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두 사내가 마주 보았다.
“이 날씨에 망토라니. 덥지 않아?”
“허세를 부리고 싶나?”
망토 사내의 목소리는 음침할 정도로 낮고 굵었다.
“날 잡으려고 꽤 큰 이벤트를 준비했던데. 그냥 찾아오지 그랬어?”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비웃음을 보였다.
하얀 피부가 시체를 연상시키는 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핏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보니 인간 같은 느낌이 없었다.
“너 사람 맞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가 움직였다.
망토에 숨겨진 팔에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단검이 들려 있었고, 순식간에 상엽의 목을 파고들었다.
깡!
아르마딜로의 방어벽이 단검을 막았다. 그런데 방어벽이 단숨에 깨져 버렸다.
그 공격으로 사내와 상엽은 동시에 놀랐다.
사내는 공격이 막힌 것에 놀랐고, 상엽은 아르마딜로의 방어벽이 단 한 방에 깨지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상엽은 본능적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첫 공격이 실패한 사내는 이를 보자 망토로 몸을 가렸다.
쾅!
상엽의 해머는 망토를 강타했다. 그런데 상엽은 손에 닿는 느낌으로 공격이 막혔음을 알았다.
해머가 망토를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폭발은 망토에서 일어났고, 사내는 피해 없이 뒤로 물러났다.
빠른 반격이기에 모든 힘을 실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적용되는 강력한 스킬들이 있는데도 허무하게 막힌 것이다.
‘차원이 다른 상대다.’
다시 망토를 등 뒤로 돌린 사내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아프군.”
“아프라고 때린 거야.”
“용서하지 않는다.”
“아기 같은 놈이었네. 조금 아프다고 투정이라니.”
상엽의 도발에 사내는 양손에 단검을 꺼내 들며 다시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격 목표가 상엽이 아니었다.
상엽이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지옥마였다.
푸르!
지옥마는 도망가지 않고 앞발을 들어 쳐 내려 했다. 이에 상엽은 지옥마를 문신으로 되돌려 충돌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스트 실드를 밟고 사내에게 스트라이크를 시도했다.
힘을 실은 해머가 사내의 몸에 닿기 직전, 사내의 몸이 구겨진 필름이 나타내는 영상처럼 흔들리더니 상엽의 등 뒤에 나타났다.
이를 본 상엽은 그대로 정면을 타격했다.
쾅!
사내는 상관없는 폭발을 내버려 두고 상엽의 뒷목을 그으려고 했다.
‘유령 잔상.’
그때, 사내의 등 뒤에서 다시 한번 폭발이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망토가 사내를 지켜 주었다.
츳!
중심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사내는 상엽의 뒷목에 단검의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피부가 살짝 긁힌 정도였다. 압축피부가 막아 준 것이다.
“다음에 봐.”
상엽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지옥마를 소환했다.
‘여기서 싸우는 건 불리해.’
독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도 뭔가가 준비되고 있었다.
몇몇 괴물들은 단순히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변이 인간을 등에 태웠다.
날아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쫓아올 거야.’
상엽은 구름을 벗어난 지역에서 싸우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러 정말 도망가는 것처럼 지옥마를 타고 변종 새가 만든 장벽으로 다시 돌진했다.
“파괴전차.”
지옥마의 속도에 파괴전차를 더한 상엽은 겹겹이 쌓인 변종 새의 장막을 단숨에 통과했다.
“달려.”
파괴전차를 시전하느라 잠시 소환을 해제한 지옥마를 다시 부른 상엽은 빠르게 독구름의 영역을 벗어났다. 그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황은 상엽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끼아아!
장막을 이루던 변종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상엽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숫자만 무려 100만 마리가 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날아오른 괴물까지 같은 방향으로 날아갔다.
‘테니아 쪽이야.’
그들이 직선으로 계속 이동한다면 결국 테니아에 닿게 된다.
독구름 아래에서 망토 사내는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도망가지 않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라 이거지?”
변종 새들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령을 내리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걸 원했어?”
애초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변종 새를 이용해 일본을 무너트린 것은 테니아에서 일어날 결과를 미리 보여 준 것이다.
테니아가 일본처럼 되는 것을 막으려면 어차피 호주에 올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라는 자리에서 내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시간이 많은가 보군.”
상엽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막을 거야.’
망토 사내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블랙 해머가 있으니까.’
동희에 의해 특별 수련을 한 블랙 해머는 엄청난 실력자로 성장했다.
게다가 광전사의 정수를 얻은 다섯 명의 여전사도 있었다. 그 외에 시카고 출신을 비롯한 여러 이민자들도 기본적인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
‘민간인 피해가 크겠지.’
이것이 문제였다.
테니아가 붕괴되는 일은 없겠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고 산업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상엽은 일단 기억 전송을 통해 동희에게 현재 상황을 알렸다.
‘어차피 저 녀석은 잡아야 돼.’
이 사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상대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느낌이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상엽은 지옥마를 다시 움직여 천천히 독구름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크큭!”
망토 사내는 불쾌하게 웃었다. 상엽이 다시 돌아온 걸로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랄한다.”
쾅!
상엽은 망토 사내를 향해 화염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지옥마에서 뛰쳐나오며 바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빠르게 동희의 음료를 마시며 신체 능력을 증폭시킨 상엽은 파상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3급 신의 능력을 습득하면서 상엽은 공격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망토 사내는 놀란 눈으로 반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상엽이 미리 폭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망토로 앞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상엽은 일부러 스킬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망토를 때렸다. 사내는 망토 사이로 한쪽 눈을 보이며 반격을 노렸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자 망토 사내가 스킬을 쓰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파괴전차.’
상엽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상엽이 예상할 수 있는 장소에 나타났다.
쾅!
파괴전차로 돌진한 상엽은 사내의 망토를 들이받았다. 하지만 망토는 견고했고 사내는 그 자리에서 버텨 냈다.
지금까지와 달리 스킬까지 쓰며 방어막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상엽의 돌진은 그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 위력이었다.
그리고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령 잔상.
망토 위에서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정확히 같은 지점에 떨어진 공격은 이번에도 사내에게 충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변화는 있었다.
펄럭!
사내의 망토가 찢어진 것이다.
이를 본 상엽은 파괴전차 대신 스트라이크를 펼쳤다. 팔각 대시로 방향을 빠르게 바꾼 상엽은 결국 사내의 등 뒤를 잡고 해머를 휘둘렀다.
하지만 사내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웅크린 살쾡이가 발톱을 세우듯 사내는 빠른 동작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해머를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흘리고 손을 뻗어 상엽의 목을 노렸다.
츳.
사내의 단검이 상엽의 목에 닿았다. 그런데 상엽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사내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유령 걸음.
처음부터 이를 노렸던 상엽은 다시 나타나는 순간 망자의 손길을 가시처럼 뻗었다.
푹!
사내의 몸에 세 개의 가시가 통과했다. 사내의 움직임이 일순 완전히 멈췄고 입을 벌린 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데 상엽은 그것이 진실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상엽은 망자의 손길을 다시 한번 뻗었다.
그때, 사내의 표정에 웃음이 떠올랐다.
가시로 꿰뚫린 몸은 유유히 뒤로 물러났고 상엽과 급격히 거리를 벌렸다.
상엽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별거도 아닌 게.”
“크큭. 오만하구나.”
망토 사내의 몸을 꿰뚫었던 흔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송곳니가 맹수처럼 자랐고 동공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손톱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뱀파이어예요.
성아가 그제야 상대를 알아봤다.
“흡혈귀?”
상엽의 반문에 사내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아, 모기 인간?”
그 말에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성아는 뭔가 더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뱀파이어를 확인한 성아는 곧바로 상엽의 뒤에 나타나더니 전투를 돕기 시작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성아는 아래로 가라앉는 먹구름을 공기의 힘을 이용해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엽은 그 말에 대답할 틈이 없었다.
진짜 모습을 드러낸 사내와 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상엽은 전투를 하면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뭐야? 할 만하잖아.’
상엽이 예상한 것보다 상대는 강하지 않았다.
공격의 파괴력은 아르마딜로의 방어벽을 깨트릴 정도였고 특이한 스킬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당할 일도 없고 피를 조종하는 그의 특이한 스킬도 상엽에겐 먹히지 않았다.
“빨리 피해요!”
그런데 성아는 계속해서 도망갈 것을 외쳤다.
쾅!
결국 상엽은 뱀파이어의 몸에 해머를 꽂았다. 망토가 너덜너덜해진 뱀파이어를 향해 돌진을 계속했고 끝내 머리를 날려 버렸다.
모든 상처를 치료하던 뱀파이어도 머리가 터지자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다.
“빨리!”
성아가 재차 외쳤다. 상엽은 그 말에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 판단하며 지옥마를 바다 쪽으로 하강시키며 독구름의 범위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내려오던 독구름에서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콰릉!
스파크는 엄청난 굵기의 번개가 되어 먹구름 끝에 거미줄을 펼쳤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번개의 창살 앞에서 지옥마는 앞발을 들고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이미 번개는 호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소음과 바다까지 떨어진 번개로 인해 물줄기가 하늘까지 튀어 오르자 상엽조차도 압박감을 느꼈다.
“뚫을 수 있어. 나한테 맡겨.”
지옥마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하지만 상엽은 통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바로 앞까지만 뛰어.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푸르!
지옥마는 다시 용기를 내서 돌진했다. 그런데 성아가 그 앞을 막았다.
“늦었어요.”
상엽은 그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상엽은 몇 가지 의문이 풀렸다.
망토 사내가 생각보다 약했던 이유.
그리고 성아가 피하라고 한 이유.
“대장이 아니었단 말이지?”
열 명의 뱀파이어들이 지상에서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상엽이 상대했던 뱀파이어는 그저 열한 명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뱀파이어는 중재의 신, 프로토의 수하예요. 여긴 프로토의 영역이에요.”
“위험한 녀석이야?”
“블랙과 화이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유일한 신이에요. 그리고…….”
성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절대신이기도 해요.”
“절대신? 신들의 대장이라는 뜻이야?”
“비슷해요.”
대화를 하는 사이에 이미 열 명의 뱀파이어들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라.’
거기다 이들은 겨우 수하일 뿐이었다.
절대신 프로토라는 녀석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뱀파이어들은 갑자기 이동을 멈췄다.
금방이라도 싸울 수 있는 거리였다.
대신 하늘의 먹구름이 굉음을 쏟아 내더니 거대한 얼굴 형태로 변했다.
먹구름 사이에 나타난 얼굴을 보며 상엽은 자신도 모르게 감상을 말했다.
“인상 더럽네.”
절대신을 향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자 얼굴 주변에서 강렬한 번개가 떨어져서 상엽을 스치고 지나갔다.
워낙 빠른 공격이라 상엽은 아슬아슬하게 번개를 피했지만 살짝 스친 정도로도 피부가 찢어졌다.
압축피부까지 단숨에 뚫어 버린 것이다.
‘저기를 통과했으면.’
상엽은 그제야 성아가 왜 번개의 벽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했는지를 깨달았다.
-하찮은 인간이여.
굉음이 줄어들자 하늘 전체를 울리는 웅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부르는 거야? 난 하찮은 놈이 아닌데.”
상엽의 평가가 어떻든 중재의 신으로 보이는 얼굴은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기회를 주겠다. 나의 노예가 되어 신명을 받들라.
상엽은 뜻밖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나의 노예일 뿐이지만, 인간에게 너는 절대자가 될 것이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런데 유혹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툭.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상엽은 본능적으로 떨어지는 물건을 잡았다.
‘에레나의 생명초.’
마지막 10번째 조각이었다.
-나의 노예가 되어 인간 세상을 지배하라.
유혹을 넘어선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