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협상 진행해.”
상엽의 말은 뜻밖이었다.
사신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표정이 환해졌고, 루시는 반대로 어두워졌다.
왕수가 상엽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든 것이다.
“알겠습니다.”
루시는 상엽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감히 다시 생각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사신에게 협상을 위한 장소로 자신의 집무실을 지정했다.
문 앞에 있던 코드 제로의 요원이 사신을 루시의 집무실로 안내하는 동안에도 상엽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루시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상엽에게 물었다.
“코드 원, 괜찮으십니까?”
직접적인 질문을 할 수 없었던 루시는 결국 애매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엽이 웃음을 보였다.
“내 연기 괜찮았어?”
“저도 속았습니다. 역시 협상은 없는 것입니까?”
“아니, 협상은 해야지. 생명초를 완성할 기회인데 반드시 잡아야지.”
루시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에 상엽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생명초는 받을 거야. 그런데 용소는 안 줄 거야.”
거짓 협상이었다.
“안 될 거 없잖아. 어차피 서로 죽여야 하는 운명인데.”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루시는 그제야 안심하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상엽은 루시와 대화할 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드시 성공해야 돼.”
그에게 찾아온 최고의 기회였다.
“누나,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반드시 살려 줄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초반에는 모든 것이 루시의 의도대로 되는 듯했다. 상대가 워낙 주눅이 든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신은 협상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문제점을 파악했다.
“서로 믿을 수 있는 확인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루시가 제시한 교환 방법에는 이것이 빠져 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 용소를 내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던 터라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조건을 조율했다.
그렇게 결국 협상은 서로가 양보를 한 상태에서 성사되었다.
“사천 성도에서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현재까지 사천은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천의 주민들은 각 성의 정책에 따라 이주를 하는 상태였고 그럴 사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궁핍한 삶을 살았다.
상엽은 여전히 이런 현상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지만 운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설 수가 없었다.
“교한 방식은 대리인을 통한 직접 교환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코드 원과 왕수가 각각 곤명과 천진에 있는 걸 상대측에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본진에서 대장들은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이걸 상대방 인원 중의 한 명이 계속 지켜본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운반 과정에도 감시자가 붙겠지?”
“그렇습니다.”
상대가 속이는 걸 사전에 차단하고,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교환은 취소였다.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나마 안전장치를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본래 그들의 요구는 이것보다 몇 배나 강력한 보안이 있었다.
“용소가 움직이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안 돼.”
“분명히 변신을 파악할 수 있는 자를 보낼 것입니다.”
루시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교환 날짜가 언제야?”
“이틀 후입니다. 내일이면 상대 쪽 사람이 곤명에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도 당연히 사람을 보내야겠지?”
상엽은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10초면 돼.”
“물건 확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아.”
“하지만 탈출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상대도 짐작할 테니까요.”
서로 믿고 하는 거래가 아니었다.
“그들도 분명히 우리를 의심할 것입니다.”
“알아. 그래도 해야 돼. 그게 최선이야.”
상엽의 결론은 간단했다.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누나의 부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인생에 이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불가능한 일이라면 시도도 하지 않겠지만 상엽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루시는 상엽의 의도에 따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늦음 밤이었다.
상엽의 집무실에는 오랫동안 불이 켜져 있었다.
“우와, 나 지금 무서워.”
상엽은 꿈을 꾸는 듯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가 양성한 비서진 중의 한 명이었다. 상엽의 작은 버릇 하나하나까지 똑같이 행동을 하는 것을 보자 등골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솟구쳤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자가 올 것입니다.”
“루시, 너도 저렇게 변할 수 있어?”
루시는 상엽이 집중을 하지 못하자 궁금증부터 풀어 주었다.
“우와!”
결국 루시도 상엽으로 변했다.
“내가 세 명이야.”
옷과 눈빛마저 완벽히 같은 상엽이 셋이었다.
루시는 놀란 상엽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집중하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응. 알았어.”
상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짜에게 의자를 넘겨주었다.
“그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은 잠깐입니다.”
“10초면 돼.”
상엽은 계속해서 10초를 강조했다.
“우리 쪽 사람은 아침에 도착할 것입니다.”
“누가 가기로 했어?”
“오상식입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상엽의 전담 브로커였던 오상식이라면 조각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최적이 인물이었다.
“그럼 늦지 않게 가야지. 출발하자.”
상엽은 가짜를 두고 직접 천진으로 갈 생각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 그가 날려 버린 군사 본부가 있던 도시였다.
“복구는 했나 모르겠네.”
그는 복제 인간 같은 비서 한 명을 남겨 두고 곤명을 떠났다.
이른 아침.
오상식은 배를 통해 천진의 항구에 도착했다.
그를 맞이하는 인원은 10명으로 소수였지만 하나하나가 실력자로 배치되었다.
‘감시자군.’
실제로는 오상식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오상식의 실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강한 자들이 배치된 상태였다.
-차이나 커넥션의 실력자들이 베이징과 천진에 모여 있다.
이는 팬텀과의 대치 때부터 일어난 일이지만 최근에는 그 수가 늘어났다.
왕수가 이번 교환 작전에 사활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무리 정상엽이라도 여긴 무리다.’
천진에 내려선 그때부터 오상식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
상엽은 바다를 통해 천진으로 숨어들었다.
빽빽한 감시가 있었지만 바닷속을 모두 감시할 수는 없었기에 작은 틈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루시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았다.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그럼 복잡하게 가자고.”
가장 간단한 계획은 에레나의 생명초 조각을 확인하는 순간에 기습을 해서 탈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상식이 보낸 정보로는 이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기림이 왔다고 합니다.”
화이트 유저 기림.
갓랭킹 1위.
시크릿 유산으로 이름이 지워진 자를 제외하면 최고의 실력자였다.
1위라는 타이틀이 주는 상징성이 워낙 컸기에 그의 등장만으로도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최근에는 신전에 들어간 터라 소식이 없었는데 다시 나타난 것을 보아 더욱 성장했을 것이 분명했다.
“뭐 어차피 랭킹은 이제 의미가 없잖아.”
랭킹 1위라고 해도 상엽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림뿐만이 아닙니다. 차이나 커넥션의 실력자들이 모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상식이 형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번 계획이 무산되면 가장 위험한 것은 오상식이었다.
‘루시도 위험해.’
상엽은 어떻게든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상식과 루시는 아니었다.
당장 기림에게 쫓기기만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걱정 마. 내 누나 살리자고 너희들 죽이는 짓은 안 해. 여차하면 계획 자체를 포기할 거야.”
이것이 상엽의 판단이었다.
“플랜 B로 가자.”
“알겠습니다.”
상엽은 일을 간단히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루시가 준비한 다음 작전을 실행했다.
30분 후.
“등록.”
상엽은 아껴 두었던 그레이 상점의 마지막 등록 지점을 설정했다.
바로 천진의 그레이 상점이었다.
“당신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요.”
“상점의 규칙, 알지?”
“물론 정보를 흘리진 않습니다.”
40대 초반에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그레이 상점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
“꽤 시끄러워지겠군요.”
“아니길 기원해. 내가 바라는 게 그거니까.”
상엽은 등록 지점을 설정한 뒤로 곧장 곤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신을 직접 만났다.
루시는 천진에 남겨 둔 상태라 그는 홀로 사신을 만나야 했다.
“용소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사신의 요구는 예상대로 용소를 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상엽은 전화기를 들었다.
“용소 데리고 와.”
상엽의 요청에 따라 집무실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런데 용소를 본 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짜군요.”
그의 예상대로 용소로 변신한 비서였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하려는 순간, 상엽이 움직였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사신의 머리에는 은빛 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마오의 실.
상엽은 이 작전을 위해 운부에 있던 한 명의 세뇌를 포기했다.
세뇌한 자에 대한 마지막 명령은 자살이었고, 이로 인해 한 명의 여유가 생겼다.
그 한 명을 사신으로 채운 것이다.
“아무 이상 없다고 전해.”
감시자로 온 사내는 스카우트 출신이라 신체 능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유령아.”
상엽은 이마오의 실도 모자라서 추종자에게 확인까지 시켰다.
-완벽히 세뇌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을 끝낸 상엽은 사내가 왕수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왕수가 뭘 준비했는지 말해.”
“그는 정상적인 교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정상적으로 교환을 준비해. 비정상은 나 혼자 할 테니까.”
상엽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천진으로 돌아갔다.
사신을 세뇌한 덕분에 오상식은 정상적으로 교환 물품을 확인했다.
-진품입니다.
왕수는 사신의 말대로 정상적인 교환을 준비했다.
-다섯 시간 후에 출발합니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사천이었다. 왕수 쪽에서는 사천에 등록 지점이 있는 자를 선발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이 역시 변수를 줄이려는 그의 계획 중의 하나였다.
“천진을 떠나는 인원을 발견했습니다. 사천으로 갈 것 같습니다.”
상엽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사천에서 조각을 얻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고, 여기 남는다면 다섯 시간 안에 수를 써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
“사천에서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림이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랭킹 1위라는 놈이 한가하네.”
기림이 사천으로 갔다고 해서 천진의 병력이 크게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여기서 끝장을 보자.”
상엽은 결정을 내렸다.
군사 본부가 무너진 탓에 왕수는 도심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군부대를 이용하고 있었다.
예전 군사 본부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방어 병력을 배치하기에는 충분한 구조였다.
게다가 현재는 부대 안에 서른 명의 막강한 정예 멤버가 버티고 있었다.
랭킹 1위 기림이 빠져나갔지만 또 다른 10위권 유저가 두 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시크릿 유물로 가려진 유저도 있어서 왕수는 습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쉽지 않겠는데.”
상엽은 추종자를 통해 가장 먼 거리에서 임시 본부를 살폈다. 왕수가 철저하게 대비한 만큼 은밀히 진입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상엽은 천진에 온 뒤로 루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코드 원,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뭔데?”
“우리가 이렇게 할 거라는 걸 왕수가 모를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미 확인했잖아. 세뇌까지 시켜서 알아냈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상엽은 그제야 루시의 행동이 평소와 다른 이유를 들었다.
“코드 원이 이마오의 실을 가졌다는 걸 왕수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상엽은 정찰 상황을 까맣게 잊고 루시의 말에 집중했다.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교환할 것이라고 알려 주고, 그놈을 일부러 나한테 보냈다?”
말을 하면서도 상엽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루시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가 왕수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상엽은 그 말이 단순한 불안이나 의심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