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237화 (235/300)

# 237

누구에게나 인생에 특별한 하루는 있기 마련이다.

그 특별한 하루를 결국 잃게 되는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사라질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1분 1초를 느끼는 그녀를 보며 상엽은 억지로라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하루.

그녀가 원했던 하루는 평범한 일상의 데이트였다.

함께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았다.

‘이걸 안 했구나.’

상엽은 그제야 레나와 이런 일상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너무 야성적이었나 봐.”

“로맨틱하진 않았지.”

“오늘은 다를 거야.”

상엽은 레나가 보지 못하도록 슬쩍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러자 추종자가 그의 손바닥에 반지 하나를 놓았다.

“꽃은 준비를 못 했어.”

상엽은 그렇게 말하며 잡고 있던 레나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를 보는 레나의 표정은 묘했다.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있었다.

“생각하지 마. 설사 내일 사라진다고 해도 지금 내 마음은 진짜니까. 이건 감사 인사야.”

“고맙긴 한데 내 스타일이 아닌데.”

“쳇.”

말과 달리 레나는 반지가 끼인 손을 한참 동안 보았다.

내일이면 사라질 반지였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금의 감정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생각해. 과거와 미래,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거지.”

“네가 멸망시킬 건 아니지?”

“그건 모르는 일이야. 알다시피 난 오늘만 살잖아.”

“그게 네 매력이긴 하지.”

둘은 본능적으로 슬퍼지려는 감정을 피했다.

다시 일상을 즐긴 그들은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지만 때때로 슬픔이 복받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엽이 옛날이야기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나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어땠어?”

“애송이 같았지. 두 번은 못 볼 줄 알았어. 그런데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고. 그다음부터는 죽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어.”

“솔직히 기다리기도 했지?”

“뭐, 부정하진 않을게.”

그들 사이에는 추억이 많았다. 레나도 그 추억 중의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내가 언제 제일 예뻤어?”

“눈밭.”

“눈밭?”

“산에서 불렀을 때, 눈밭 위에서 서비스해 줬잖아.”

“역시 변태네.”

상엽이 아직 산에서 사냥을 하던 시절에 레나는 눈밭에서 옷을 벗은 적이 있었다.

“진짜 천사 같았어.”

“지금은?”

“악마. 거부할 수 없는 악마 같아.”

“난 악마가 더 좋은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침부터 시작된 데이트는 금세 점심이 되었고, 저녁으로 이어졌다.

“일하러 갈 거야?”

“가야지. 마지막 무대니까.”

“기대할게.”

상엽은 손님이 되어 클럽으로 들어갔다.

관객들은 이것이 레나의 마지막 무대라는 사실을 모르고도 환호성을 질렀다.

항상 있는 일이었고 언제나 무대 위의 그녀는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마지막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레나는 모든 것을 쏟아 냈다. 클럽은 터져 나갈 것 같은 환호성으로 가득했고,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격렬한 춤이 이어졌다.

상엽은 그들 틈에서 춤을 출 수가 없었다.

“왜 슬프게 보이냐?”

레나는 웃고 있었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그런데 상엽은 그 모습이 슬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였다.

다행히 마지막 무대는 정해진 시간에 끝났다. 상엽에게만 보이는 슬픔도 거기까지였다.

무대를 마친 레나는 대기실이 아니라 상엽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대놓고 와도 돼? 팬들이 많을…….”

말이 끝나기 전에 레나의 입술이 상엽의 입을 막았다. 주변에서는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상엽은 그들의 환호성에 맞춰 레나를 안고 더욱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정상엽이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에서도 누군가 상엽을 알아봤다. 가면을 알아볼 수 있는 갓코인 유저가 있었던 것이다.

“팬은 네가 더 많은 거 같은데.”

“한 번쯤은 이렇게 일탈을 해 줘야 하는 거야. 한국에선 내가 너무 착하게 포장되어 있어.”

“내가 너한테는 일탈이라는 말이야?”

“일탈이지. 너랑 있을 때는 아무 생각 안 하니까.”

상엽은 그녀와 다시 입맞춤을 하고는 그대로 클럽을 나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밤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서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냈다.

상엽은 잊지 않기 위해, 레나는 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뜨거운 사랑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몇 번의 끝을 보았는지도 모를 때쯤에 둘은 천장을 보며 침대에 누웠다.

오피스텔 안에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레나의 거친 숨소리만 울렸고, 이것이 잦아졌을 때는 거짓말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마웠어.”

레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상점이기에 무엇이 고마웠는지 왜 고맙다고 하는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고 싶어?”

상엽의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많은 질문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너무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때, 레나가 상엽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상점이 열렸다.

“지금?”

“행복할 때, 끝내고 싶어서.”

상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여전히 상엽의 품에 안긴 채로 상점의 마지막 역할을 수행했다.

“뭘 살 거야?”

“친위대 20단계까지.”

레나가 해 주는 마지막 강화였다. 레나는 스킬을 강화해 주기 전에 다시 한번 상엽과 입을 맞췄다.

그리고 긴 입맞춤 속에서 그녀는 진한 눈물을 흘렸다.

레나는 상엽의 품에서 벗어나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답게 훌륭히 이를 해냈다.

그렇게 레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엽을 향해 웃었다.

“레나, 할 말이 있어.”

레나는 울음으로 인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상엽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갓코인 유저가 아닐 때, 화이트 유저와 블랙 유저를 동시에 죽였어.”

레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게 내 비밀이야.”

상엽이 말해 주지 않은 유일한 비밀이었다. 이제 상엽은 레나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안해. 난 말해 줄 수가 없어.”

“괜찮아.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 내일의 레나는 훨씬 더 예쁘고 매력적일 거야.”

레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고 흔들리는 눈과 입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잘 가. 또 보자는 말은 못 하겠다.”

결국 레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상엽이 마지막 확인을 했다.

“강화. 결정했어.”

상엽의 몸에서 회색 빛이 빠져나가면서 레나에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상점과 함께 레나는 사라졌다.

“갔구나.”

텅 빈 오피스텔에 상엽만 홀로 남았다.

“거짓말 같네.”

레나의 옷, 화장품, 향기까지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먼지만 쌓인 오피스텔이었다.

상엽은 홀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공허한 마음에 때때로 찬바람이 머물렀다 가는 듯했다.

“나도 정이 남아 있구나.”

사랑일까?

이 생각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인정을 했다. 하지만 인생을 걸 정도로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은 진짜였다.

다시는 레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상엽의 마음에 큰 구멍으로 남았다.

“날 위한 하루도 필요하겠어.”

상엽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레나가 아닌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상엽은 홍대 근처의 호프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에이씨. 안 취해.’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할 리가 없었다. 지금 상엽은 독을 마셔도 정상적으로 소화가 되는 상태였다.

‘그냥 옥상 가서 바람이나 쐬자.’

단 하루의 휴식도 평범한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미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상엽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잘생긴 오빠, 시간 있어?”

그녀는 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받으며 상엽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어?”

“친구가 필요한 거 같은데. 맞아? 아니면 혼자 고독을 즐기게 사라져 줄까?”

“친구. 좋지.”

상엽은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웃으며 잔을 받는 이는 적설이었다. 그녀가 즐겨 입는 타이트한 옷이 매력적인 골반을 도드라지게 하면서 남성들의 시선을 모았다.

“레나가 졸업한 게 그렇게 슬퍼?”

“알고 있었네.”

“당연하지. 내가 계속 조사하고 있었는데.”

“뭐 좀 알아냈어?”

“미련이야? 호기심이야?”

적설은 놀리듯이 질문을 했다. 이에 상엽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냥 고독한 척해 봤어.”

상엽은 그 말을 하며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레나는 이상한 부분이 있어.”

“무슨 말이야?”

“레나가 죽었다는 그 기사 말이야. 강도 살인.”

“그런데?”

“내가 살인범을 직접 만나고 왔거든.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

적설은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안 죽였대. 정확하게는 못 죽였대.”

“뭐?”

“누가 레나를 죽여 달라고 청부를 했나 봐. 그래서 죽이러 들어갔는데, 레나의 배를 찌르는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고 하더라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경찰서였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기억이 지워졌어. 깨끗하게.”

15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때는 갓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네 생각은 어떤데?”

“갓코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된 거 같아. 다만 그 준비 기간이 필요했던 거지.”

“그럼 레나가…….”

“맞아. 초기 멤버인 거야. 갓코인이 준비되던 시기부터 있었던.”

적설은 상엽이 채워 준 술을 뒤늦게 마시더니 조금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문제가 될 거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가 가진 기억이 많아.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나뿐일까?”

“설마?”

“콜렉터. 그 녀석들이 레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

콜렉터는 상점을 통해 여러 가지를 알아내려 했다. 그런 콜렉터에게 레나는 최고의 대상이었다.

“어때? 술값은 충분히 한 거 같은데.”

“한 가지가 빠졌잖아.”

상엽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물었다.

“지금 레나는 어디 있어?”

적설은 들켰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이미 끝난 인연이야.”

“알아. 그래서 많이 끼어들진 않을 거야. 콜렉터 녀석들이 건드리지 못하게만 하면 돼.”

“눈물 나는 배려네.”

“그 정도 가치는 있는 여자라서.”

“쳇. 뭔가 불쾌해졌어.”

적설은 직접 술을 따라 시원하게 마시더니 탁자를 가볍게 치고 일어났다.

“당분간 안 나타날 거야.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해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고.”

“고마워.”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명함이 남아 있었다.

-새란 요양 병원.

상엽은 남은 술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은 한나래였다.

레나라는 이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25살의 전도유망한 무용수는 강도에게 살해를 당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으며 조작된 결과로 인해 그녀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물인간이 되어 15년째, 새란 요양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기적이 일어났다.

15년 만에 식물인간이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기뻐해 주지 않았다.

15년간, 그녀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깨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그녀는 이미 고아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병원비는 익명으로 충분히 지불이 되었고 출처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눈을 뜬 그녀는 아직은 혼란스러운지 혼자 쓰는 병실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상엽은 요양 병원의 옥상에서 추종자를 통해 그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나마 곁에 있는 간호사가 그녀를 잘 챙겨 주고 있었다. 현재 시간을 말하고,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친구처럼 알려 주는 중이었다.

‘그냥 간호사는 아닌 거 같은데.’

간호사 역시 준비된 인물로 보였다.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지.’

상엽은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란을 극복하는 레나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관능적이고 당당하던 표정 대신 순수하고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네.’

그렇게 나름대로 선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상엽의 서 있는 옥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모습을 감추지 않고 일부러 드러낸 것이다.

“다시 뵙는군요.”

콜렉터 길드장 샌디르였다.

그를 본 상엽은 인사 대신 준비했던 말을 했다.

“그냥 돌아가.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마.”

“그건 곤란합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라.”

“결정은 네 몫이야. 대신…….”

상엽은 샌디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목숨 걸고 싸우게 될 거야.”

샌디르는 몸을 감싸는 살기를 느끼며 결코 허풍이 아님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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