배짱도 있고!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상엽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치 기 싸움인 것 같아서 고통을 그냥 참아 냈다.
-낄낄낄!
경박한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현기증까지 유발했다. 하지만 상엽은 몸에 힘을 주며 버텨 냈다.
-좋아! 인간! 원하는 대로 실컷 괴롭혀 줄게! 이게 얼마 만의 장난감인데! 낄낄!
상대가 악마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내거나 방법을 알려 주는 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라 상엽도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으며 악마가 관심을 가질 만한 단어를 꺼냈다.
“지옥마가 날 여기로 인도했어.”
-아 참. 맞아. 지옥마가 있었지.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거야? 여기로 오는 유일한 통로라는 걸 알아.”
-낄낄!
“처웃지 말고, 들어.”
상엽은 결국 거친 말을 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악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간 따위가! 난 대악마 탄야다! 무릎을 꿇어 사죄하라! 목을 그어 피로 용서를 빌어라!
그 순간 엄청난 공기의 압력이 상엽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상엽은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압력을 힘으로 버텨 냈다.
“어차피 너나 나나 신한테 깨져서 여기 온 건 똑같아.”
이를 악문 상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프로토 그 새끼를 잡지 못할 거면 여기서 죽어야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런데 악마의 분노는 프로토라는 이름을 듣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 누구라고 했지?
“프로토. 여길 나가면 그 새끼를 죽여야 돼.”
-프로토? 절대신 프로토? 중재의 신! 프로토!
“그래. 그 개새끼를 잡아야 한다고.”
-프로토!
악마는 그 이름에 폭발할 듯이 분노했고 석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분노는 상엽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너도 프로토한테 당했구나.”
그 말에 석상이 갑자기 파괴되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실제 악마는 석상의 다섯 배는 됨직한 덩치였다. 그 덩치가 작은 석상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악마는 50미터가 넘는 검은 몸에 삼각 턱을 가졌고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휘어진 두 개의 뿔이 이마에서 시작됐고 날개 끝에도 가시가 돋아 있었다.
악마는 위협적인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어 상엽과 눈을 마주쳤다.
상엽은 압도적인 기운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입이라도 닿으면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상엽은 힘이 없음에도 당당했다.
“인간 따위가!”
“그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워.”
“지금 감히 대악마 탄야를…….”
“그럼 바로 죽이든가. 다시 수천 년을 기다려 봐. 아마 나 외에는 아무도 여기 못 올 테니까.”
상엽은 프로토와의 짧은 만남으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만 간절한 게 아니야.’
악마 탄야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상엽은 고막이 터질 듯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를 깨달았다.
그런데 탄야는 상엽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 입구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몸을 회복할 때도 탄야에겐 수천 번의 기회가 있었다.
“선수끼리 뻥카는 집어치우자고.”
상엽의 말에 악마의 분노가 사라지고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악마의 몸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재미있는 인간이 왔어. 어디서 미친 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더니.”
탄야는 상엽보다 조금 작은 신장의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자주색 피부에 날개와 뿔이 사라졌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비단옷을 입었다.
인간으로 치면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의 외모에 핏빛 입술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지금부터 시작될 일을 친절히 알려 주지. 난 꽤 친절한 악마니까.”
말투마저 변했다.
“싸가지 없는 소년처럼 보이네.”
“뭐라고 했지?”
“미안.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나 봐. 계속해.”
상엽은 일부러 농담을 하며 여유를 가지려 노력했다.
“좋아. 나는 너그러운 악마니까.”
이번에는 상엽도 별말이 없이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넌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거야. 영혼이 찢어지고 세포가 하나하나 썩어 가는 걸 느끼게 되겠지. 감정은 사막처럼 마를 거고, 결국에는 스스로 죽여 달라고 하게 될 거야.”
탄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상엽을 보았다.
“그게 뭐?”
상엽의 반문에 탄야는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마주했다.
“두렵지 않아?”
“전혀.”
“그래?”
탄야는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야? 그냥 내가 괴로우면 되는 거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텐데.”
“낄낄! 당연히 너에게도 기회가 있지! 난 아주아주 공평한 악마니까!”
탄야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와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기를 하는 거야.”
악마와의 내기였다.
“내기에서 이기는 쪽이 전부 가지는 거지. 힘, 영혼, 신체까지 전부.”
악마는 상엽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악마에게 전부를 내놓아야 하는 인간의 표정은 꽤나 즐거운 감상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엽의 표정은 달랐다.
“그 말을 기다렸어.”
상엽은 거짓말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에 불쾌해진 건 오히려 탄야였다.
“악마와의 내기인데 두렵지 않아?”
“두렵지.”
“그런데 왜 웃지?”
“널 가질 생각을 하니까 즐거워서.”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인간이 악마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애초에 신도 이길 수 없는 게 악마의 시험이야.”
“해 보자고. 신 따위 어떻든 난 인간이니까.”
“좋아, 인간. 끔찍하게 찢어져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내기에 져서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게 될 테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말이야.”
상엽의 자신감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