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하와이 화산 공원.
그곳에서 오랫동안 경비 업무를 하는 사내가 있었다.
50대 초반에 평범한 인상을 가진 하와이의 전통 민족은 언제나 그렇듯이 공원 순찰에 나섰다.
몇 년 전에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민가를 덮치는 일이 있은 다음에는 모두가 꺼려 하는 직업이 되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같은 시간에 순찰을 돌았다.
순찰이라고 해 봐야 공원 내의 순찰이라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그가 주목하는 것은 화산 활동 징후를 체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사내가 그의 규칙적인 일상을 깼다.
“안녕하세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함께 있던 동료에게 먼저 가라는 말을 하며 순찰차에서 내렸다.
차가 떠나고 그들은 뜨거운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는 화산 공원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상점을 좀 보러 왔어요.”
상엽은 베테랑 경비대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를 본 순간, 경비대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곳으로 가지.”
중저음의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오랜 세월 척박한 환경을 지켜 온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관광객들이 들어올 수 없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화산 활동의 징후가 선명히 나타나는 곳으로 경비대원에겐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다.
“여기서 하지.”
“그래요. 랄프 아저씨.”
상엽의 호칭에 랄프의 단단하던 표정이 깨졌다. 진심으로 웃음을 보인 그를 향해 상엽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인가? 상점을 원하는 건가?”
“둘 다예요.”
“그럼 악수로 받아들이지.”
랄프는 상엽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상점은 열리지 않았다.
“이제 상점을 보여 줄 차례군.”
랄프는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도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를 옆으로 크게 저었다.
그러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상엽과 랄프를 감싸는 아공간이 만들어졌다.
“여긴 다른 차원의 공간이네. 다른 이들은 들어올 수도, 볼 수도 없지.”
아공간이 완성되자 상엽은 별빛이 무수히 박힌 우주의 가운데 서 있었다.
도지연이 보여 주었던 모습이 바로 신의 상점을 상징하는 배경이었다.
“열 명의 신이 있네.”
우주 공간에 홀로그램처럼 신들이 떠올랐다. 이름뿐만 아니라 외모도 그대로 드러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홉 명뿐이네요.”
랄프는 분명 열 명이라고 했지만 상엽의 눈에는 아홉 명만 보였다.
“선택할 수 없는 신은 보이지 않을 걸세.”
상엽은 그 말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온 자가 있구나.’
블랙 유저 중에 파괴 신을 선택한 다른 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메뉴는 없나요?”
“없네.”
신의 상점은 따로 강화나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신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하게.”
“신의 힘은 어떤 식으로 가지게 되나요?”
상엽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성아처럼 수호신이 되는 것인지, 드바란의 투구처럼 원할 때 신의 힘을 부르는 것인지, 추종자나 유령 전사들처럼 지배를 통해 소환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아직까지 정보가 없었다.
“체득하게 되는 것이네.”
“체득이라면…….”
“자네의 몸이 신이 되는 것이지.”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뜻이었다. 힘을 얻는 순간, 내가 가진 본래의 능력이 된다.
“성격이나 인성도 같이 따라오나요?”
“후유증처럼 기운이 남을 수는 있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네. 신의 힘을 얻는 것이지 신이 자네를 지배하는 건 아니니까.”
상엽이 원했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결정했어요.”
“누굴 선택하겠나?”
상엽은 우주 공간에 펼쳐진 9명의 신 중에서 한 명을 주목했다.
가장 덩치가 크지만 착한 눈을 하고 있는 신이었다.
거인을 연상케 하는 10미터 신장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배가 불룩 튀어나와 귀여운 느낌도 있었다.
“무탄.”
상엽의 선택에 랄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후회하지 않겠나?”
랄프가 보기에 무탄은 훌륭한 선택이 아니었다.
“무기가 같아서요.”
“그건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네. 사실 이 상점에 올 정도면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래도 같은 무기라는 장점이 작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
상엽은 굳이 자신의 생각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무탄.
가장 멍청하고 가장 파괴적인 신.
반면 지나친 공격 성향으로 인해 생명을 지키는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밸런스가 형편없는 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상엽은 무탄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화이트 신의 상점에서 보완하면 돼.’
상엽이 무탄을 선택한 진짜 이유였다.
‘블랙에선 극단적인 공격을 선택하고, 화이트에선 극단적인 방어를 선택하면 최고의 효율이 될 거야.’
아직 화이트 신의 상점에 가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특성을 보면 방어에 특화된 신이 있을 것은 분명했다.
“마지막 기회네. 무탄을 선택하겠나?”
“네.”
상엽은 흔들림이 없었다.
랄프는 더 이상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몸을 돌려 랄프의 모습이 그려진 우주 공간을 보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새로운 후계자가 신 무탄의 힘을 원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다른 신의 형상이 모두 사라지고 무탄의 모습이 상엽에게 다가왔다.
상엽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꺼낼 뻔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거인 무탄은 덩치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상엽은 그 기운에 익숙해질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그의 기운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빨리 적응하는군.”
“쉽지는 않네요.”
“앞으로 자네가 가지게 될 힘이네.”
랄프가 둘 사이에 끼어들자 무탄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상엽은 무탄의 허리 옆에 숫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0.
보이는 숫자는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제로였다.
“자네가 보는 수치는 퍼센트라네. 지금 자네는 제로 퍼센트의 힘을 가졌지.”
“코인으로 강화하는 건가요?”
“그렇다네.”
방식은 간단했다. 코인을 지불하면 퍼센트가 올라가고 그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무탄의 특수한 스킬은 25퍼센트, 50퍼센트, 100퍼센트에 개방이 될 것이네.”
“이전에는 힘만 가지게 된다는 거네요.”
“그 힘이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강화 코인은 얼마나 필요하죠?”
“1퍼센트당 2천만 코인.”
무탄의 힘을 모두 가지는 데 20억 코인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설명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네.”
신의 상점이 가진 특수성은 지금부터였다.
“신은 단 한 명만 선택할 수 있지만 100퍼센트로 완성을 하게 되면 다른 신을 다시 선택할 수 있네. 4급 신의 상점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고, 5급 신의 상점에서 다른 신을 선택할 수도 있지.”
이 부분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단 100퍼센트를 채우기 전까지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게 핵심이었다.
“다만 4급에서 3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4급 신 중의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는 건 미리 알려 주겠네. 그리고 같은 상점에서 두 번째 신을 선택할 경우 필요 코인은 2배가 되네.”
이는 다른 상점과 같은 방식이라 이해가 쉬웠다.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신의 상점에서는 소모된 코인은 일정 부분 보유한 코인으로 인정되네. 누군가 자네를 죽이면 신의 상점에서 소모한 코인의 10퍼센트를 획득하게 되는 거지.”
이건 상엽도 예상치 못한 시스템이었다.
신의 상점에서 소모한 코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나게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것이 죽게 되면 상대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비록 10퍼센트지만 그 수치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한 명의 신을 완성하면 20억 코인이 되고 이런 자를 죽이면 2억 코인을 획득하게 된다.
4급 상점을 가고, 3급 상점, 그 이후의 상점까지 갈 시기가 되면 이 수치는 어마어마해질 것이다.
‘또 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이네.’
신의 상점에서도 이런 방향성은 변하지 않았다.
“블랙과 화이트. 그 구분은 여전한가요?”
“그렇다네. 블랙 유저는 죽여도 코인을 얻을 수 없을 것이네.”
상엽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만 이용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럼 강화할게요.”
필요한 설명을 모두 들은 상엽은 2억 코인을 전부 무탄에게 투자했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빛이 무탄의 형상에 흡수되자 0이었던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겨우 10퍼센트네.”
아직 스킬을 개방할 수치도 되지 못했다.
“우리가 왠지 자주 봐야 할 것 같네요.”
“여기까지 직접 올 필요는 없네. 자네의 계약자가 언제든 무탄의 영혼과 연결시켜 줄 테니. 혹시 무탄의 힘을 완성하면 그때 다시 오게. 다음 상점으로 가든, 또 다른 신을 선택하든 길을 알려 줄 테니.”
“계약자라면 도지연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네.”
도지연을 통해 언제든 무탄에게 코인을 투자할 수 있었다.
‘무슨 적금 같네.’
어쨌든 편한 시스템이라 상엽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또 봐요.”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하겠네.”
랄프는 상엽의 선택이 끝끝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상엽은 굳이 설명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고 인사를 한 뒤에 하와이를 떠났다.
신의 힘.
스킬도 없고 신체적으로 변화된 부분도 없었다. 주먹을 움켜쥐어도 마찬가지였다.
상엽은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10퍼센트라 그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상엽은 운남성 곤명에 도착했다.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을 알고 있던 루시는 이미 시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엽을 본 루시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축하드립니다.”
“뭘?”
“신의 힘을 얻으신 것 말입니다.”
상엽은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몸을 보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힘이 겉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래?”
정작 본인만 모를 뿐, 10퍼센트만으로도 그를 만나는 이들은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미 상엽에게 익숙한 코드 제로 요원들임에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변화를 알아봤다.
“확인 좀 해 볼까?”
상엽은 일부러 곤명 시청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황무지로 갔다.
“음.”
해머를 꺼내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변화를 알아차렸다.
‘가벼워.’
마치 해머를 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생소한 느낌에 적응하기 위해 가볍게 해머로 바닥을 찍었다.
쾅!
“뭐야?”
거의 해머 무게로 떨어트리기만 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폭발이 일어났다.
“좀 더 멀리 가야겠는데.”
상엽은 도시에서 한참 멀어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조금씩 힘을 주며 해머를 휘둘렀다.
쾅! 쾅! 콰쾅!
폭발의 범위가 예상을 벗어났다. 힘을 강하게 줄수록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졌다.
“1.5배는 상승한 거 같은데.”
겨우 10퍼센트만으로 폭발의 범위가 50퍼센트 늘어난 것이다.
“100퍼센트까지 강화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야?”
상엽은 단 한 방으로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는 상상을 했다.
“이게 신의 힘이구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신의 힘을 습득했다.
마치 본래 자신이 가진 힘과 같았다.
“속도도 빨라졌어.”
단순히 힘만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힘을 주고 타격을 할 때, 공격 속도도 상승했다.
“달려 볼까?”
이번에는 민첩성을 체크했다.
“어?”
힘차게 황무지를 달리던 상엽은 스스로의 속도에 놀라고 말았다.
힘에 비해서는 상승 폭이 크지 않았지만 일반 블랙 상점의 강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 혹시 피부도? 뚱뚱한 신이었으니까 피부가 강해졌을지도 몰라.”
상엽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바위를 향해 돌진했다.
쾅!
바위는 그의 돌진에 깨진 유리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상엽은 이동을 멈추며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대로네.”
방어 부분에서는 달라진 게 없었다.
“신의 특성에 따라간다는 거지?”
랄프가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이유가 있었다.
“상관없어. 부족한 부분도 이제 가지게 될 테니까.”
상엽은 간단히 변화된 능력을 확인하고 시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본래 계획대로 누군가를 불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최상급 화이트 상점 장수한.
그가 상엽 앞에 섰다.