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레나.
한나래에겐 가족이 없었다.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때부터 늘 혼자였다.
부모님이 남겨준 재산이 꽤 있어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외로움은 언제나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집착한 것은 무용이었다. 자신의 아픔을 무용으로 표현했고, 행복을 꿈꾸며 춤을 추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픔이 레나를 촉망받는 무용수로 만들었다.
본래 무용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자신이 무용하는 모습을 예뻐해서 계속하다 보니 그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무용이 17살의 사고를 기점으로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무용 대회의 상을 휩쓸면서 자연스럽게 대학으로 진학했고 그곳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용수로 평가받았다.
이미 학생의 신분을 뛰어넘었다는 평가였다.
유럽의 많은 예술단에서 그녀를 원했지만 자신을 아껴 주던 교수님을 위해 졸업 후에도 유럽이 아닌 국립 무용단을 택했다.
그렇게 2년의 실전 경험을 쌓은 한나래는 드디어 유럽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출국을 사흘 앞둔 시점에서 누군가 그녀가 혼자 있는 집으로 침입했다.
한나래가 기억하는 자신의 배를 찌르려던 날카로운 칼끝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짓말처럼 15년이 흘러 있었다.
“제가 마흔 살이라는 건가요?”
거울을 보았지만 그녀는 25살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세월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요. 나래 씨가 깨어난 것도 기적이니까요. 지금 나래 씨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기적이에요.”
곁에 있던 간호사는 친절했다.
인터넷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15년 전과 지금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설명해 주었고, 한나래가 혼란스러워하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주었다.
한나래는 간호사 덕분에 변화를 차분히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푹 자요. 그리고 내일은 다른 생각을 해요. 과거 말고 미래요.”
“미래…….”
“당신이 뭘 하고 싶은지. 내일은 그걸 이야기해요.”
간호사는 피곤한 표정의 한나래를 침대에 눕혀 주고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나래 씨는 참 예뻐요. 부러울 정도로요.”
“간호사님도 너무 예뻐요.”
15년 만에 깨어난 첫날. 한나래는 친절한 간호사 덕분에 웃으며 잠이 들 수 있었다.
새란 요양 병원에는 스무 명의 환자가 있었다. 소규모 병원이었지만 시설은 최고급 병원에 못지않았고, 마흔 명의 간호사가 근무할 만큼 여유로운 환경이었다.
일반적인 경제 상식으로는 운영이 될 수 없는 구조였다.
한나래를 돌보는 간호사는 퇴근 시간에 맞춰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 둔 고급 외제 차에 오른 간호사는 시동을 걸기 전에 전화기를 들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보고를 마친 간호사는 그제야 차를 몰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간호사가 도착한 곳은 병원 근처의 호텔이었다.
5성급 호텔의 입구에 있던 직원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자동차 키를 건네받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녀를 보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일부러 다가와 안부를 묻는 직원도 있었다.
친절한 웃음으로 답을 한 그녀는 곧 엘리베이터를 통해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따로 직원이 배치되어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한 달째 최고가인 스위트룸에 머무르는 손님이 바로 그녀였다.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선 간호사는 최고급 소파에 핸드백과 입고 있던 옷을 집어 던지더니 샤워실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샤워기의 물을 틀고 하루 일과의 스트레스를 얼굴에 닿는 적당한 감촉으로 씻어 내리기 시작한 그녀는 희미하게 자신을 비추는 유리를 보고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대로 있어.”
유리에 낯선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목에 섬뜩한 칼날이 닿아 있었다.
“적설, 이게 무슨 짓이야?”
“어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야?”
적설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간호사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과정에서 간호사는 목에 대고 있는 칼날이 자신의 피부를 자르지 않을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너 때문에 옷이 젖어 버렸네.”
“그게 왜…….”
“남자들이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젖은 옷은 적설의 몸매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자, 이제 머리를 말리러 가 볼까?”
적설은 샤워기를 틀어 놓은 그대로 간호사를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지금부터 날 놀라게 하지 마. 안 그러면 목이 잘릴 테니까.”
적설은 단검 대신 붉은색의 목걸이를 간호사에게 걸었다.
목걸이는 간호사의 목에 걸리자 급격히 줄어들며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상태를 만들었다.
그 상태가 되자 적설은 간호사를 소파로 밀었다.
“켁! 켁!”
간호사는 목에 걸린 고리를 잡고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죽는다니까.”
적설이 신호를 하자 고리가 다시 줄어들었다.
“컥!”
간호사는 괴로운 듯이 적설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마지막 기회야.”
적설은 고리를 다시 조정해 간호사를 살려 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콜렉터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 나쁠 것 없잖아.”
간호사는 콜렉터 소속의 갓코인 유저였다. 레나가 깨어나기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나래가 된 레나의 사회 적응을 도우면서 가장 친한 사람이 될 예정이었다.
“한나래 옆에서 계속 15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서 궁금하게 만드는 거지. 그래서 스스로 과거의 의문을 풀고 싶다고 하면, 도와주는 척하면서 과거를 함께 보게 되는 거고. 참 치밀해. 이건 진심으로 감탄했어.”
콜렉터의 방식이었고 적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래를 지켜 주던 간호사를 주시했다.
“간호사치고는 너무 친절하잖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정말 콜렉터와 싸우고 싶어?”
간호사는 계속해서 콜렉터를 들먹였다. 이에 적설이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런 너희들은 정상엽과 싸우고 싶어?”
간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정상엽이 눈치 못 채게 하라.
이를 위해 콜렉터 길드원들은 한국에서 떠난 상태였다. 정상엽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간호사에게는 아주 큰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콜렉터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뭔지 알지?”
적설은 간호사에게 손목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익숙한 시계가 나타났다.
“이 기억을 정상엽에게 보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전송은 즉각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이를 간호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한나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기억이 정상엽에게 전송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간호사는 비웃듯이 물었다. 적설의 의도를 파악하자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적설은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정상엽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아, 네 방식의 사랑? 아니면 살려 준 것에 대한 보답?”
간호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적설과 상엽의 현재 관계는 물론 과거까지 들먹였다.
“역시 콜렉터는 대단하네. 사생활까지 알고 있다니.”
“그걸 알면서 이런 짓을 해?”
“그럼 이것도 알겠네.”
적설은 허리를 숙이며 간호사와 눈을 맞췄다.
“내가 얼마나 잔인한 년인지도 알아?”
간호사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내 스승을 죽인 년이라는 거.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적설의 눈빛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말투도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그것이 간호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말은 신중해야 하는 거야, 간호사 아가씨.”
적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간호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콜렉터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겁을 먹을까?”
그녀는 웃으며 말을 끝내더니 오른손 검지를 살짝 튕겼다. 그 모습에 간호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지만 의외로 그녀의 목을 감싸던 고리가 사라졌다.
“한나래에게서 떨어져. 다시는 나타나지도 말고.”
적설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간호사는 붉게 자국이 남은 자신의 목을 만지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5분 후.
적설은 렌트한 승용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간호사를 압박하던 고리가 들려 있었고 이를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적설이 한나래에게서 떨어지라고 경고를 하고 떠났습니다.
“효과 좋네.”
적설은 간호사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리자 눈을 떴다.
-유산 감시의 고리.
본래는 의심스러운 노예에게 채우는 목줄이었다. 이것은 피부 안에 드러나지 않는 문신을 새겨 노예의 목소리를 고리로 전달했다.
“콜렉터가 이것까지 알까?”
그녀는 콜렉터의 정보를 원했다.
“한나래는 그냥 미끼지. 콜렉터와 정상엽을 모두 움직일 수 있는 미끼.”
적설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고리에 집중했다.
* * *
국가 테니아의 수도 테니아 시티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27살이네.”
새해를 기념한 축제였다.
언제나 그렇듯 새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했고 상엽은 그동안의 힘든 생활을 축제라는 형식으로 보상해 주었다.
축제가 열리는 테니아 시티에는 많은 도시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시청으로 찾아온 어리숙한 표정의 사내가 손을 들며 인사를 했다.
이에 같이 동행했던 어머니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놈아, 예의를 갖춰야지.”
“괜찮아요, 어머니. 국왕이 되기 전에 친구가 됐던 사이니까.”
상엽의 말에 어머니는 감격했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고 어리숙한 사내는 눈치를 보더니 따라서 절을 했다.
“아소, 잘 지냈어?”
상엽은 결국 절을 하는 아소를 직접 일으켰다.
소수 민족 마을을 끝까지 지키던 벙어리 사내 아소는 상엽의 손길에 특유의 순진한 웃음을 보였다.
“왔으니까 실컷 먹고, 재밌게 놀다가 가. 알았지?”
아소는 아이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자식을 아껴 주시고 먹고살 길까지 열어 주셔서. 이건 보잘것없지만 저희 마을에서 폐하께 바치는 공물입니다.”
아소의 어머니는 소수 민족 특유의 무늬로 덮인 보자기를 상엽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상엽은 거절하지 않고 이를 받아 직접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유물 조각 하나가 있었다.
“석 달 전에 아소가 마을 주민을 죽인 변종을 처리하고 얻은 것입니다. 귀한 거라고 해서 국왕 폐하께 드리려고 보관해 두었습니다.”
아소의 부족은 여전히 다른 도시에 비해 힘든 삶을 살았다.
워낙 소박한 민족이라 도시 생활보다는 농경 사회를 중시했고 상엽은 이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다른 도시에 비해 발전이 느렸지만 그들은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상엽이 적극 지원한 농업 기술과 정책만으로도 살기 좋아졌다며 고마워했다.
“너무 큰 선물을 주셨네요.”
상엽은 조각을 아소에게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루시가 눈짓으로 제지를 했다.
지금은 받아 주는 게 좋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상엽은 루시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선물을 받기로 했다.
“아소, 마을을 누가 지켜야 하는지 알지?”
아소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만 믿는다.”
아소는 가슴을 소리가 나게 두드리고는 어머니와 함께 시청을 나섰다.
“다음은 이민족 대표입니다.”
“또 있어? 나 그냥 나가서 놀면 안 돼? 저 음악 소리 안 들려?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잔뜩 있는데?”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상엽은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이는 아주 지루한 일상이었다.
“곧 끝납니다. 그리고 일 년에 단 하루입니다.”
일 년에 하루라는 말이 상엽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 후로도 상엽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불만을 터트리긴 했지만 시카고의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테니아의 시장과 주민 대표까지 자신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과가 끝났을 때는 저녁 8시였다.
“배고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건 본능이야. 배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배고픔이라고.”
상엽 정도의 실력이 되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영양 섭취를 해야 한다고 인지하는 정도였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됐어. 뭘 따로 차려? 저기 많은데.”
상엽은 시청 밖을 가리켰다.
축제는 어두워지는 하늘과 반대로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직접 참여하실 생각이십니까?”
“국왕은 그러면 안 돼?”
“아닙니다. 국민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국민들보다 내가 더 좋아할걸?”
상엽의 말에 루시는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도였다.
“좋아. 그럼 국왕이 잠시 광대가 되어 볼까?”
상엽은 시청을 벗어나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빠르게 해머를 휘둘렀다.
펑! 펑! 펑!
검게 물들던 하늘에 불꽃들이 화려하게 퍼졌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상엽은 그 목소리보다 더욱 밝게 웃으며 축제장의 중앙에 내려섰다.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상엽은 직접 만든 불꽃이 여전히 밤하늘에서 분수처럼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저도 국민입니다. 체면 따위 개나 줘 버리고 같이 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와아아!
국민들은 아낌없는 환호성으로 상엽과 함께하는 축제를 받아들였다.
화려한 불꽃 아래에 테니아 시티.
그곳에는 새해에 어울리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웃는 건 아니었다.
많은 웃음들 사이에 가려진 섬뜩한 웃음이 환호성에 묻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