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상엽은 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파괴전차가 유령 잔상으로 터지고, 팔각 대시로 꺾인 스트라이크가 콜로세움을 무너트릴 듯이 폭발을 일으켰다.
유령 군대와 다섯 명의 여전사는 전투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여전사들은 오히려 상엽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서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1만 마리의 변종들은 채 5분을 버티지 못했다. 빼곡하게 모여 있는 것은 오히려 상엽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상엽을 그저 씨앗 보유자로 보던 여전사들은 그 전투를 보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언니들, 나 조금 부담스러워졌어.”
“사실 나도 그래.”
그들에게 상엽은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야 좀 싸운 거 같네.”
모든 변종을 처리한 상엽은 이렇게 말했다.
“후우.”
그는 힘을 쏟아부었던 탓에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응?”
소용돌이가 다시 한번 상엽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변종을 쏟아 냈다.
“안 끝난 거야?”
상엽은 착각을 했다.
아마존의 변종 개체 수를 너무 적게 잡은 것이다.
“좋아. 판돈이 크니까 할 만해. 힘든 일이 보수도 좋은 법이지.”
다시 한번 1만 마리의 변종이 모였다.
그렇게 무려 다섯 번의 전투가 펼쳐졌다.
“헉. 헉.”
상엽도 드디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다시 변종이 나타났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혹시나 변종이 더 쌓일지도 몰라서 단숨에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해보자.”
상엽은 동희의 음료수로 그나마 피로를 회복하며 다시 전투에 나섰다.
여덟 번째 1만 마리 전투를 치르면서 상엽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폭격으로 떨어진 이후에 상승하는 게 늦어 버린 통에 변종 거미가 뿜은 거미줄에 걸린 것이다.
그 짧은 틈에 남은 5천 마리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상엽은 상승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서서 육탄전을 펼쳤다.
지옥마가 그를 구출하고 다시 상승해 결국에는 모두 처리하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고 있었다.
“회생.”
결국 상엽은 회생으로 체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리고 두 번의 전투가 이어졌다.
“10라운드 끝.”
1만 마리 변종을 10번이나 혼자서 해치운 상엽은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소용돌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검은 소용돌이는 물방울처럼 터지더니 하늘로 치솟았고 갑자기 100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100개의 물줄기는 일정 간격을 맞추며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라운드야?”
드디어 자격시험이 끝나고 진짜 적이 나타났다.
-마지막 시험을 시작한다.
친절하게도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광전사라 이거지?”
검은 투구와 갑옷.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은 검은 안개의 광전사들은 구겨진 철제 갑옷들이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피부는 투구 안의 얼굴이었는데 이마저도 안개로 이루어져 있어 이목구비는 볼 수가 없었다.
99명의 광전사들은 열을 맞춰 서 있고, 그 앞에 대장으로 보이는 은빛 갑옷의 전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투에 앞서 주문처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억울함에 저항하는 것은 용기이며, 우리의 용기는 죽음으로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 신이여, 너의 오만함과 경멸의 시선을 받는 우리들이 너의 목에서 베어 낸 피로 축배를 들 것이니. 우리와 맞설 때까지 결코 회개하지 말지어다.
그들의 목소리는 낮고 변화가 없는 노래 같았다. 결연한 의지가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압도적인 살기로 변했다.
피부가 저릴 만큼의 적개심을 상엽은 분명히 느꼈다.
“간단해서 좋네.”
상대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를 인지한 상엽은 본능적으로 해머를 세우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후방에 있던 열 명의 전사들이 구겨진 방패를 모으며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상엽은 언제나 그렇듯이 벽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쾅!
상엽의 한 방에 방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전사들은 콜로세움의 벽까지 날아가서 처박히더니 다시 일어섰다.
“막았다고?”
상엽의 공격이 막힌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인지한 순간, 10개의 화살이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아르마딜로의 방어막이 다급히 펼쳐졌다.
푹. 푹. 푹.
‘뭐야?’
벽에 막혀 떨어질 줄 알았던 화살이 방어막에 그대로 꽂혔다. 방어막을 통과하진 못했지만 상엽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화살에 이어 이번에는 날카로운 5개의 창이 날아왔다. 상엽은 더 이상 상대를 얕보지 못하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수십 개의 화살이 상엽을 뒤쫓았고, 전사들이 빠르게 전진하면서 상엽의 발아래에 위치했다.
위험한 기운을 느낀 상엽은 스트라이크를 통해 그 자리를 벗어나 뒤로 물러났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지나갔고, 곧이어 은색 빛이 모여들더니 압축된 점으로 변했다.
빛은 어떤 폭발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상엽은 한순간 공간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위험해.’
상엽이 느낀 것은 은색 빛이 아니었다.
‘내 힘이 약해졌어.’
스킬을 쓰면서 분명히 깨달았다. 지금 상엽은 본래의 힘이 절반도 발휘되지 않았다.
‘저 녀석을 잡아야 돼.’
선두에 있던 은빛 기사가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은빛 기사가 뿜어낸 파란 기운이 콜로세움 전체를 감쌌다.
-신을 이긴 전사들.
그들의 영역에서는 신의 힘이 절반도 발휘되지 못했다.
“이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지.”
상엽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우리도 같이 싸울게.”
여전사들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합류를 결정했다.
“죽을 수도 있어.”
“당연하잖아.”
이잔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전투는 죽음을 걸고 싸우는 생존 경쟁이다. 그녀들에게 전투는 일상이었다.
‘난전으로 간다.’
진형을 갖춘 군대는 체계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상엽은 이 점을 떠올리며 선두로 나섰다.
“기회가 생길 거야.”
상엽은 지옥마의 등에 오르며 다섯 여전사들을 대기시켰다.
푸르!
지옥마도 콜로세움의 핸디캡을 받는지 불쾌한 소리를 냈다.
“왜 이래? 겁먹은 거야?”
히잉!
상엽의 도발에 지옥마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시간 끌면 끝장이야.’
상엽은 동희의 음료를 마시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끝낼 것을 다짐했다.
‘성아.’
지옥마의 돌진에 창병들이 나서서 날카로운 저지선을 만들었다. 그 뒤에 방패병까지 있어서 지옥마라 해도 돌진해서 지나갈 수는 없을 듯했다.
그때, 성아가 나타나서 변수를 만들었다.
그녀 역시 핸디캡을 받지만 공기를 움직여 창끝을 내릴 힘은 충분했다.
방패와 창이 내려가는 순간, 지옥마가 그들의 벽을 뛰어넘었다.
‘궁병부터.’
상엽은 지옥마에서 뛰어내리며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쾅!
전투는 그때부터였다.
상대 진형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상엽은 곧장 유령 군대를 소환했다.
‘일단 성공.’
계획대로 난전이 벌어졌다. 광전사들의 진형이 흐트러졌고 창병과 방패병은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여전사들이 창병의 뒤통수에 화살을 쏘며 전장에 합류했다.
상엽은 해머보다 망자의 손길을 이용해 더욱 어지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팔각 대시로 빼곡한 적들 사이를 누비며 계속해서 시선을 끌었고 결국 목표물을 직접 보는 위치로 이동했다.
“대장부터.”
그가 노리는 건 은빛 기사였다. 하지만 상대도 상엽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방패병들이 재빨리 대장 앞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상엽은 은빛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상엽이 다시 해머를 꺼내자 방패병들이 다시 한자리로 모였다.
툭.
그런데 상엽은 해머가 아니라 발로 방패를 밟으며 높이 뛰어올랐다.
“뛰어!”
상엽의 외침에 여전사들이 전투를 그만두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상엽은 모든 힘을 다해서 해머를 휘둘렀다.
신의 스킬 파괴의 일격.
거대한 해머가 콜로세움 천장을 가득 메웠다.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하지만 상엽은 파괴력에 자신이 있었다.
상엽의 공격에 지상의 방패병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우산을 쓰듯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방패 아래로 숨어들었다.
“건방지게.”
유령 군대를 다시 불러들인 상엽은 멈추지 않고 바닥을 향해 파괴의 일격을 꽂았다.
엄청난 크기의 해머는 정확히 방패병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르릉!
콜로세움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하늘을 막았던 방패들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고 폭발은 콜로세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소멸하는 자가 나타났다.
다섯 명의 방패병들의 투구가 바닥을 뒹굴었고 몸을 이루던 연기는 생명을 다한 숯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겨우?’
상엽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스킬을 시전했다.
‘파괴전차.’
그의 몸이 돌진을 하려 할 때였다.
지금까지와 달리 파란빛을 머금은 화살 한 발이 다가왔다. 그 기세가 워낙 엄청나서 상엽은 급히 스킬을 멈추고 방어벽을 만들었다.
푹!
아르마딜로의 벽이 깨지고 고스트실드까지 뚫은 화살이 상엽의 목에 닿았다.
툭.
그나마 거북신 호트의 기운이 있어 화살촉이 피부를 관통하진 못했다.
하지만 화살촉 끝에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상엽은 잠시지만 죽음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힘이 강했더라면 화살촉이 목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은빛 기사의 한 방에 죽음을 체험을 한 상엽은 이를 악물었다.
‘파괴전차.’
그리고 다시 돌진을 선택했다.
‘쫄면 죽는 거야.’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이 중요했다.
‘난전으로 가야 돼.’
잠시 난전을 벗어난 탓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상엽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다시 난전을 시도했다.
파괴전차로 상대를 위협한 상엽은 진형의 중간에 떨어졌고 다시 유령 군대를 소환하며 전투를 시작했다.
‘하나씩.’
욕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쾅!
상엽은 가장 근처에 있는 적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난전도 상엽이 생각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100명의 전사들 중의 20명을 처리했지만 상대는 능숙하게 전술을 바꾸며 대응했다.
‘이대로는 지치겠어.’
상엽뿐만 아니라 여전사들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상엽의 곁으로 이잔카가 내려서더니 간단하게 뭔가를 말했다.
“할 수 있겠어?”
이잔카는 상엽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자.”
상엽은 이잔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과격한 공격을 시작했다.
‘파괴전차.’
상엽의 파괴전차가 땅을 스치며 시도되었다. 광전사들은 부딪치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며 반격을 가했다. 투박한 창이 전사의 엄청난 속도를 뚫고 피부를 긁기도 했고, 화살은 예상 이동 경로에 집중적으로 떨어졌다.
‘스킬을 기다리고 있어.’
광전사들은 상엽이 스킬을 쓸 때마다 반격을 시도했다.
‘그럼 좀 더 기회를 줘야지.’
상엽은 상대의 매서운 반격에도 파괴전차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지옥마까지 소환해 전장을 어지럽혔다.
쿵. 쿵. 쿵.
어느 순간, 파괴전차 앞에 방패병 다섯 명이 나타났다. 상엽은 이를 파괴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화살병들이 방패병의 뒤로 늘어서면서 파괴전차와 힘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콰쾅!
결국 폭발이 일어나며 파괴전차가 멈춰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유령 잔상을 대비했는지 전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콰쾅!
결국 유령 잔상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들이 인간이었다고? 신이 아니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상엽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다시 파괴전차를 사선으로 꽂았다.
이번에는 광전사들이 맞서지 않고 흩어졌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날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
상엽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변종과의 계속된 싸움을 단순히 체력을 빼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이 녀석들은 지능이 있으니까.’
체력을 빼는 것도 맞지만 더 큰 이유는 상엽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상엽을 상대로 효과적인 반격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툭! 툭!
바닥으로 떨어진 상엽의 피부에 날카로운 창끝이 닿았다. 압축피부로 이를 버텨 낸 상엽이 손을 뻗어 회수하는 창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예상했는지 양쪽에서 도끼를 든 자들이 상엽의 손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살벌하네.”
상엽은 결국 다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힘만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면.’
상대가 워낙 강한 것도 있지만 공격력이 약해진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파괴력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상엽의 공격 패턴이 전부 막혀 버렸다.
“그런데 결국 내가 이겼어.”
과격한 공격을 계속하던 상엽이 갑자기 여유를 부렸다. 그때, 바닥을 울리는 공허한 소리 하나가 들렸다.
툭.
바닥에 떨어진 것은 은빛 투구였다. 그리고 쓰러지는 은빛 갑옷의 뒤에는 다섯 명의 여전사가 있었다.
그 순간, 상엽은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콜로세움의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좀 다를 거야.”
상엽의 표정에 야차의 웃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