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전설의 아마조네스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툰카라는 아마존의 원시 부족으로 꽤 호전적인 원주민이었다.
그리고 변종이 나타났을 때,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이들이었다.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땅속의 창고로 대피를 시켰고 전투에 임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자들도 음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단 한 명의 어른과 열세 명의 여자아이가 남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 준 것은 구망소잔이라는 특이한 나무 열매였다.
변종들은 이 나무 열매의 냄새를 싫어했고 이를 통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함정을 파고 변종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힘겨운 과정 속에서 남은 어른마저 죽고 다섯 명의 여자아이만 살아남은 것이다.
“이잔카는 여기서 8년을 살았다는 거네.”
그녀의 이름은 이잔카였고 올해로 20살이었다.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최고 위험 지역의 변종들을 어린아이들이 하나씩 처리하고 친구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마지막 엄마가 말했어. 반드시 살아서 부족을 번영시키라고.”
“슬픈 이야기네.”
“씨앗을 준다면 기쁜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이야기가 또 그쪽으로 흐르네.”
“난 부족을 번영시켜야 하니까.”
“그 번영에 대한 해석이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닐까?”
“어차피 씨앗을 받지 않으면 부족의 미래는 없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엽은 원시 부족의 번영을 위해 씨앗을 제공해 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여길 떠나는 건 어때?”
“우린 여길 떠나서 행복할 수 없어.”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청난 문화 차이가 있는 외부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시도라도 해봐. 그 정도는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일단 번영부터…….”
“그거 알아?”
상엽은 그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외부에는 남자가 많아. 다양한 씨앗이 있다는 거지.”
“너만큼 강한 남자는 없을 것 같은데.”
“나보다 잘생긴 남자는 많아.”
그 말에 이잔카가 걸음을 멈췄다.
“정말이야?”
“뭐야? 너 지금 잘생긴 남자가 좋다는 거야?”
“잘생겨서 나쁠 건 없지.”
“나는?”
“네 외모가 장점은 아니지.”
직설적인 평가에 상엽은 감정이 상했다.
“너한테 씨앗을 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알지.”
그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이동에 집중했다.
“곧 도착해.”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상엽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네 친구들은 왜 따라오는 건데?”
“내가 실패하면 다른 동료가 도전할 테니까.”
이잔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이잔카를 제외한 4명의 동료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상엽을 따라오는 중이었다. 다만 이잔카를 확실히 밀어주기로 했는지 직접 나타나진 않았다.
-주인님.
추종자의 간단한 부름에 상엽의 표정이 변했다.
“여긴 위험한 변종이 많아. 조심해야 돼.”
이잔카가 마침 주의를 주었다.
“늦었어. 이미 포위됐어.”
그제야 이잔카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싸우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알려. 괜히 방해하지 말라고.”
이잔카가 나무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상엽은 밀림을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부러져 나갔고 그의 돌진으로 만들어진 파동은 한순간 회오리가 되어 주변의 나뭇잎을 날렸다.
쾅!
전투는 상엽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200마리의 원숭이와 30마리의 고릴라, 손가락 크기의 독사들이 함께 움직이는 군대였다.
“종합 선물 세트네.”
상엽은 마다하지 않고 변종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폭음이 들리는 밀림에서 다섯 명의 여전사는 한 곳에 모여 그 광경을 지켜봤다.
“역시 매력적인 씨앗이야.”
그녀들의 평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포위망은 상엽의 힘 앞에 그저 싸우기 좋은 진형일 뿐이었다.
“이잔카, 가자.”
전투를 끝낸 상엽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피했던 이잔카를 불렀다.
“이잔카, 너 좀 부러운데.”
“언니, 실패하면 내가 바로 덮칠 거니까 빨리 시도해.”
“내가 연습한 기술들을…….”
이잔카는 친구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상엽의 곁에 내려섰다.
“다친 데는 없지?”
그 한마디에 이잔카는 갑자기 이동을 멈췄다.
‘이 느낌은 뭐지?’
부드러운 전류가 심장을 어루만지고 가는 느낌이었다.
설렘.
이잔카에겐 아직 생소한 감정이었다.
30분 후.
이잔카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밀림 한가운데 멈춰 섰다.
“여기야.”
그녀는 자신의 바로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창으로 가볍게 찌르는 시늉을 했다.
툭.
그런데 창끝이 공중에서 뭔가에 막혔다. 그리고 대리석처럼 매끈한 돌로 만들어진 재단이 나타났다.
1미터 크기의 재단은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고 아래로는 아슬아슬할 정도로 얇은 원통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었다.
그냥 간단히 밀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구조였지만 상엽이 꽤 힘을 썼음에도 멀쩡했다.
‘그 녀석도 꼭 가져야 돼.’
신전 건설가가 만든 어떤 물품도 평범하지 않았다.
“다른 재단 위치도 알아?”
“알아.”
여덟 방위 재단의 중심에 변종왕의 둥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만으로 위치를 파악하긴 어렵다는 뜻이었다.
“몇 개나 알아?”
“세 개.”
이잔카도 아는 건 세 개 정도였다.
“그 정도면 충분해. 가자.”
“너무 서두르지 마. 그러면 나한테 기회가 없잖아.”
“넌 지금 살려 준 보답을 하는 거야. 날 유혹하는 건 그 과정에서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
이잔카는 그 말을 잠시 생각하더니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고 안내를 시작했다.
세 개의 재단을 찾았다.
‘대충 알겠어.’
재단의 위치를 놓고 봤을 때, 완벽하진 않아도 짐작은 가능했다.
“이제 됐어. 돌아가.”
“왜?”
“변종왕의 영역으로 들어갈 거야.”
“같이 싸울게.”
“방해만 돼.”
상엽은 냉정하게 그녀의 동행을 거절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꼭 다시 와.”
“알았어.”
상엽도 그 정도는 받아들였다.
“대신 살아남으면.”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또 봐.”
갓코인 특유의 인사를 한 상엽은 홀로 변종왕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끝도 없이 들이닥치던 변종이 사라졌다.
변종왕의 영역은 거짓말처럼 고요했고 가끔씩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 새소리가 나무에 반사되며 부서지곤 했다.
상엽은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중앙을 향해 걸었다. 그는 신중했지만 지나치게 경계하진 않았다.
‘변종일 뿐이야.’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어갔을 때, 상엽은 1층으로 된 묘한 건물을 보았다.
악마와 같은 조각상이 입을 벌리고 있는 장소였다. 악마의 입은 지상과 붙어 있어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로 만들어져 있었다.
악마의 조각 자체가 워낙 리얼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찾기 편해서 좋네.”
상엽은 이곳이 둥지임을 알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야. 내부는 꽤 넓고 미로처럼 만들어 놨지.
지하에 비밀 기지가 있는 것이다.
“겁이 많은 녀석인가 봐. 햇빛을 싫어하거나.”
상엽은 입구가 10미터 남은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건 인사.”
화르르!
상엽은 입구를 통해 강렬한 화염을 쏟아부었다.
화염은 어두운 내부를 밝히며 벽을 타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화염이 사라질 때쯤, 상엽도 입구로 뛰어들었다.
-다른 장치는 없어.
스트라인버그에게 이미 정보를 들은 터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찾아내서 제거한다.’
과정과 결론은 간단했다.
상엽은 화염이 사라지며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지만 아무 문제 없이 내부로 들어갔다.
좁은 입구를 지나자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났지만 스트라인버그의 지도를 기억한 상엽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2층으로 가는 길.’
이곳만 찾으면 바로 둥지가 나타난다고 했다.
-어떤 놈인지는 나도 몰라. 직접 본 적이 없어.
납치를 당했음에도 명령만 따랐다고 했다. 상엽은 미로를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2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계단?’
계단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다. 변종이 동물이라면 굳이 계단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상엽은 무기를 미리 꺼내고 계단을 내려갔다.
2층 천장이 높은 탓에 계단을 내려가는 데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벽을 타고 만들어진 계단은 안쪽을 보는 벽면이 막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발에 닿는 촉감이 지금까지와 달랐다. 표면에 작은 돌기가 있기도 했고 기울기가 완벽하지도 않았다.
‘스트라인버그가 만든 게 아니야.’
누군가 보수 공사를 한 것이다.
상엽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툭.
드디어 계단이 끝나면서 시야를 가리는 벽이 사라졌고 지하 2층의 내부가 보였다.
‘뭐야?’
그곳은 거대 부화장이었다.
수만 개에 달하는 알들이 바닥에 빼곡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갖가지 생물들이 있었다.
알의 외벽이 투명하고 내부는 녹색 액체로 채워져 있어서 부화를 앞둔 생물체를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크기 정도의 알에 비해 내부의 생명체는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다.
‘기생충?’
상엽이 처음 부화장을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장에서 빛이 쏟아졌다. 따뜻하고 강렬한 빛은 천장에 박힌 보석에서 발생했다.
빛이 알들을 비추기 시작하자 기생충 같던 모습이 급격히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알들이 숨을 쉬듯이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알을 박살 내고 뛰쳐나올 것 같은 모습에 상엽은 선택을 해야 했다.
화르르!
상엽은 굳이 알들의 부화를 지켜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라인버그가 집을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볼까?”
상엽은 알뿐만 아니라 둥지 전체를 무너트릴 작정이었다. 이에 망설이지 않고 천장이 닿을 듯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알들이 가득한 부화장의 중앙을 보며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그만두지.”
누군가 상엽이 내려왔던 계단에서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엽은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부화하려는 알을 다시 보았다.
‘파충류.’
아마존에 존재하는 파충류와 곤충들의 변종이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랄한다.”
쾅!
결국 상엽은 스트라이크를 바닥에 꽂아 버렸다.
“이놈!”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알은 부화하지 못한 채로 전부 터져 버렸고 건물 전체에 선명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구성은 꽤 있네.’
단숨에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스트라인버그의 건물이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되었다.
“자, 대화는 지금부터.”
“어째서 죄도 없는 생물을 죽이는 것이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들을.”
“지랄한다.”
상대는 백발노인이었다.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상엽은 그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진 것이 마치 고양이의 눈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난 말이야. 변종만 보면 죽이는 버릇이 있어.”
“인간의 오만함이…….”
“닥쳐. 변종이 우리 소장님을 죽였어. 내 가족 같던 아저씨들을 죽였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이건 종족 전쟁이야. 살아남기 위한 종족 전쟁.”
상엽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너도 변종이잖아. 어디서 사람 흉내를 내고 있어?”
“낄낄낄!”
갑자기 분노했던 노인이 허리를 젖히며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것도 꽤 재미있단 말이야.”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그래? 너 따위의 능력으로?”
“변종 주제에 도발을 하네.”
상엽은 잔뜩 비웃음을 지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버려진 허물처럼 노인의 겉모습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신 그 안에서 주먹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밖에 되지 않는 고양이가 나타났다.
악마의 눈을 가진 고양이.
꼬리는 전갈 같은 침이 있었고, 검은 털은 고슴도치처럼 솟아서 가시 끝에 작은 액체를 머금었다.
그리고 엉덩이 쪽에는 이상한 알주머니 같은 것을 차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뭔가가 부화하려는지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악령의 어머니.
성아가 고양이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됐어. 더 설명할 필요 없어. 곧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상엽은 해머를 움켜쥐었다.
“눈 깔어. 애완동물 주제에.”
그는 거침없이 고양이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