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정말이야?”
“응. 나랑 같이 연구하기로 했어.”
“갑자기 웬일이야?”
고문 같은 식사를 마친 상엽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해변을 잠시 걸었다.
동희의 말대로 몸에는 힘이 넘쳤지만 고난의 시간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커진 터라 휴식이 필요했다.
그게 불과 30분 전이었다.
루시는 자신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제가 배신해서 고문할 일이 있으면 3일을 굶기고 석동희의 음식을 주세요. 그럼 모든 진실을 말할 거예요.’
상엽은 그 말에 끔찍한 상상을 하며 바닷바람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다시 동희에게 돌아왔는데 이런 말을 들은 것이다.
“내가 좋은가 봐.”
“왜?”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었대. 정성이 느껴지고 위로가 되더래.”
동희는 인생 최고의 칭찬을 받은 덕인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희야, 잠깐만 확인할 게 있어.”
상엽은 곧장 용소를 찾아갔다.
그는 동희의 보양식을 먹은 덕분인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은 표정이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식사라니.’
동희가 워낙 상식을 벗어나는 능력이 있으니 이 부분은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꼭 확인할 게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
상엽의 말에 용소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상엽에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동희가 해 준 음식, 정말 맛있어?”
상엽은 이걸 묻고 싶었다. 그러자 용소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제 인생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상엽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성아가 있었다.
“진실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상엽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진짜라고?’
그의 속마음을 읽은 성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용소야, 이거 마셔.”
동희는 상엽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보라색의 악취를 풍기는 액체를 다시 용소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용소는 웃으며 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 웃음과 음료를 삼킨 후에 뱉어 내는 청량한 숨소리도 상엽에겐 거짓말 같았다.
“고마워.”
그들은 벌써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헤헤.”
상엽은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동희랑 같이 연구하기로 한 거 사실이야?”
“네. 그러고 싶습니다.”
성아가 진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목적이 뭐야? 단순히 동희와 함께 있고 싶어서?”
“아닙니다.”
그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왕수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말 역시 진실이었다. 그나마 복수라는 단어는 상엽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동희를 배신하면 내 손에 죽어. 알지?”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역시 진실이었다.
사람의 마음이야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지금은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상엽아, 그래서 말인데 블랙 해머들 나 주면 안 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랑 용소가 신의 무기를 만들어서 블랙 해머들에게 모두 나눠 줄게.”
상엽은 동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동희는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알았어.”
그냥 돌아서려는데 루시가 눈치를 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코드 원, 기회를 한 번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맛있는 음식도 대접받았는데.”
그녀는 동희의 능력을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젠 동희 혼자가 아니었다.
‘신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팀이야.’
상엽이 이를 단번에 거절한 게 실수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간절했다.
“아마 세상에서 동희를 가장 믿고 좋아하는 사람이 나일 거야. 동희 너도 알지?”
“응. 나도 상엽이가 제일 좋아.”
“맞아. 그게 문제야.”
동희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블랙 해머들도 너처럼 나를 제일 좋아하거든. 그런데 동희 너는 아마 블랙 해머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거야.”
동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동희 너만큼이나 블랙 해머가 소중하거든. 그들이 너로 인해서 다치는 게 싫어. 괜히 블랙 해머에 들어와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상엽은 능숙하게 동희를 설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위로도 잊지 않았다.
“우린 지금처럼 친구로도 충분하잖아.”
그 말이 동희를 웃게 했다.
“헤헤. 맞아.”
둘이 서로 합의를 하는 듯하자 루시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상엽을 원망하는 마음마저 생긴 것이다. 결국 루시는 둘의 대화에서 잘못된 점을 파고들었다.
“석동희가 블랙 해머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건 잘못된 판단입니다.”
“응?”
“석동희는 이미 사람이 아닌 담비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블랙 해머와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루시는 이렇게 물으며 상엽이 아닌 동희를 보았다.
동희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누나 말도 맞는 거 같은데?”
“원래 루시가 똑똑해. 그러니까 두 번 생각해 봐. 한 번만 생각하면 속기 쉬워.”
“응, 알았어. 예쁜 여자는 조심해야지.”
자신을 두고 여러 평가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루시는 오직 목적에만 집중했다.
“인턴 개념으로 잠시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도의적으로도 석동희에게 잠시 거처가 필요한 상황이니 말입니다.”
동희는 아직 어디서 머무를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이것까지 감안해서 루시는 일단 잡아 두는 제안을 했다.
“동희 너는 어떻게 생각해?”
“루시 누나가 똑똑한 거 같아.”
결국 대화는 루시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동희야,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뒤에 어떤 결정을 하든 그때까지는 블랙 해머를 나처럼 대해 줘야 돼.”
“응. 알았어. 나도 지내보고 결정하면 좋을 것 같아. 상엽이한테 피해 주는 건 싫어.”
드디어 긴 대화의 합의점을 찾았다. 그런데 동희의 마지막 말에 상엽은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내가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너한테 해 주던 것처럼.”
문제는 동희의 선택이 아니었다.
‘블랙 해머가 동희를 거부할 거야.’
상엽과 루시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 * *
운남 애뇌산.
험한 산세에 맹수가 득실거리고 독사가 가득하며, 나이를 알 수 없는 거목들이 군락을 이룬 산이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골짜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천연의 자연은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
100여 마리의 담비들의 터전으로 애뇌산은 최고의 지역이었다.
변종들은 이미 블랙 해머에 의해 소탕이 되었고 연구소를 건설하기에도 적합했다.
동희가 원하는 연구소는 담비들과 함께 만드는 천연의 연구소라 상엽이 굳이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당분간 블랙 해머들은 여기서 지내.”
이미 결정을 내린 상엽은 적극적으로 동희와 블랙 해머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같은 팀이 되기만 하면 이것보다 좋을 수는 없어.’
처음부터 이런 생각은 있었다. 다만 동희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긴 대화를 해야 했다.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상엽은 동희와 사하르에게 모두 같은 말을 하고 곤명으로 돌아갔다.
곤명에 도착한 상엽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아주 묘했다.
“왕수의 사신과 팬텀의 사신이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팬텀과 차이나 커넥션.
이를 대표하는 자들이 모두 곤명에 머물고 있었다.
“팬텀부터 불러.”
상엽은 상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팬텀의 사신은 처음부터 친근한 표정과 말투로 상엽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의 목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상엽이 팬텀에 합류하는 것이 최고의 결론이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지난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것은 저희 대통령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팬텀은 연합국을 표방했고 기존 팬텀 길드의 길드장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팬텀 대통령은 친필 서신으로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파격적이네.”
그만큼 상엽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사건에 대해 직접 언급한 사과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통령의 자리를 감안했을 때는 충분히 성의를 보인 것이다.
“선물도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사신이 내민 것은 유산 조각이었다. 그런데 4개의 유산 조각은 모두 같은 무늬였다.
완성된 유산인 것이다.
갓코인 유저에게 완성된 유산만큼 값진 선물은 없었다.
“이리타스의 눈빛. 특수 스킬 천리안이 있습니다.”
완성시킬 경우 고글을 연상시키는 유산이었다.
기본적으로 빛을 이용한 공격에 내성이 강하며 특수 스킬 천리안은 10단계까지 강화할 경우, 먼 거리뿐만 아니라 투시가 가능했다.
“투시라면…….”
“옷도 가능합니다.”
그 말에 상엽은 앉아 있던 의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루시의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건 받아야 돼.’
본능이 그렇게 말했지만 루시의 눈빛이 자제할 것을 경고했다.
“사과 선물로 생각해도 되지?”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도 없으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능숙한 말솜씨는 상엽의 경계심을 확실히 누그러트렸다.
“편하게 원하는 만큼 쉬다가 가. 필요한 건 뭐든 지원하라고 말해 놓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신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물러났다.
“코드 원.”
사신이 나가자 루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엽의 책상 곁으로 왔다.
“걱정하지 마. 내가 팬텀을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까.”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왕수가 열이 바짝 올라 있잖아. 지금은 왕수한테 집중해야지.”
루시는 상엽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 유산은 완성해도 되지?”
그 말에 루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화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투시가 된…….”
“코드 원.”
낮고 짧은 부름이 상엽의 말을 끊었다.
“그 유산은 스카우트들이 탐내는 종류입니다. 완성된 유산이라는 특징까지 살리면 꽤 높은 가치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조각은 지금도 많잖아.”
“현재 전부 코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유물과 유산을 거래를 통해 흡수 코인이 많은 쪽으로 교환한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흥정을 할 경우, 코인 수치로는 몇 배나 되는 조각을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레이 코인이 필요하시다고 판단했습니다.”
“잘했어. 안 그래도 거북이를 좀 더 키워야겠어.”
신 호트를 상엽은 이렇게 불렀다.
“생명초 조각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적어도 10억 코인 이상은 될 듯합니다.”
해령 길드에 있던 생명초 조각이 상엽의 손에 들어오면서 8개가 되었다.
2개가 남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동안 획득한 전리품이 워낙 많아서 계속 정리가 되는 중이었다.
‘루시가 적어도 10억이라고 했으면 15억쯤 되겠네.’
이젠 상엽도 루시에게 적응이 끝난 상태였다.
‘이젠 유산보다 신의 힘을 강화해야 돼.’
상엽이 유산과 유물에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고, 코드 제로에서도 같은 분석을 했다.
“왕수의 사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오라 그래. 어떤 표정인지 궁금하니까.”
허락이 떨어졌고 드디어 왕수의 사신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팬텀의 사신과는 표정부터가 달랐다.
“걱정 마. 안 죽여.”
상엽은 일단 상대의 공포심을 조금 줄여 주었다. 하지만 표정이 펴지진 않았다.
“왕수는 잘 있지?”
놀리듯 묻는 질문에 사신은 억지로 대답을 했다.
“네. 잘 계십니다.”
“안타깝네. 화병이라도 나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상엽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사신의 표정이 다시 극도로 어두워졌다.
“자, 준비한 이야기나 들어 볼까?”
“연구소장의 귀환을 원하십니다.”
“그건 예상했고, 그냥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닐 텐데.”
상엽은 용소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단지 왕수를 더욱 자극하기 위해 대화를 이끄는 중이었다.
그런데 상대도 사신을 보낸 의미가 있었다. 한 방을 준비한 것이다.
“에레나의 생명초 조각, 2개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상엽의 표정이 굳었다.
‘완성…….’
2개의 조각을 받으면 생명초 조각이 완성된다.
‘누나를 살릴 수 있어.’
상엽의 머릿속에서 단 한 번도 지워지지 않은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