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코인-209화 (207/300)

# 209

중심을 잃은 라루의 몸이 바람에 밀려나는 종잇조각처럼 바닥에 긴 선물을 남기며 튕겨져 나갔다.

단 한 방이었다.

그것도 급소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몸을 돌려 양팔을 교차해 충격을 최소화했고 타격이 닿는 순간 충격을 흘리기까지 했다.

평소라면 뼈가 부러지더라도 그쯤에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라루는 상상 이상의 충격으로 인해 바닥을 쓰레기처럼 굴러다녔다.

“크아!”

그는 중심을 잡기 위해 머리를 땅에 박았다.

깊게 파인 고랑이 생기며 그의 몸이 서서히 멈췄다. 중심을 잡고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그는 분노를 표출할 틈이 없었다.

상엽이 어느새 쫓아와서 다시 한번 해머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라루는 온 힘을 다해 바닥을 치며 뛰어올랐다. 동시에 상엽을 향해 머금고 있던 피를 뱉었다.

파파팟!

그의 피는 공기에 닿자 바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서로의 파편이 끈처럼 연결되더니 거미줄 같은 막을 만들었다. 상엽은 이 막을 몸으로 통과하며 해머를 휘둘렀다.

팟!

상엽의 해머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의 거미줄이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촤라랏!

“어딜 가려고?”

상승하는 라루의 발목에 고스트 체인이 걸렸다.

라루는 상엽이 이를 당기려 하자 재빨리 클러를 휘둘렀다.

촤앗!

라루의 오른쪽 무릎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스스로 체인이 묶인 오른발을 잘라 버린 것이다. 덕분에 라루는 상엽의 체인을 벗어나 다시 한번 상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만큼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이건 뭐야!’

그는 짜증이 솟구쳐서 한쪽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여인을 보았다.

공기의 압력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으로 인해 라루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도망가야 돼.’

라루는 발을 자르는 순간 도주를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위를 보던 상엽은 라루의 발과 손목에서 뿌려진 피가 시야를 가린다는 느낌을 보았다.

그 순간, 라루의 피가 폭발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거미줄을 형성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거미줄과는 느낌이 달랐다.

‘위험하다.’

붉은 피는 폭발과 동시에 녹색으로 변했고 위험한 냄새를 풍겼다.

‘도망간다.’

상엽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잡아야 돼.’

상엽은 독 거미줄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고 속도로 라루를 쫓았다.

‘파괴전차.’

콰르릉!

상엽이 두꺼운 독 거미줄을 향해 돌진했다.

스스스!

그의 몸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거미줄이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엽은 이를 악물며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라루가 만든 산성의 막이 한계까지 늘어나더니 결국 균열을 일으켰다.

팟!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엽의 몸이 거미줄을 통과했다.

“끝.”

그 목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상엽이 라루의 등 뒤에 닿았다.

쾅!

상엽의 몸이 라루를 몸을 들이받았다.

“컥!”

답답한 신음을 시작으로 라루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우웅!

상엽은 가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공중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다시 방향을 잡았다.

라루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였다.

쿠쿠쿠!

최고 속도에 들어선 파괴전차는 유성처럼 긴 잔상을 남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쾅!

섬의 지면이 모두 깨져 나가며 바닷물이 땅 위로 침범했다.

상엽의 돌진으로 지면이 낮아진 것이다.

바닷물은 섬 중앙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덩이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상엽은 바닷물이 발목을 적시는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끈질기네.”

라루는 파괴전차를 정면으로 맞고도 숨이 붙어 있었다.

“학! 학!”

라루는 가슴이 완전히 깨졌음에도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애썼다.

“10분이라고 한 건 내가 오바했어. 인정해.”

상엽도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왼쪽 어깨는 피부가 완전히 잘려 나가 뼈가 드러났고, 몸 곳곳에는 금방이라도 내장이 흘러내릴 것처럼 큰 상처가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절대 서 있을 수 없는 상처였다. 그럼에도 상엽은 해머를 들어 올렸다.

“잘 가. 시간을 채워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상엽은 미련 없이 해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숨을 몰아쉬던 라루의 눈빛이 변했다.

‘위험.’

이를 알았지만 상엽은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상엽은 해머를 아래로 찍었고, 라루의 입에서 진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퍼퍼펑!

상엽의 몸을 덮은 피가 다시 한번 폭발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큰 상처를 입었던 상엽은 이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으아!”

상엽은 괴성을 지르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해머를 내려찍었다.

쾅!

결국 라루의 머리가 깨졌다.

“헉. 헉.”

라루의 몸은 빛으로 흩어져 상엽에게 흡수되었다. 하지만 상엽은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레나…….”

상엽은 남은 힘을 짜내며 상점을 소환했다.

‘뭐야?’

레나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상점이 반응하지 않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이용하고 있을 때.

-전투가 끝나지 않았을 때.

“멈춰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사내는 상엽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왔다.

불청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나타난 사내의 뒤로 100명의 전투 요원들이 뒤따랐다.

‘당했어.’

블랙 나이츠의 전투 요원들이었다.

지금 상엽은 그들과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상엽은 이를 악물고 친위대로 벽을 만들었다. 그런데 상대의 돌진이 의외로 빨랐다.

친위대가 미처 소환되기도 전에 선두에 선 사내가 상엽을 향해 맹렬한 기파를 날렸다.

맹수의 포효 같은 기파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상엽을 덮쳤다.

평소대로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쾅!

결국 상엽은 그 힘에 밀려 라루에게서 멀어졌다.

“길드장님!”

상엽이 서 있던 자리에 도착한 이는 블랙 나이츠의 부길드장이었다.

그는 결국 길드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수하들과 함께 저지섬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라루가 남긴 유물과 유산 보관함뿐이었다.

“죽여라!”

분노한 부길드장의 명령에 따라 100명의 전사들이 상엽을 향해 뛰었다.

-저한테 맡기세요.

상엽의 위기를 직감한 성아가 빙의를 제안했다.

“너한테 내 몸을 주면 상처가 없어져?”

-그렇진 않아요.

“그럼 의미가 없잖아.”

상엽은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살려고 발버둥은 쳐 봐야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끝까지 이 악물고 가는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어.”

상엽은 성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숨을 들이켰다.

속이 답답하고 온몸에 통증이 퍼졌다. 해머를 쥔 손이 심하게 떨려서 들어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죽으려고 싸우는 거 아니야. 끝까지 살려고 싸우는 거야.”

상엽이 스스로 의지를 다지자 옆으로 늘어선 친위대가 괴성을 질렀다.

-이길 수 없어요! 차라리 저한테 맡기면 최대한 벗어나 보겠어요!

“닥쳐!”

상엽은 달려오는 100명의 전사를 노려보았다.

“아직 안 끝났어.”

목숨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제발! 당신이 죽으면 저도 소멸돼요!

성아는 이 싸움의 결과를 알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상엽은 이미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려 할 때였다.

쾅! 쾅! 쾅!

달려들던 블랙 나이츠 전사들 사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상엽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스킬들을 보며 이동을 멈췄다.

“기후가 나빠 조금 늦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무시한 거야?”

“코드 원에게 배웠습니다.”

“잘 배웠네. 인정해.”

툭. 툭. 툭. 툭.

하늘에서 비와 함께 떨어진 사람들이 상엽의 앞을 막았다.

200명의 블랙 해머.

“죽여라.”

사하르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이 블랙 나이츠를 향해 달려갔다.

런던의 블랙 나이츠 본부가 무너졌다.

상엽은 분노했다.

3명의 전사가 죽었다.

부길드장을 포함한 100명을 전멸시켰지만 아군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압도적인 승리라고 하겠지만 상엽은 사라진 3명의 전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아팠고 이를 분노로 표출했다.

‘나 때문에.’

굳이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의 블랙 나이츠 잔당 소탕은 그 아픔을 달래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팬텀은 조용합니다. 완전히 물러났습니다.”

상엽이 진짜 노리는 건 팬텀이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그들을 거대 단체라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시기를 조절할 뿐이었다.

“마무리하자.”

팬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상엽은 철수를 지시했다.

결국 블랙 나이츠는 그렇게 사라졌다.

* * *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드디어 여기까지 오셨군요.”

상엽은 추억의 장소로 돌아왔다.

행복 장의사.

상엽을 맞이하는 이는 남수사였다.

남수사는 처음 만난 그때처럼 정중한 말투와 행동으로 상엽을 맞이했다.

“신의 상점에 가려고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수사는 좁은 사무실에서 상엽 앞에 차를 내밀었다. 상엽이 별다른 말 없이 차를 모두 마실 때까지 남수사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네요.”

“말씀하시고 싶은 것만 하시면 됩니다. 그게 제 역할입니다.”

상엽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블랙 유저 중의 한 명이었다.

남수사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엽이 화이트 유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상엽이 블랙 상점보다 먼저 찾아온 곳이 행복 장의사였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네. 신의 상점에 대해 말해 주세요.”

기본적으로 블랙 신의 상점과 시스템은 같았다. 다만 신을 상징하는 단어는 조금 달랐다.

징벌.

철갑.

재앙.

통솔.

쾌락.

조금씩 의미가 다르지만 기본적인 역할에 대한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철갑으로 할게요.”

블랙 상점에서는 철벽, 화이트 상점에서는 철갑이라는 이름이었다.

상엽은 본래의 의도대로 결정을 내렸다. 남수사는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결정하신 겁니까?”

“네.”

남수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명함을 내밀었다.

“10명의 신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상엽은 10명의 이름과 설명에 집중했다.

철갑 신의 상점은 아프리카 사막의 외딴 캠프에 자리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사막을 조사하는 연구 단지였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신의 상점 단 한 명이었다.

‘척박한 환경이 컨셉인가?’

상엽은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캠프로 들어섰다.

삐쩍 마른 체구에 키가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50대 후반 사내가 화이트 신의 상점이었다.

그는 상엽을 보자 신기하다는 듯이 안경을 고쳐 썼다.

“여길 오는 사람이 있긴 있구먼.”

“그러게요. 저도 제가 여기 올 줄 몰랐어요.”

“어서 와. 일단 차부터 한잔하지.”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상엽을 천막 안으로 이끌었다.

“루소라고 하네. 자네는 정상엽이지?”

“알고 계셨네요.”

“당연히 내 직업인데 알고 있지.”

남수사와 달리 수다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상엽은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리고 온 터라 그와의 수다가 부담스러웠다.

‘블랙과 화이트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어.’

어차피 상점이면 다른 유저에게 정보를 풀진 않겠지만 굳이 대화를 할 이유도 없었다.

“신들을 보여 주세요. 제가 좀 바빠서요.”

루소는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상엽은 단호했다.

“수다는 선택한 후에. 어때요?”

“약속 잊지 말게.”

“알았어요.”

상엽은 드디어 철갑으로 불리는 10명의 신을 만날 수 있었다.

태양이 떠오른 우주가 배경이었다.

빛의 진짜 모양은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다. 끝도 없이 폭발하는 화염 덩어리 앞에 10명의 신이 서 있었다.

대부분이 단단한 체구에 두꺼운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은빛 방패를 든 신도 있었다.

철갑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그들은 그저 보기에도 단단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상엽은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신을 선택했다.

“호트.”

상엽의 말에 루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네, 정보를 제대로 듣고 온 건가?”

“네.”

“그런데 호트를 선택한다고?”

“네. 이미 결정했어요.”

루소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호트라는 신을 보았다.

10명의 신 중에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이 아닌 신이었다.

‘거북이.’

몸을 웅크린 초대형 거북이였다.

“철갑이라는 말에 제일 어울리잖아요.”

루소와 달리 상엽은 거북이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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